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금 부인과의 만남
“소저,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지만 한 잔 드시지요.”
목운요가 찻잔을 들어 향을 맡더니 슬쩍 입으로 가져가 음미했다.
“갓 딴 잎은 가늘지만, 여러 번 덖고 나면 소라 껍데기처럼 돌돌 말리게 되죠. 잎에는 녹용과 같은 털이 덮여 있는데, 그 향이 깊고 맛이 부드럽군요. 이것만 봐도 주인장의 정성이 절로 느껴지네요. 특히나 벽라춘은 진품(眞品)을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라고 들었습니다.”
목운요의 이야기에 금 부인이 이채를 띠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출신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녀는 즉시 호구 조사에 착수했다.
“내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실례지만 어느 가문 출신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평범한 민가 출신입니다. 어릴 때부터 산야에서 자란 덕에 찻잎에 대해 조금 알 뿐입니다. 그저 듣고 배운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읊었을 뿐이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 말에 금 부인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소녀가 걸친 옷의 무늬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지만, 옷감은 그저 그런 것이었다. 아무래도 집안에 무슨 변고라도 있었던 듯싶었다.
금 부인의 배려 깊은 미소에 목운요는 그녀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높은 신분임에도 어린 소녀를 대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저런 내조 덕분에 조운년이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이리라.
“부인께서 제 옷이 마음에 드신다면 하나 지어 드리겠습니다.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품삯은 그때 주셔도 돼요.”
한편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채월각의 주인은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남의 가게에 와서 물건을 팔아도 유분수지, 자신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다니!
자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어린 계집애가 채월각의 최대 물주를 낚아채는 건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부인, 지난번에 부탁하신 옷을 서릉에서 잔뜩 가져왔습니다. 아래층에 두었으니 가서 살펴보시지요.”
“서릉의 옷이야 항상 뻔하지 않은가?”
금 부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척 봐도 주인장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며칠 뒤에 순무(巡撫) 관저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거기에 참석하는 사람들 모두 서릉에서 옷을 사 올 형편이 될 테니, 겉모습만 요란해서는 오히려 난처한 꼴을 면치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인, 이번만은 믿어 주십시오. 올해가 황상의 회갑년(回甲年)이라는 걸 부인께서도 아시지요? 그 때문에 서릉의 부인과 소저들 사이에서 새로운 문양을 넣는 게 큰 유행이랍니다. 소인의 말을 못 믿으시겠거든 아래로 가서 직접 살펴보십시오.”
그러자 목운요가 동경 어린 눈빛을 띤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 채월각 주인의 성의를 보셔서 내려가 보시지요. 어쩌면 소인이 지은 옷보다 부인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도록 할까요?”
목운요는 자신을 흘겨보는 주인장의 시선을 무시했다. 비교할 대상이 있으면 어느 것이 더 나은지 금 부인도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뒤, 형형색색의 옷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척 봐도 화려하고 값비싼 옷감과 장식으로 지어진 옷이었다.
금 부인은 눈을 반짝이며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채월각의 주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춘수방도 누른 마당에 어린 계집의 콧대 하나 못 누르겠는가?
목운요 역시 옷가지로 다가가 다홍색, 연한 남색 치마를 골라 금 부인에게 대보았다.
“부인에게는 이 두 가지 색이 잘 어울릴 듯합니다.”
채월각의 주인은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안목은 제법인 것 같았다. 가게에서 가장 비싸고 귀한 물건을 단숨에 알아보다니.
“부인처럼 빼어난 미색을 갖추신 분에게나 어울리는 것들이죠.”
금 부인은 한동안 자세히 살피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목운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저가 내 옷을 지어 준다고 했는데, 그 말을 믿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다만…….”
목운요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채월각 주인을 힐끔 쳐다봤다.
그에 금 부인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소저, 이것도 인연인데 옆에 있는 다관에 가서 차나 한잔 들지 않겠어요?”
상대의 제의에 목운요는 살짝 무릎을 굽히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부인.”
그러자 애가 닳은 채월각 주인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부인,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서릉에서 다른 옷을 구해 보겠습니다!”
경릉성에서 채월각이 춘수방을 누를 수 있었던 것은, 금 부인이 크고 작은 연회에서 채월각의 옷을 입어 줬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다른 부인이며 소저들 모두 앞다투어 채월각을 찾았다. 그녀를 잃는다면 굴러온 돌에 박힌 돌이 빠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금 부인은 주인장의 권유를 무시하곤, 목운요와 함께 다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관에 도착하자, 목운요가 자신도 모르게 입가를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채월각 어르신께 단단히 미운털이 박히게 생겼네요. 나중에 옷을 사려고 해도 제겐 팔지 않으시겠죠.”
전혀 무섭지 않다는 소녀의 표정에 금 부인이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채월각에 밉보였다는 걸 알면서도 보복당할까 두렵진 않은 건가요?”
“솔직히 말해서 다른 사람이 제게 옷을 지어 달라고 했으면 저도 승낙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부인의 옷이니 고민할 것이 없지요.”
“어찌 그렇다는 거죠?”
“제가 채월각의 해코지로 옷 짓는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면, 부인께서 가장 먼저 죄를 물을 건 제가 아니라 채월각이 될 테니까요.”
