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22화 (22/442)

22화 피로 물든 병풍

“소첩이 운이 좋았습니다. 손재주가 뛰어난 소저를 우연히 만났는데, 부인께서 관심 있으시다면 제가 그 아이를 불러 옷을 지으라 하겠습니다.”

“후후, 그럼 나야 좋지요.”

게다가 금 부인이 걸친 옷은 드러나는 곡선이 미묘하게 달랐다. 다른 부인들의 옷은 허리와 소매 부분이 붕 떠 있는 것과 달리, 금 부인이 걸친 옷은 그녀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줬다.

허리는 가늘어 보였으며 가슴의 굴곡은 더욱 두드러졌다. 성숙하면서도 우아한 기품을 지닌 모습이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사람들 뒤로 숨어든 진 부인은 차마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녀는 채월각에서 보내온 새 옷을 입은 상태였다. 서릉에서 유행하는 의복으로 화려한 색상과 모란꽃 문양이 눈에 띄는 것이었는데, 금 부인의 옷을 어설프게 흉내 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진 부인에겐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반면, 금 부인에게는 사람들이 죄다 몰려가서 어디서 난 옷이냐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연회가 시작되자, 순무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황상(皇上)에 대한 존경의 뜻과 축복을 전하고자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모두 절을 올리고 고개를 들자, 어딘가에서 밀려든 한 줄기 바람에 금 부인의 치맛자락이 흩날리면서 은은한 향기가 퍼져 나갔다.

그 향기를 찾아온 것일까? 고운 나비 한 마리가 금 부인의 주변을 날아다니더니 모란꽃 꽃술 위에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도 같았다.

“세상에, 저게 뭐야?”

“황상을 위하는 금 부인의 진심에 하늘도 감동한 게 아닐까요? 그 마음이 기특해 나비를 보내신 것 같아요.”

자그마한 소동이 빚어낸 기분 좋은 소란이 사내들의 귀에까지 흘러들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순무가 조운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봐도 호의적인 태도가 분명했다.

조운년을 바라보는 다른 사내들의 눈빛은 말할 수 없는 부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제 마누라한테는 저런 복도 없단 말인가? 모두 똑같이 황상을 향해 감사의 절을 올렸는데, 왜 한 사람한테만 나비가 날아들었단 말인가?

이 이야기가 서릉까지 전해지면 황상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되면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렷다!

* * *

연회가 끝난 후, 조운년은 금 부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자신의 옷을 뚫어지게 보는 낭군의 눈빛에 금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들뜨는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힌 조운년은 오늘 있었던 일을 자세히 물었다.

“이 옷은 어린 소저에게 부탁해 지은 것인데, 옷을 입기 하루 전에 꽃잎을 보내더니 그걸 태워 옷에 향기를 씌워 달라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나비가 날아들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부인. 오늘 부인 덕분에 크게 체면을 세웠답니다.”

연회에서 살갑게 자신을 대하던 순무를 떠올리며 조운연이 크게 기뻐했다.

한편 그에 못지않게 기쁜 웃음을 터뜨린 곳이 하나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소씨 가문이었다.

금수산하도로 만든 병풍이 황궁에 세워지던 날, 많은 사람들이 정교하면서도 기품 넘치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황제조차 보좌에 앉아 한동안 병풍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때마침 아침 해가 떠오르자, 금수산하도 뒷면에 수놓아진 용과 구름이 상서로운 구름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황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문무백관이 볼 수 있도록 병풍을 대전(大殿)에 두라는 명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병풍을 올린 소씨 가문에게 직접 하사품을 내리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황상의 복이옵니다. 천하가 태평하여 장인(匠人)들 또한 명맥이 끊긴 비침화수법을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황상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만천하가 감격하고 있나이다.”

“만세, 만세, 만만세!”

“후후, 이런 날에 경들과 축배를 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구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황제가 하사한 술을 마시며 대신들은 병풍 앞으로 몰려가 홀린 듯이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그러다 몇몇 대신이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시선을 돌린 황제의 미간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병풍 위에 수놓아져 있던 붉은 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핏줄기처럼 선명한 붉은 자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피로 물든 강산이라니…….”

병풍 뒷면을 날아다니던 금빛 용의 몸뚱이가 한 줄기 핏자국에 두 동강이 났다.

놀란 대신들이 술잔을 떨어뜨리며 무릎을 꿇은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소문원(蘇文遠)의 낯빛도 허옇게 질렸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문제의 병풍을 불태우고 싶었다.

“황상, 어찌 된 것인지 소신도 알지 못하옵나이다. 소신에게 삼 일의 말미를 주시면 반드시 진상을 밝혀내겠나이다.”

“소 대인이 병풍을 보내 놓고도 자세히 알지 못하다니? 설마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걸 짐에게 올렸단 말이오?”

“아, 아니옵니다. 그저 이 병풍은 소신이 직접 거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수작을 부렸을지도…….”

“소 대인, 황상께 선물을 올리기 전에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하지 않았단 말씀입니까?!”

소문원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무릎을 꿇은 그는 황제의 노기에 눌려 차마 고개도 들지 못했다.

한참 뒤,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이 일은 소 대인이 알아봐 주시오. 선물을 빙자해 조정에 저주를 내린 자를 찾아 그 죄를 물을 것이니, 그 어떤 사정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대인께서도 명심하시구려.”

“예, 예! 소신이 이 일을 명명백백히 밝혀내겠나이다!”

* * *

집의 수리가 얼추 마무리되었다. 목운요는 길일을 골라 소청과 함께 새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사이 많은 부인이 금 부인을 찾아와 목운요에 관해 묻자, 금 부인은 몇몇 이름만 정리해 목운요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에 목운요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아침 일찍 조부를 찾았다.

