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25화 (25/442)

25화 사라진 눈썹

그때 목운요 앞에 몇몇 시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 소저?”

“네?”

“금 부인에게 드렸다던 장미 면약을 우리 부인께서 사고 싶다 하시는데, 한 병에 얼마야?”

“장미 면약은 손이 많이 가서 소량밖에 만들지 못해, 팔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요. 죄송합니다.”

그 말에 시녀들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수심에 잠긴 목운요의 모습에 금 부인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아, 부인. 몇몇 시녀 언니들이 장미 면약을 사고 싶다고 하셨는데, 거절해서 기분이 상한 건 아닌지 해서…….”

난처한 표정의 아이를 보며 금 부인은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하는 짓이 워낙 총명해 보통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애는 애인가 보다.

“너무 신경 쓸 것 없어요.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데는 내 탓도 있네요. 누가 묻길래 소저의 면약을 쓰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빨리 이야기가 퍼질 줄이야.”

“그랬군요. 장미 면약은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 아! 소녀 운요,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부인께서 꼭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응?”

“장미 면약을 만드는 제조법을 부인께 드리고 싶어요!”

금 부인은 오묘한 눈빛으로 아이를 쳐다봤다.

“서보헌에서 가장 비싼 면약은 한 병에 금 열 냥이에요. 소저의 장미 면약은 그 효능이 서보헌의 것에 뒤지지 않더군요. 면약의 제조법을 가지고 있으면 돈방석에 오를 수 있을 텐데, 어찌 내게 준다는 건가요?”

“부인께서 줄곧 소녀를 돌봐 주셨으니까요. 부인에 대한 답례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간절한 아이의 모습에 금 부인의 눈빛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좋아요. 대신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날 찾아와요. 경릉성에서는 내 말이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장미 면약의 제조법을 금 부인의 약조 한마디와 바꿨으니, 목운요로서는 그야말로 수지맞은 셈이었다.

* * *

금 부인은 목운요가 써 준 제조법대로 면약을 지어 지인들에게 보냈다. 면약의 효과를 본 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장미 면약을 바르고 다니자, 귀부인들이 모였다 하면 가장 먼저 장미 향이 풍기곤 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저잣거리의 여인들은 장미 향이 유행인 줄 알고 앞다투어 향낭(香囊, 향을 넣어 몸에 차는 주머니)을 달고 다니기 시작했다. 길거리 곳곳에 은은한 꽃향기가 퍼지자, 풍류 좀 안다는 강남의 자제들은 부채를 흔들며 시까지 지었다.

훗날 장미 면약이 천하제일향이라는 명성을 얻으면서, 금 부인이 운영하는 점포는 널리 퍼져 나갔다.

* * *

목운요가 의뢰받은 마지막 옷을 지은 뒤 허리를 폈다.

“어머니, 지금까지 모아 둔 은자가 얼마나 되나요?”

“거의 이만 냥은 될 거다.”

“헤헤,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네요.”

“응? 시간이라니?”

“큰돈을 벌 시간이요!”

소청이 입을 열려는 순간, 소녀 한 명이 잽싸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소저, 채월각 주인이라는 자가 찾아와서 뵙고 싶다고 합니다.”

그 말에 목운요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채월각 주인이 보기보다는 성미가 급한 모양이었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안으로 모셔 차를 대접해 주세요.”

옷을 갈아입은 목운요가 나타났을 무렵, 채월각 주인은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목운요를 발견한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소저, 내가 누군지 알겠나?”

“당연히 알고말고요. 이전에 금 부인과 함께 뵙지 않았습니까.”

목운요는 속내가 뻔히 보이는 채월각 주인의 말을 흘려들으며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채월각의 주인은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원래 좀 더 일찍 소저를 다시 만나 보고 싶었는데, 요새 이런저런 일이 하도 많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제야 오게 되었네. 춘수방에 무슨 변고라도 생겼는지 가게 문을 열지 못한다고 하더군. 뭐든 도와야지 않겠나.”

채월각보다 한 수 위라고 불렸던 춘수방이 순식간에 주저앉을 줄 누가 알았으랴? 듣자 하니 총관 한 씨는 유배까지 갔다는 이야기가 자자했다.

“어르신께서는 맘도 넓으시네요.”

목운요가 딴청을 부리니, 채월각 주인은 내심 짜증이 왈칵 치솟았다.

춘수방이라는 경쟁자가 간신히 사라진 마당에, 한낱 어린 계집이 제 상에 숟가락을 얹었으니 당연히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지금 싹을 뽑아 버리지 않는다면 훗날 자신을 골치 아프게 만들지도 몰랐다.

“목 소저, 사실 오늘 여기 온 건 한 가지 제의를 하기 위해서야. 우리 채월각과 함께 일해 보지 않겠나?”

“함께 말인가요? 저 같은 게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겸손이 지나친 것 같군. 소저의 솜씨에 대해선 금 부인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네. 다만 혼자서 옷을 짓는 탓에, 옷 한 벌에도 열흘에서 보름 정도 걸린다고 하던데……. 품이 많이 드는 옷을 지어야 한다면 시간이 더 걸리겠지.”

