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은밀한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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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계획을 위해 목운요는 가장 먼저 조부를 찾았다.
얼굴 가득 윤기가 흐르는 금 부인이 자신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왔다. 그러곤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귀한 손님이 오는 것도 몰랐다면서, 시녀에게 서둘러 다과상을 내오라고 분부했다.
“부인께서 이리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목운요는 여유롭게 인사를 올린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좋은 일이 생기면 화색이 돈다고 하던데, 오늘 부인의 모습을 뵈니 좋은 일이 무척 많이 있었나 봅니다.”
“후후, 그게 다 소저 덕이랍니다. 연회에서 절을 올렸다가 나비가 날아온 일이 황상께 전해지면서, 상을 하사하신다는 교지가 내려왔답니다.”
“절이야 부인께서 올리신 것이니 소인과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그보다 이제 지주가 아니라 염운사(鹽運史)라고 불러 드려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오품(正五品)인 지주에서 정사품(正四品)인 염운사로 승진한 것을 두고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작은 차이가 누군가에게는 삶의 의미가 되기도 했다.
금 부인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점점 눈부시게 빛났다. 그저 아름다운 옷이 마음에 들어 목운요라는 아이와 인연을 맺었는데, 옷 한 벌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요 며칠 소저에게 옷을 지어 달라는 사람들이 계속 찾아왔었는데, 집 문턱이 닳지 않았는가 모르겠군요.”
그 말에 목운요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부인의 말씀대로랍니다. 근래 옷을 지어 달라는 사람이 부쩍 늘었어요. 처음에는 기뻤는데 나중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져서 부인께 인사드리러 올 시간도 없었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답니다. 소저의 일이 가장 우선이지요. 그보단 일 때문에 건강을 해치진 않을까 걱정이네요.”
금 부인의 태도에선 목운요에 대한 진심 어린 걱정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그러고 보니 금 부인은 어머니 소청보다 몇 살 더 위였지만, 아직까지 후사(後嗣)가 없었다.
“사실 오늘은 부인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난처한 표정을 짓는 목운요를 빤히 보던 금 부인이 시원스레 말했다.
“말해 봐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할 테니.”
“그리 대단한 문제는 아니고, 부인께서 보내 주신 소녀들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목운요의 말에 금 부인이 뒤돌아 시녀 은홍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나도 소저와 할 이야기가 있네요. 바로 그 소녀들에 대해서 말이죠.”
금 부인의 눈짓에 은홍이 재빨리 나무 상자를 하나 꺼냈다. 금 부인은 그걸 건네주며 직접 열어 보라고 했다.
호기심 어린 손길로 상자를 살며시 열자, 안에는 붉은 지장이 찍힌 종이 열 장이 차분히 놓여 있었다.
“부인, 설마 이건…….”
“맞아요. 소녀들의 매매 계약서랍니다. 열 명 중 여섯 명은 조부의 사노비(私奴婢) 출신이고, 나머지 네 명은 밖에서 구했죠. 평생 부릴 수 있다는 매매 계약서인데, 이걸 소저한테 넘겨줄까 해요.”
“부인, 전 그저 아이들을 며칠만 빌려 달라는 것이었을 뿐, 매매 계약서를 달라는 것이 아니었는걸요.”
“알아요. 이건 그저 내가 주는 답례랍니다. 소저가 그 아이들의 스승이지만, 이것을 지니고 있어야 아이들을 믿고 부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부인…….”
목운요가 거절하려는 듯하자, 금 부인은 일부러 정색한 채 입을 열었다.
“내게 미안해서 거절하려는 것이라면, 날 위해 근사한 옷을 몇 벌 더 지어 주세요.”
이에 목운요는 입술을 슬쩍 깨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금 부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염치없지만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암요, 그래야죠. 자, 이리 앉아서 이것 좀 먹어 봐요. 새로 온 요리사가 만든 것인데, 솜씨가 제법이랍니다.”
금 부인이 환히 웃으며 간식이 올려진 접시를 목운요 쪽으로 밀었다.
정성스레 만든 간식을 집어 든 목운요는 한입 베어 물더니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 모습에 금 부인은 입맛에 맞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은 아닌데, 조금 쓴 것 같아서요.”
“쓰다고요?”
금 부인이 하나를 집어 조심스레 맛을 봤다. 하지만 부드럽고 향긋한 단내만 입에 맴돌 뿐, 쓴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난 전혀 모르겠는데요?”
“아마도 제 입맛에만 쓰나 보네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그보다, 정말 좋은 차로군요. 경릉산 서남쪽에 있는 요천(醪泉)의 샘물로 끓여 우린 것이죠?”
“그, 그걸 어찌 알았나요?”
