33화 월왕의 등장
목운요의 눈매가 화사하게 휘어졌다.
“왜 나를 선택한 건가요?”
선택의 결단을 내린 이상, 금란도 더 이상 조심스럽게 답할 필요가 없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예전에는 금 부인께서 은홍을 보내 저희들의 사정을 종종 살피시곤 했는데, 최근에는 저희를 대하는 은홍의 태도가 크게 소원했습니다. 그걸 보곤 금 부인께서 저희들의 매매 계약서를 아가씨에게 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운요는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로 금교도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소인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몸 쓰는 일이라면 몰라도 머리 쓰는 일은 언니만 못해……. 하나 언니가 아가씨를 따르기로 했으면 저도 따를 겁니다.”
평소 활달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금교 역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에 목운요는 반쯤 남은 차를 다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추측이 맞아요. 금 부인께서 두 사람의 매매 계약서를 제게 주셨답니다.”
자신이 던진 승부수가 적중했다는 생각에 금란은 힘겹게 한숨을 돌렸다.
“자, 그럼 요새 하운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 사람이 말해 줄 차례예요.”
“요 며칠, 하운방의 분위기가 영 뒤숭숭했습니다.”
금란은 지난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금추(錦秋)와 금국(錦菊) 두 사람이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것처럼 영 일에 집중하지 못하더군요. 그러던 중에 금국이 비취로 된 팔찌를 차고 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못 잡아도 족히 백 냥은 되어 보였습니다.”
그 말에 목운요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났다.
“금추와 금국의 솜씨가 두 사람만 못하긴 해도 아쉽게 되었네요.”
목운요가 금추와 금국 두 사람에게 당장 손을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인지, 금란이 두 사람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어쩌면 저희들이 잘못 본 걸지도 모릅니다. 금추과 금국은 평소에도 열심히…….”
“두 사람이 날 선택했으니 솔직히 말할게요. 최근에 금추와 금국은 가족이 아프다는 이유로 휴가를 냈는데, 집에 연락해 보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하더군요. 돌고 돌아서 금추와 금국이 채월각에 갔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금란과 금교의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채월각의 담 씨가 아가씨를 괴롭힌다는 이야기는 일찌감치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운방 내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제 입으로 먼저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훗날 채월각이 하운방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 버리면 불리해지는 것은 자신들일 터였기에.
“아가씨, 금추와 금국 두 사람이 채월각에 하운방의 기술을 넘겼을까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십중팔구는 그렇겠죠. 경릉성에서 저와 열 소녀들 말고 그 기술을 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순무 부인이 오늘 망강루에서 칠월 칠석 연회를 여시는데, 여러 부인들께서 참가하실 거예요. 채월각에서 우리의 기술을 손에 넣었다면 그날 선보이는 옷을 보면 자연히 알게 되겠죠.”
“아가씨, 저희가 뭘 하면 될까요?”
“일단 전 그냥 목 소저라고 불러 주세요. 아가씨로 불릴 팔자는 못 되거든요. 두 사람은 금추와 금국을 잘 감시해 주세요. 제 예상이 맞다면 금추와 금국은 그 죄를 달게 치러야 할 거예요.”
서릿발 같은 목운요의 이야기에 금란과 금교 자매는 낯빛이 하얗게 질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저.”
방에서 나온 금교는 방금 전 목운요의 서늘한 얼굴을 떠올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니, 소저가 두 사람을 어떻게 하실까?”
“우리랑은 관계없는 일이야. 소저를 주인으로 모시기로 한 이상 최선을 다해 보필하는 수밖에 없어. 소저의 성격을 보건대 절대로 우리를 함부로 내치시진 않을 거야.”
금란이 목운요를 선택한 건 그녀의 손에 들린 매매 계약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목운요의 성격과 일 처리, 품격 모두 여느 여인과 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운요는 자수방을 열어 금 부인과 인연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부인들과 점점 더 돈독한 친분을 쌓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따른다면 자신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지 몰랐다.
* * *
목운요는 금추와 금국 두 사람의 매매 계약서를 꺼내 보았다. 그 위에 찍힌 지장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 모두 조부의 사노비 출신으로, 금 부인과 조부를 믿고 평소에도 제멋대로 굴곤 했다. 최근에는 조부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 금 부인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그에 목운요는 인정을 베풀어 금 부인에게 돌려보내려 했었다. 그런데 엉뚱한 마음을 품고 채월각에 몸을 의탁할 줄 누가 알았으랴? 두 사람이 채월각에 자신의 기술을 팔아넘겼다는 게 확인되면 가볍게 매듭지을 일이 아니었다.
* * *
연회가 시작되기 약 한 시진 전쯤에 금 부인이 조 부인 등과 함께 하운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금 부인은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환한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그랬죠. 여기만큼 쉬기에 좋은 곳이 없다고요. 운요 좀 보세요, 어찌나 한가한지 부러워 죽겠답니다.”
의자에 반쯤 기대 있던 목운요는 어떤 무늬와 장식을 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그러다가 금 부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퍼뜩 정신을 차리곤 재빨리 일어나 환한 미소로 네 부인에게 절을 올렸다.
“부인들을 뵙습니다. 방금 전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조 부인, 진 부인, 오 부인 모두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신수가 훤했다. 목운요를 대하는 그녀들의 말투에선 호감과 친근함이 느껴졌다.
