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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32화 (32/442)

32화 기묘한 인연

* * *

그 시각, 채월각에서는 담 씨가 장부를 연신 뒤적거리며 미간을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어르신, 무슨 일이십니까?”

“그동안 일이 바빠서 장부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는데, 오늘 보니 매출이 크게 늘긴 했다만 저렴한 것들만 주로 팔렸구나. 고가의 옷감으로 옷을 짓겠다고 찾아온 손님이 이리 적어서야…….”

“어르신, 미인책도 내고 미인방도 발표했는데 별 효과가 없다면 하운방이 책자에 있는 옷을 지었던 것처럼 저희도 옷을 지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운방도 그 덕분에 명성을 날렸으니 저희도 그리하면 될 듯한데…….”

“그게 말은 쉽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최고급 화가를 고용해 미인책을 만든 것이다. 보기엔 하나같이 어여쁘지만 그것을 실제 옷으로 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그럼 어찌해야 할깝쇼? 하운방의 솜씨를 따를 자가 없는데…….”

일꾼의 말에 담 씨가 게슴츠레 눈을 치떴다. 그의 말대로 솜씨만 놓고 보자면 하운방에 맞설 사람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반면 하운방에는 목운요한테 솜씨를 익힌 소녀가 무려 열 명이나 있었다. 열세 살 어린 계집이 아무리 손재주가 좋다곤 해도, 아랫사람 단속하는 방법 같은 걸 알 턱이 없다. 돈 앞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자고로 사람은 높은 데를 바라보고, 물은 아래로 흐른다 했지. 더 확실한 쪽을 선택하는 게 아이들한테는 오히려 더 잘된 일 아닌가? 게다가 내가 나쁜 짓을 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옷을 지어 달라는 것뿐인데!”

* * *

목운요가 보름 후에 열릴 연회에서 채월각의 콧대를 눌러 줄 방도를 고민하는 동안, 천 리 밖 서릉에서는 월왕이 보고를 받고 있었다. 냉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이 희미하게 구겨졌다.

“다시 말해 보거라.”

“눈여겨봐 놨던 집을 누군가가 샀다고 합니다.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경릉성의 하운방이라는 자수방입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자수방이라면 당연히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만, 자수방에 걸린 편액이 주인님의 필체였습니다.”

시위 우항이 조심스레 상황을 보고했다.

“내 필체?”

월왕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우항의 이야기를 듣자니 왠지 호기심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필체는 좀처럼 흉내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알아봤느냐?”

그 물음에 시위 우항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확실히 조사했습니다. 다만…….”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부하의 모습에 월왕의 호기심은 점점 커져 갔다.

“말해라.”

“예전에 하언촌에서 주인님의 비수를 훔친 그 소저였습니다.”

세상이 이렇게도 좁은 곳이었던가?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우항은 목운요가 누군가가 보낸 첩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데 오랜 조사를 통해 모든 것이 순전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목운요?”

월왕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매만졌다. 하얀 목덜미가 한 손에 들어오던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고개를 들자,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우항의 모습이 보였다. 월왕이 미간을 좀 더 구긴 채로 무슨 일이 또 남았느냐고 물었다.

“성상의 탄신 연회 때 소씨 가문에서 올린 병풍 때문에 성상께서 크게 역정을 내시며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소씨 가문의 기세가 꺾이자, 주변에서 그 틈을 노려 기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건 알고 있다.”

소씨 가문의 콧대를 꺾는 데 자신 역시 힘을 보탰었다.

“그게 목운요와 상관이 있는 건가?”

“소씨 가문에서 오랫동안 조사했지만 병풍에 누가, 언제 수작을 부린 것인지 끝끝내 알아내지 못해, 춘수방에 모든 책임을 돌려서 간신히 화를 피했다고 합니다. 한데 소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병풍에 수를 놓은 이가…… 바로 목 소저라고 합니다.”

우항은 세상에 이런 별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것 하나 우연이 아닌 게 없었다, 그것도 기가 막힐 정도로…….

손가락을 매만지던 월왕이 순간 멈칫했다.

“소씨 가문에서도 목운요를 알아냈느냐?”

“알아내긴 했으나, 그들이 하언촌에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목 소저가 종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춘수방 총관의 말에 따르면, 목 소저가 수놓은 병풍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재미있군…….”

월왕은 절벽 위에 우뚝 선 소나무처럼 쭉 뻗은 몸을 일으켰다.

“내일 수로를 이용해서 월서로 돌아간다.”

말을 마친 월왕은 우항에게 물러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 * *

이튿날, 월왕은 팔뚝에 붕대를 감싼 채 입궁하여 주청을 올렸다. 어제 검술 수련 중에 실수로 다쳤으며, 월서에서 상처를 치료한 뒤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월왕은 단 한 번도 성상의 총애를 받은 적이 없던 탓에, 주청을 제대로 올리기도 전에 성상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표했다.

강남으로 가는 배 안에서 우항은 속으로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남서쪽에 자리 잡은 월서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물길이 좁은 데다 물살도 거센 편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지녔다고 해도 강물을 거슬러 월서로 간다는 건 쉽지 않았다. 수로를 택한다면 목숨을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천만했다.

그런데 어째서 배를 타고 가겠다는 것인지. 게다가 오랫동안 부상을 입으신 적 없는 주인님이 부주의로 다쳤다는 사실까지 영 수상했다.