이쪽 형편을 꽤나 생각해 주는 척하는 상대의 모습에 목운요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역시 경험이 많으셔서 그런지 정확히 알아보시네요.”

그녀가 속내를 드러내지 않자, 채월각 주인은 기분이 상했다. 그저 손재주나 있는 줄 알았더니 그 속내 또한 음흉했다.

“소저, 좋은 마음으로 함께하자고 찾아온 것이니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돼.”

“흠. 손을 잡자고 하셨는데,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신가요?”

“채월각에서 소저의 솜씨를 돈을 주고 사고 싶네.”

채월각의 주인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 두 개를 슬며시 내밀었다.

“가격은 이 정도면 되겠나?”

“이만 냥이요?”

“지금처럼 혼자 옷을 짓는다면 언제 이만 냥을 벌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명심하게나.”

“하지만 지금 집에는 저와 어머니만 있는지라 돈이 충분해요. 돈이라는 건 오히려 많을수록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도 어르신의 제의는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 말인즉, 내 제의를 거절하겠다는 건가?”

“예.”

“흥, 형편이 힘든 것 같아 도와주려 했더니, 그깟 재주 하나 믿고 채월각에 맞서겠다는 것이냐? 춘수방도 무너뜨렸는데 하물며 너 같은 어린 계집쯤이야!”

채월각 주인은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옷자락이 펄럭거릴 정도였다.

이익 때문에 협력을 제의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그녀를 얕잡아 보고 있는 그였다. 비빌 언덕도 없는 어린 계집 따위,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에도 목운요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육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채월각 주인 어르신께서 가신다 하니 잘 배웅해 드리거라.”

“흥,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지나 말거라!”

“어르신, 후회라는 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

“네, 네 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채월각 주인이 목운요에게 욕설을 퍼부으려던 순간, 눈앞에 휙 하고 한기가 스쳤다.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자, 장검을 쥔 육냥의 모습이 보였다.

“아, 앞으로 다시는 내게 도와 달라고 사정할 생각 따윈 마라!”

채월각 주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돌아서서 후다닥 달려 나갔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목운요는 웃음을 터뜨렸다.

“육냥, 이번 달 월급 두 배- 아니, 세 배로 쳐주마!”

하지만 육냥은 묵묵히 장검을 거두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문가를 지키고 설 뿐이었다.

그에 목운요가 간신히 웃음을 그치는 사이, 소청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달려왔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춘수방 말이다. 듣자 하니 역모죄를 지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고 하던데…….”

“역모죄라, 어마어마하네요.”

역시 소씨 가문다운 일 처리라는 생각에 목운요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요아야,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네가 아직 모르나 보구나. 춘수방이 풍비박산 난 건 황상의 탄신일에 올린 선물 때문이라고 들었다. 듣자 하니 그 선물이라는 게 병풍…….”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난 소청을 목운요가 부축하여 자리에 앉혔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어머니. 이 나라의 법도는 엄격하여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무슨 일이 생길 리 없어요. 게다가 저는 그저 수만 놓았을 뿐인걸요. 그걸 서릉으로 옮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데요. 어디서든 문제가 생길 수 있죠.”

“만일 누군가가 모함이라도 하면…….”

“에이, 역모죄를 들먹이며 모함할 만큼 제가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닌걸요.”

목운요는 훗날 이 일이 밝혀졌을 때의 상황을 모두 대비해 두었다. 최악의 경우 자신이 도망칠 구멍을 미리 마련해 둔 것이다.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어머니는 걱정하실 것 없어요. 이미 다 손써 놨으니까요.”

소씨 가문의 가주(家主)인 소문원은 처세술에 뛰어났다. 하지만 관직에 오랫동안 있다 보니 정적의 수가 적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춘수방이라는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가 뚝 하고 떨어졌으니, 많은 이들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것이다. 소씨 가문으로선 자신에겐 신경 쓸 겨를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소청을 안심시킨 후, 목운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동풍(東風)만 불면 되겠구나.”

* * *

한편, 채월각 주인은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뻗쳤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늘어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를 가리키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입을 가린 채 웃음을 참는 사람도 있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사내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걸었다.

“크하핫, 채월각 어르신! 눈썹이 어찌 그러십니까?”

눈썹이라는 말에 채월각 주인은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 같았다. 화가 나면 눈썹이 뻗치는 체질이라, 항상 신경 써서 관리하곤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의 눈썹을 들먹이자 퍽 마뜩잖았다.

“내 눈썹이 뭐 어떻다는 건가?”

“어르신,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왼쪽 눈썹이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뭐라고? 뭐가 없어졌다고?”

“눈썹 말입니다, 눈썹!”

허겁지겁 만져 보니 매끈한 눈썹 뼈가 만져졌다. 문득 목운요의 집에서 눈앞이 서늘해졌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저 검날이 눈썹을 스쳤을 뿐이라고 생각했지, 제 눈썹이 깎였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건방진 것,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채월각 주인은 옷소매로 얼굴을 가린 뒤 허겁지겁 채월각으로 돌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