“벽라춘이랍니다. 어서 마셔 봐요.”

요 며칠 조운년이 침소에 든 터라, 금 부인은 꽤나 흡족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찾아온 목운요가 당연히 더욱 반가웠다.

“운요, 부인을 뵙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부인께 감사 인사를 올리려 찾아왔습니다.”

“으음? 내게?”

목운요는 금 부인이 정리해 준 명단을 꺼내 들었다.

“부인께서 절 지켜 주시니 당연히 감사를 올려야죠.”

명단에 적힌 이름은 여섯 개에 불과했다. 금 부인을 찾아온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많았지만 금 부인이 믿을 만한 몇 명만 추려던 것이다.

금 부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현명한 사람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거운 법이었다.

“내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필요해서 그리하는 것이니.”

금 부인은 앞으로 목운요에게 옷을 지어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호감을 얻어 두는 게 좋았다.

“소녀, 부끄럽지만 부인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해 봐요.”

“제가 지은 옷은 모두 한 땀, 한 땀 손으로 지은 것이라 품이 많이 듭니다. 저 혼자서 하려니 시일을 맞추기 어려워서……. 해서, 부인의 휘하에 손재주 있고 영리한 소저들이 있는지요?”

그 말에 금 부인의 눈에 당혹감이 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손재주 있고 영리한 사람? 설마…….”

“예, 부인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제 기술을 여러 사람에게 전수해 주고 싶습니다. 그리하면 많은 옷을 지을 수 있을 테고, 저로서도 생계가 마련되는 셈이니까요.”

그 순간, 현명한 금 부인조차 어린 소저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었다.

“정녕 그 기술을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내려놓아야 손에 쥘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자수라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서, 누군가가 제가 지은 옷을 사서 자세히 연구하면 비결을 알아낼 수도 있지요. 그리되면 제가 지은 옷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그럴 바에야 몇몇 사람에게 전수해 주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좋아요. 소저가 날 그리 믿어 주니 쓸 만한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부인.”

조부를 나서는 목운요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자신에 대한 호감으로 친분을 유지할 수 있을진 몰라도, 그 끝이 어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이가 이익으로 얽혀진다면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금 부인에게 사람을 구해 달라고 한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목운요가 나오자 문 앞에 서 있던 육냥이 성큼성큼 뒤따라왔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그는 입 한번 열지 않았다.

“육냥, 스무 살 정도인 것 같은데 정확히 몇 살이야? 그리고 왜 노예로 팔려 간 거야? 검법도 할 줄 알고, 무공도 뛰어나잖아. 혼례는 올렸어? 혼례를 올리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없어. 내가 매달 돈을 줄 테니까 몇 년 착실히 모으면 혼례를 올릴 수 있을 거야.”

육냥은 조잘거리는 목운요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다 지나는 길에 갑자기 멈춰 서더니 사탕 꼬치를 사서 건네는 게 아닌가?

목운요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제 앞에 건네진 사탕 꼬치를 멍하니 쳐다봤다.

회귀 전 자신을 바라보던 육냥의 서늘한 눈빛을 목운요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심심할 때마다 육냥한테 잔소리 공격을 퍼부어 난처한 표정을 구경하곤 했다.

한데 피도 눈물도 없는 검객이 이렇게 반격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사탕 꼬치라니, 누굴 애로 아나?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는 목운요의 모습에 육냥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왜 자신이 사탕 꼬치를 건넸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결국 부루퉁한 입으로 사탕 꼬치를 먹어 치운 목운요가 집으로 들어갔다.

한편 편액(扁額, 그림이나 글씨를 써서 대문에 걸어 놓는 액자)을 마주하고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청은 아이가 돌아오자, 재빨리 손을 잡아끌었다.

“이거 보렴. 아무래도 누가 우리한테 뭘 잘못 보낸 것 같구나.”

목운요는 편액을 자세히 살피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저희한테 보낸 거 맞아요.”

“뭐가 맞다는 거니? 여기에 ‘소택(蘇宅)’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소택 맞잖아요? 제가 이렇게 새겨 달라고 했어요. 제가 어머니한테 사 드린 집이잖아요. 어머니의 성(姓)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요.”

아이의 말에 소청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놀라우면서도 기쁜 마음이 들었지만 결국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편액을 꼭 달아야 한다면 아버지의 성을 따라 ‘목택(沐宅)’이라고 지어야지, 내 성을 따르면 어떡하려고?”

하지만 목운요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육냥에게 편액을 걸도록 했다.

“요아야!”

“어머니, 저렇게 멋지고 큰 편액을 걸지 않으면 너무 아깝잖아요? 게다가 금 부인께서 여기로 일할 사람을 보내 주시기로 했어요. 편액을 바꿔 달면 찾아오지 못할 텐데…….”

소청은 탐탁지 않다는 듯 아이를 쳐다보다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운요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을 하고선 대문으로 달려가 그 앞을 몇 번이고 맴돌았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회귀 전의 자신은 어머니한테 큰 빚을 졌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 빚을 몇 배나 쳐서 다 갚을 생각이었다. 이깟 집 한 채쯤이야.

“어머니, 저 배고파요. 저녁때 맛있는 거 좀 만들어 주시면 안 돼요?”

소청은 아이의 투정을 받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옆에 와서 자꾸 치근덕거리는 모습에 상한 마음이 조금씩 풀려 갔다. 결국 그녀는 아이의 뺨을 살짝 꼬집고는 부엌으로 가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뺨에 붉은 손자국이 남은 목운요는 베개를 안고 이불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자신도 모르게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입으로는 싫다 하셨지만 기뻐하는 어머니의 눈빛을 목운요는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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