“지난번 찻집에서 부인께서 권해 주신 차를 마셨을 때 차향이 무척 특이해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맛이 나는걸요. 찻집에선 요천의 물을 쓴다고 들었어요.”
목운요의 이야기에 금 부인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순무 부인을 통해서 요천의 물맛이 무척 좋다는 이야기를 듣곤 오늘 처음 그걸로 차를 끓였는데, 이를 목운요가 단번에 알아맞혔으니 생각할수록 신통한 노릇이었다.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고 목운요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녀 은홍이 배웅을 해 주었다.
“조심히 가렴.”
“감사해요, 은홍 언니. 그보다 한동안 부인을 각별히 보살펴 주세요. 단것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거든요.”
그 말에 은홍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금 부인을 보필하는 것이야 원래 자신의 본분이니 당연히 소홀할 리 없다. 한데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은홍이 본 목운요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이가 오늘따라 왜 그런 말을 할 것일까?
은홍이 배웅을 끝내고 방에 돌아와서도 계속 생각에 잠겨 있자, 금 부인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네, 네. 부인.”
“무슨 일이 있느냐?”
“그게, 목 소저가 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그 아이가 무슨 말을 했기에?”
“난데없이 제게 부인을 잘 돌봐 달라고 하면서 단것을 많이 먹으면 안 좋다고 했습니다.”
그에 표정이 싸늘히 굳은 금 부인이 탁자 위에 올려진 간식을 쳐다보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가서 진(陳) 의원을 불러오너라. 아니, 진 의원을 부르지 말고, 여기 있는 간식을 가지고 가서 의관(醫館)에게 보여 주거라. 간식 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들어 있지는 않은지 물어보고.”
“부인, 간식에 안 좋은 거라도 들어 있다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 그러니 네가 가서 알아봐다오.”
금 부인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목운요가 어리다곤 하지만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성격은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 끓인 찻물의 출처까지 알아낼 정도이니, 간식에 쓴맛이 난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은홍에게 각별히 당부의 말도 전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간식에 문제가 있다는 걸 넌지시 알려 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며칠 전, 요리사가 병이 나서 친정에서 새로운 요리사를 보내 주었는데, 간식에 정말 문제가 있는 거라면…….
초조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한 시진 남짓 기다리자,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홍의 모습이 보였다. 금 부인을 발견한 은홍이 털썩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인, 부인……. 가, 간식…… 그 간식에…….”
꽉 쥔 금 부인의 손끝이 새하얗게 떨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더냐? 어서 말해 보거라.”
“여러 의관을 찾아가서 물어봐도 아무도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의원에게 거금을 주고 나서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의원이 말하길, 간식 안에 들어 있는 건 천층초(千層草) 성분이라 했습니다. 천층초는 성질이 차서 장기간에 걸쳐 복용할 경우…….”
“어떻게 된다는 거냐. 얼른 말해 보거라!”
“자궁이 차가워져 여인이라면 쉽게 아이를 가질 수 없다 합니다.”
말을 마친 은홍이 바닥에 엎드리더니, 겁에 질린 듯 고개도 들지 못했다.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금 부인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아무한테도 발설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예, 부인.”
천층초, 천층초…….
눈을 감은 금 부인은 소태라고 씹은 듯 입 안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후사를 보지 못한 것이 그녀에게는 살아오면서 느낀 가장 큰 아쉬움이자 좌절감이었다.
조운년이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무척 아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나 아이라는 것이 어디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이던가? 그저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곤, 조운년에게 첩을 들일 것을 자신이 먼저 권했다. 그리고 정실임에도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자신을 낮춘 채 첩실들을 품어 주었다.
한데 누군가가 뒤에서 부린 수작 때문에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이었다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금 부인은 눈을 홉떴다. 서릿발보다도 차가운 한기가 그녀의 눈동자를 스쳤다. 분한 마음에 꽉 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다 못해 피까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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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집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소녀들의 매매 계약서가 든 상자를 소청에게 잘 보관해 달라고 당부했다.
소녀들에게는 매매 계약서가 자신의 손에 있다는 걸 알려 주지 않았다.
지금이야 자신에게 자수를 배우고 있으니 잘 따르고 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디 그리 단순하던가? 무엇이든 여지를 남겨 두는 편이 좋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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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이 채 되지 않아 은홍이 목운요를 찾아와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평소와 달리 공손한 태도에 소녀들은 무척 당황했다.
“소저, 부인께서 조부에 들러 달라고 하셨습니다.”
목운요가 눈을 살짝 감았다 뜨자, 기다란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당연히 따라가야지요.”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준비하시는 대로 나와 주십시오.”
긴장한 은홍의 표정에 목운요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소청에게 조부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옷을 갈아입고 마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