“내 옷을 다 짓고 난 뒤에는 어쩌려고요? 그 뒤에 해코지를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때는 더 무서울 게 없지요. 부인의 옷을 제가 지어 드리면 성안의 많은 귀부인들이 제게 옷을 지어 달라고 할 텐데, 뭐가 무섭겠습니까?”
비위를 맞추려고 속에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떠오른 생각을 담담하게 뱉어 내는 소녀의 영특함과 천진난만함에 금 부인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 옷을 지어 주기로 했으니 어떻게 되든 지켜 줄 테니.”
“감사합니다, 부인.”
목운요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자신이 둔 ‘수’가 옳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넓고 넓은 강남땅에서 경릉성을 고른 것은, 조운년이 삼 년 뒤에 양강총독(兩江總督)으로 승승장구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조운년이 조정과 백성으로부터 줄곧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의 지극한 내조 덕분이었다.
차를 마신 후 목운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올렸다.
“저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신 건 아닌지요. 사시는 곳을 알려 주시면 편하신 시간에 제가 찾아가 치수를 재도 될까요?”
그러자 금 부인을 뒤따르던 시녀가 부인의 치수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하지만 목운요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치수는 한 치의 차이도 없이 정확해야 합니다. 그래야 옷의 맵시도 살지요. 어찌할까요, 부인?”
“그럽시다. 이틀 후에 조부(曹府)로 오세요. 마중 나갈 사람을 따로 보내 둘 테니.”
“감사합니다, 부인. 그럼 소인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목운요가 자리를 떠나자, 방금 전의 시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부인, 어째서 한낱 계집애를 그리 정중히 대하시는 건가요?”
“나리께서 내게 항상 분부하시길, 매사에 신중하라고 하셨다. 지금 저 아이는 그저 평범한 시골 계집아이에 불과하지만, 훗날 높은 가지에 오른 봉황(鳳凰)이 되어 훨훨 날아오를지도 모른다. 그러니 친분을 쌓아야지, 어찌 척을 진단 말이냐? 게다가 저 아이의 성품도 마음에 드는구나.”
시녀는 말을 아꼈지만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속으로는 툴툴거렸다.
‘봉황은 아무나 되나? 기껏해야 참새 새끼가 가지에 올라 봤자 잡아먹히기밖에 더해?’
그 시각, 채월각의 주인은 심사가 잔뜩 꼬여 있었다.
그는 한참의 고민 끝에 금 부인의 콧대를 눌러 주기로 결심했다. 그래야 채월각의 옷이 제일이라는 것을 금 부인도 알게 될 것이다.
계획을 떠올린 그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맹랑한 것, 날 상대하기에 백만 년은 이르다!’
* * *
이틀 후, 조부로 가자 지난번 채월각에서 봤던 시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저, 이쪽으로.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을 향한 시녀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게 느껴졌지만 목운요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연분홍색 일상복 차림의 금 부인은 한결 정갈해 보였다.
“목운요, 부인을 뵙습니다.”
“편하게 있어요. 그나저나 이름이 목운요였군요. 좋은 이름입니다.”
금 부인는 목운요를 슬쩍 훑어봤다. 섬세하게 수놓아진 연보라색 제비꽃을 따라 치맛자락이 흔들릴 때마다, 붉은 꽃술이 보일락 말락 했다. 자세히 보니 꽃술 주변이 뚫려 있어서 속치마가 슬쩍슬쩍 비쳐, 우아하면서도 은근한 멋이 풍겼다.
“감사합니다, 부인. 지금 치수를 재도 될까요? 부인처럼 빼어난 체형을 가진 이를 보기 힘든 터라, 얼른 옷을 지어 입혀 드리고 싶어요.”
“좋아요, 당장 시작해 보죠.”
목운요는 치수를 채며 금 부인과 이야기를 나눈 후, 조부를 나왔다.
금 부인은 순무 부인의 연회에서 입을 옷을 지어 달라고 했다. 연회는 이십 일 뒤에 열리는 터라, 최소 보름 안에 옷을 다 짓고 남은 닷새 동안 옷을 수선해야 했다.
그녀는 곧장 객잔으로 돌아가 옷 짓는 일에 몰두했다.
그사이 채월각에서는 목운요에 대한 조사가 한창이었다.
“갑자기 두 모녀가 경릉성에 나타났다? 다른 건, 달리 알아낸 건 없느냐?”
“더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쓸모없는 것들! 모녀가 수로와 육로 중에서 어디로 왔는지 알아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닌 이상, 수로를 이용했다면 배를 빌렸을 것이고, 육로를 이용했다면 마차를 빌렸을 테니!”
“아, 수로로 왔다 합니다! 하나 누구의 배를 빌린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알아내지 못했다?”
턱을 쓰다듬은 채월각의 주인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았다. 일단은 고 맹랑한 것이 대체 무슨 짓을 벌일지 두고 봐야겠다. 그건 그렇고, 진 부인(陳夫人)에게서는 아직 대답이 없느냐?”
“연락이 왔습니다. 하시겠다고 합니다.”
“알았다. 감히 내가 보는 앞에서 내 손님을 빼돌려? 그러고도 무사하길 바란 건 아니겠지!”
채월각 주인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더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 층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