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
* * *
보름 후, 목운요가 이제 막 지은 옷을 들고 조부를 다시 찾았다. 다만 저번보다 밖에서 더 오래 기다려야 했다.
다시 만난 금 부인은 한껏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차를 든 시녀가 물러가는 걸 보니, 방금 전까지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던 듯싶었다.
“부인을 뵙습니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방금 손님을 상대하던 중이라……. 옷은 다 됐나요?”
조심스레 옷을 꺼내 든 목운요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있을까 하여 서둘러 완성했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수선하면 될 겁니다.”
“후후, 수고했어요.”
그때, 후다닥 하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시녀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부인, 진 부인께서 깜빡하고 말씀드리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며 돌아오셨습니다.”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린 금 부인이 입을 열려는 순간,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내 정신 좀 봐. 가장 중요한 일을 깜빡했네요. 제가 좀 그렇잖아요. 그러니 너무 언짢게 생각 마시고…… 으응? 손님이 계셨네?”
화려한 주름치마를 걸친 아리따운 여인은 풍만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시원시원한 웃음소리와 거침없는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금 부인의 얼굴에 형식적인 미소가 피어났다.
“자네를 내 모르겠나? 뭐든지 항상 그리 급하지. 뭘 깜빡한 건가?”
“듣자 하니 순무 부인께서 차를 즐겨 드신다던데 어떤 차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어서요. 그래서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리려고요. 선물이랍시고 보냈다가 좋은 소리도 못 들으면 안 되잖아요. 그보다, 이쪽은? 채월각이 아니라 어린 소저한테 옷을 맞췄다고 들었는데, 그 소저인가요?”
목운요가 진 부인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부인을 뵈옵니다.”
“편하게 있으려무나. 옷을 다 지은 모양인데 내가 한번 봐도 될까?”
금 부인은 기분이 상했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게다가 목운요가 이미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허락을 표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금 부인이 시녀에게 옷을 꺼내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옷을 감싼 흰 비단을 보며 진 부인은 속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흥, 하여간 멍청하다니까! 촌뜨기 계집애한테 뭘 믿고 옷을 맡긴 거야? 연회에서 개망신을 당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이 다 후련하네!’
하지만 코웃음을 치던 것도 잠시, 눈앞에 드러난 의복에 진 부인은 놀라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금 부인은 대체 어디서 저런 진주를 찾아냈단 말인가?
그녀는 옷에 수놓아진 문양을 자세히 살펴보며, 그 모습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겼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인사를 올린 뒤 사라졌다.
한편 몸을 일으킨 금 부인은 옷을 보며 속으로 후회를 금치 못했다. 진 부인에게 보여 주겠다고 승낙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연회까지 닷새 남았는데, 옷에 대한 이야기가 밖으로 퍼져 나가면 너 나 할 것 없이 흉내 낼 것이 분명했다. 그리되면 아무리 보기 좋은 옷이라도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평소 이곳을 자주 찾지 않는 진 부인이 갑자기 찾아온 게. 알고 보니 자신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자신이 입을 옷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거였다.
금 부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옷이 무척 마음에 들지만, 입고 나갈 순 없겠군요.”
목운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인,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아직 어려서 이런 일을 알지 못할 거예요.”
금 부인은 치맛자락에 화려하게 피어난 모란꽃 문양을 쓰다듬으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모란꽃을 수놓을 때는 주로 그 화려한 꽃송이만 쓰곤 하는데, 소저는 꽃송이에 푸른 가지까지 수놓았군요. 그래서 그런지 더욱 생기가 흘러 보이네요.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기분이지만, 며칠 뒤면 경릉성의 모든 여인들이 푸른 가지가 달린 모란꽃 문양이 수놓아진 치마를 두르고 다닐 거랍니다.”
“다른 사람이 흉내 낼까 걱정이신가요? 그렇다면 마음 놓으셔도 돼요. 제가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건 배울 수도 없고 설사 배운다고 해도 진정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없을 테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죠?”
목운요가 짐짓 딴청을 피웠다.
“그보다 왜 입어 보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 말에 옆에 있던 시녀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문양을 다른 사람이 봤는데 입어 봤자 무슨 소용이야? 이걸 입고 연회에 입고 나가면 부인이 걸치신 옷과 똑같은 옷을 입은 평민들이 잔뜩일 텐데. 그걸 입고 나갔다가 무슨 망신을 당하라고?”
금 부인의 얼굴도 파리하게 변했다.
“옷은 무척 마음에 드니 은홍(銀紅)이 품삯을 챙겨 줄 거예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때 한 번 더 부탁드리도록 하죠.”
그 말에도 목운요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옷을 입어 보시면 아실 거예요.”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부인께서 그만 가라고 했으니 얼른 따라와. 품삯은 두둑이 챙겨 줄 테니까.”
은홍이라는 이름의 시녀가 핀잔을 줬지만 목운요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자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한번 입어 보죠.”
금 부인은 은홍에게 옷을 가져오라는 눈짓을 보낸 뒤 안으로 들어갔다.
은홍은 옷을 들고 따라가면서도 여전히 못마땅해했다.