“우리 사이에 절은 무슨. 그나저나 정말 멋지게 잘 꾸며 놨구나.”
일 층에는 잉어가 노니는 연꽃 화분이며, 소담스러운 꽃장식이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목운요는 금란와 금교에게 서둘러 차를 내오도록 했다.
“오늘 날씨가 무척 더워, 연회장에 가기 전에 옷매무새와 화장을 정돈하러 들렀다. 마침 여기에서 망강루까지 그리 멀지 않으니 시간이 되면 같이 가면 될 것 같구나.”
“연회가 열릴 때까지 한 시진 정도 남은 것 같은데 마침 모두들 잘 찾아 주셨습니다.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머리 장식을 몇 개 만들어 봤는데, 괜찮으시면 한번 봐주시겠어요?”
그러자 조 부인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직 시간이 여유로우니 네 솜씨나 구경해 보자꾸나.”
머리 장식은 하나같이 꽃을 주제로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형형색색, 다양한 크기의 보석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우리를 위해 이걸 준비했다는 것이냐?”
진 부인이 머리 장식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른 부인들은 머리 장식을 서로에게 꽂아 주며, 거울 앞에 서서 연신 그 모양새를 살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보면 볼수록 흡족한 기분이었다.
목운요의 탁월한 감각을 한바탕 칭찬하고 나자, 어느새 연회 시간이 다가왔다. 금 부인이 이제 가야 할 것 같다며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으나, 목운요는 살며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전 갈아입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참, 요새 햇살이 무척 강한 듯하여 혹시나 해서 부채를 준비해 봤습니다.”
언제 내왔는지도 모를 부채를 목운요가 부인들 앞에 가지런히 펼쳤다. 옥처럼 투명한 벽록색(碧綠色)의 부채 손잡이를 쥐자,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부채 면에는 하운 미인책 속 미인도가 채우고 있었다.
목운요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부인들의 명성을 빌려 하운방을 알리려고 잔머리를 굴렸네요.”
그 모습에 부인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잔머리라고 하지만, 목운요의 천진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돕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게다가 그녀들 역시 부채가 마음에 들었다. 부채 속 미인도가 바로 자신들이었기 때문이다.
* * *
삼층으로 지어진 망강루에서 순무 부인은 한 층만 빌려 연회를 마련했다. 사치스럽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목운요는 금 부인 등을 따라 삼 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자리는 여전히 맨 끝이었지만, 목운요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예전보다 훨씬 뜨거웠다.
이러한 반응 속에서 목운요는 잘난 척하지도, 또 그렇다고 기가 죽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처지에 맞는 담담한 태도로 사람들을 상대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점점 늘어갔다.
그 무렵, 경릉성 나루터에 낯선 배가 나타났다. 냉기가 흐르는 훤칠한 사내가 배에서 내리더니 기다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도착했군.”
사내는 보름 동안 수로를 타고 경릉성에 나타난 월왕이었다.
“하운방으로 간다.”
“예!”
채월각의 담 씨는 신분을 확인받은 후 망강루 계단을 밟고 있었다. 계단을 하나씩 밟을 때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했다.
이번 계획의 성공을 위해 담 씨는 십여 명의 사람을 고용해 밤새 옷을 지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총 일곱 벌의 옷을 보며 담 씨는 무척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목운요에게 기회를 줬지만 스스로 걷어차 버렸으니, 아무리 사정해도 절대로 들어주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자신에게 미운털이 박히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주고 말리라!
* * *
담황색 치마 차림의 순무 부인이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망강루의 주변 경치와 무척 잘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이번 연회는 칠월 칠석을 기념하기 위해 연 것으로,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었다. 그 때문에 연회에 참가한 여러 부인들도 평소보다는 한결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순무 부인의 등장에 사방에서 안부 인사가 쏟아져 나왔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던 중, 금 부인을 발견한 순무 부인의 입에서 자연스레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근래 경릉성 안이 시끄러웠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운 미인방에서 일등에 올랐다고 하던데, 나중에 축하 연회를 열어야겠네요.”
“부끄럽습니다, 부인. 길거리에 떠도는 소문일 뿐이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으시면 됩니다.”
금 부인은 겸손을 표하며 앞으로 나와 절을 올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우아한 몸짓과 가는 허리에 많은 여인들이 속으로 질투심을 피워 올렸다.
“그동안은 그저 풍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직접 보니 그 미인방이 사실이었군요.”
“부끄럽사옵니다, 부인. 조 부인과 진 부인, 오 부인이야말로 진정 하늘이 내린 미인이랍니다. 저야 그저 우연히 덕을 본 것뿐이죠.”
금 부인의 언급으로 순무 부인에게 얼굴을 알릴 기회를 얻자, 세 부인은 금 부인 옆으로 걸어 나와 나란히 절을 올렸다.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갖춘 네 여인의 자태에, 연회에 참가한 수많은 여인들이 찬사와 부러움, 시샘 섞인 시선을 던졌다.
사실 이들 역시 하운방에 가서 옷을 지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주문이 잔뜩 밀려 있어 지을 수 있는 옷은 한정되어 있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입구에서 경탄 섞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알록달록한 색 위에 다양한 꽃무늬가 수놓아진 옷과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된 소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