* * *

보름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 칠월 칠석 연회 당일이 찾아왔다.

소청은 옥환(玉環, 옥으로 만든 가락지)이 달린 오색실을 들고 와선 목운요의 목에 걸어 주었다. 칠월 칠석에는 오색실을 매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목운요가 태어난 지 한 달 되던 때부터 목에 걸어 줬던 붉은 끈이 사라진 걸 발견했다. 놀라서 물었지만 아이는 단순히 잃어버렸다며 화제를 돌릴 뿐이었다.

이내 목운요가 배시시 웃으며 오색실을 옷 안에 재빨리 감춘 뒤, 소청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렸다.

칠월 칠석을 기념하는 연회는 이른 저녁에 시작해서 늦은 밤까지 열린다. 망강루 옆에 자리 잡은 덕분에 하운방 양쪽 길에 칠월 칠석을 맞이하는 오색등과 깃발이 달렸다. 모두가 왁자지껄한 가운데 하운방에만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가게를 둘러보던 목운요는 서쪽 벽이 빈 것을 확인하고는 금란에게 붓과 먹을 가져오라고 했다.

“오늘이 마침 칠월 칠석이니 우리도 분위기 좀 띄워 볼까요?”

목운요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붓을 들고 일필휘지로 글귀를 써 내려갔다.

“바람은 신선이 타는 마차에 돌아오고 구름이 피어나니, 깊은 밤 달 떨어지고 은하수 돌고 도네. 꿈속에서 본 혼령에 놀라 깨어나니, 새벽 처마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로구나. 서툰 만남이었으나 오래도록 같은 하늘 아래 있기 어렵구나. 평생 속세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았으나, 속세의 삶 또한 흐르는 세월과 같구나.”

금교가 글귀를 소리 내서 따라 읽었다. 다 읽은 후에야 자세히 보니 아무리 봐도 칠월 칠석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반면에 거침없이 붓을 휘두른 목운요는 꽤나 마음에 든 듯했다. 뒤돌아보자 금란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목운요는 웃음을 터뜨리며 잘 못 쓴 것 같으냐고 물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고, 그저 소저의 글은 여인이 쓴 것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기백이 넘쳐흘러서…….”

금란이 미묘한 표정을 짓는 이유를 목운요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유난히 좋아 슬쩍 골려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글을 못 쓴 것이 아니라면 시를 잘못 고른 걸까요?”

“그것도 아니에요. 하루가 일 년 같다는 그리움을 드러낸 시가 무척 멋진걸요. 다만 애달픈 사랑의 마음을 그런 필체로 써 내려가니 뭔가 어색한 것 같아서…….”

금란이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칠월 칠석을 노래한 유려한 시구이건만, 차갑다 못해 살기가 도는 필체로 적으니 아무리 봐도 어색했다!

“후후후, 전 마음에 드는걸요. 조금 있다가 벽에도 걸어야겠어요. 자주 들여다보면 그 속에 숨은 의미를 여러분이 발견할지도 모르겠네요.”

견우와 직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서 비롯된 칠월 칠석에는, 연인은 물론 가족 모두의 안녕과 화목을 기원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희생될 운명을 각오해야 한다는 서슬 퍼런 살기 같은 건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이내 목운요는 이 층으로 올라가면서 금란과 금교 자매를 불렀다.

“금란, 금교. 소녀들 중에서 두 사람의 솜씨가 가장 뛰어나죠. 눈치도 가장 빠르고요. 그동안 꽤 많은 것을 보고 깨달았을 것 같아요.”

금란과 금교는 쌍둥이 자매였다. 같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지만 외모와 성격은 달랐다. 차분한 성격의 금란은 꼼꼼한 일 처리 솜씨를 지녔고, 금교는 좀 더 활발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목운요의 갑작스러운 말에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불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목운요는 차를 한 입 마신 뒤, 두 사람이 자신의 물음에 답하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금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저, 무슨 질문이 하고 싶으신 건가요? 아는 대로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내 질문에 대답해 봐요. 그동안 두 사람이 뭘 봤는지 말이에요.”

“저와 금교는 노예 상인에게 팔렸다가 운 좋게 금 부인의 눈에 띄어 험한 꼴을 면할 수 있게 되었지요. 게다가 소저로부터 수놓는 법을 배워 스스로 먹고살 수 있는 힘을 얻었답니다. 그 점에 대해서 금 부인과 소저의 은혜를 감지덕지 여기고 있습니다.”

금란은 목운요의 질문을 교묘하게 비켜 갔다. 그 신중한 태도가 목운요는 꽤 마음에 들었다.

“여러분한테는 선택의 기회가 있어요. 하나는 금 부인을 따르는 것. 금 부인께서는 관대한 분이니 앞으로도 잘 대해 주실 거예요. 나머지 하나는 나를 따라 하운방을 운영하는 거예요. 그리고 좀 더 정교한 기술도 가르쳐 줄 거예요. 자, 여러분은 뭘 선택할 건가요?”

눈을 휘둥그레 치켜뜬 금란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뒤에 있던 금교가 금란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언니?”

잠시 고민하던 금란이 금교의 손을 덥석 끌어당기더니 목운요를 향해 무릎을 꿇고는 절을 올렸다.

“저희 두 자매, 아가씨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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