“부인, 너무 봐주시는 거 아니에요? 다른 데도 아니고 순무 부인께서 여는 연회에 가시는데, 저런 계집애 때문에 이런 사달이 났는데도…….”
“힘들 게 만든 것이니 입어 본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지. 왜 그리 말이 많아진 게야?”
이윽고 옷을 걸친 금 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옆에 있던 시녀 은홍 역시 넋이 나간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몸에 딱 맞게 지어진 옷이었다. 옷깃, 어깨, 소매, 허리, 치맛자락 어느 곳 하나 마음에 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금 부인은 땅을 치고 싶을 만큼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이런 옷인 줄 알았더라면 결코 진 부인에게 보여 주지 않았을 거다.
그리 생각하면서 두어 걸음 옮긴 순간, 은홍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부, 부인……. 치, 치맛자락을 보세요. 어서요!”
고개를 숙이자, 치맛자락에서 금빛이 일렁거리다 사라졌다.
“방금 그게 무엇이냐?”
“나비, 나비예요. 황금 나비! 부인께서 움직이시니까 치맛자락에서 황금 나비가 날아올랐어요!”
금 부인은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면서 고개를 숙여 치맛자락을 살폈다.
“정말 정교하구나!”
그제야 목운요가 한 말이 이해됐다. 황금 나비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사라졌다가, 사람이 움직일 때만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절묘한 기술을 그 누가 흉내 낼 수 있으랴?
금 부인은 조심스레 옷을 갈아입은 뒤 은홍에게 잘 보관하라고 단단히 일러뒀다.
“닷새 후에 이 옷을 입고 연회에 갈 것이다.”
입가에 미소를 한껏 지으며 걸어 나오는 금 부인의 모습에 목운요는 자신의 ‘필살기’를 그녀가 발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 부인의 의중을 이미 파악해서 그녀에게 옷을 보여 준 건가요?”
전보다 한결 친근한 목소리로 금 부인이 질문을 던졌다.
“사실 옷에 들어가는 문양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해요. 그걸 피할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 차별을 뒀으면 해서 오랜 고민 끝에 움직이는 나비 문양을 고안해 봤답니다. 부인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은자 몇 냥 더 얹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당연히 마음에 들고말고요!”
금 부인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목운요의 손을 잡았다.
목운요가 조부를 나선 뒤에도 금 부인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그 모습에 은홍이 부루퉁해서는 또다시 툴툴거렸다.
“부인, 옷 한 벌 가지고 오백 냥을 주시다뇨? 옷값치고는 너무 비싼 거 아닌가요?”
“은홍, 날 따른 세월이 그리 긴데도 여전히 어리석구나!”
“죄, 죄송합니다. 부인!”
금 부인의 차게 식은 눈빛에 은홍은 겁에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부인께서 그리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걸 보곤, 그 아이를 소인 대신 시녀로 부리시면 어쩌나 겁이 나서 그만…….”
“걱정하지 말거라. 손재주가 좋은 아이지만 널 대신할 수는 없으니.”
그런 실력을 지닌 아이가 남을 모시는 시녀가 될 리 없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동안 목운요는 길거리를 오가는 여인네들의 치마를 살폈다. 하나같이 푸른 가지가 달린 모란꽃이 수놓아진 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자신이 금 부인에게 지어 준 것과 거의 똑같았다.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목운요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질투에 사로잡힌 채월각 주인 덕분에 일이 술술 풀릴 듯했다.
순무 부인의 연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오늘은 또한 황제의 탄신일이기도 해서, 서릉에서 열리는 축하연에 초대받지 못한 관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황제의 탄신을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일찌감치 연회장에 도착한 진 부인은 금 부인을 기다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서로를 못마땅히 여기는 것은 이미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연회장을 찾은 여러 부인들은 최근 경릉성에 푸른 가지 달린 모란꽃을 수놓은 치마가 유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어떻게 된 일인지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어떤 재미난 구경이 벌어질까 모두 웃음을 참은 채 주인공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금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홱 하고 쏠렸다.
금 부인은 지난번 봤던 그 옷을 그대로 걸치고 나왔다. 진 부인은 고소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달려 나왔다.
“이런, 제가 입방정을 떠는 바람에……. 흔히 볼 수 없는 문양이 너무 고와 주변 사람들한테 이야기했는데 며칠 만에 너 나 할 것 없이 따라 할 줄 누가 알았답니까!”
“겉모습이야 적당히 흉내 낼 수 있겠지. 그게 무슨 대수라고?”
진 부인의 말에도 금 부인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다가 순무 부인이 이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는 인사를 올리려 걸음을 옮겼다.
그에 진 부인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더니, 금 부인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향해 뒤돌아섰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두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순무 부인 역시 넋이 나가 한참 뒤에야 허리를 숙인 금 부인에게 일어나라고 했다. 그러곤 금 부인의 손을 끌며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경릉성에서 부인의 치마를 흉내 낸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답니다. 하지만 오늘 보니 그 옷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로군요.”
금 부인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지 달린 모란꽃이 가볍게 흔들리며 그 사이를 황금 나비가 날아다녔다. 햇살에 반사되어 빛나는 모습이, 선녀나 입을 법한 날개옷처럼 보인다는 데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