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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19화 (19/442)

19화 새로운 무대

목운요가 얼이 빠진 소청을 부축하더니 육냥에게 눈짓하며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골목을 돌아서자마자, 소청의 손을 잡고 앞으로 후다닥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머니, 빨리 도망쳐야 해요. 잡히면 큰일이라고요.”

두 모녀 곁에는 육냥 한 사람뿐이었다. 아무리 그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혼자서는 이곳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만일 포위라도 된다면 절대 빠져나오지 못할 터.

한데 육냥이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고개를 돌려 재빨리 손짓하자, 그제야 육냥도 성큼성큼 뛰기 시작했다.

언제나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깃털이 내려앉은 것처럼, 가벼운 웃음기가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졌다.

뱃사공들은 다행히 먼저 돌아와 있었다. 목운요는 재빨리 배에 오르며 다급하게 외쳤다.

“빨리 가요! 불량배들이 쫓아오고 있어요!”

“어이쿠, 그게 무슨…….”

지레 겁먹은 뱃사공들이 후다닥 밧줄을 풀고 힘껏 노를 젓기 시작했다.

선실에 앉은 목운요는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채월각의 도련님이 복수하겠다며 덤벼들면 볼만한 구경거리가 생길 것이다.

그제야 정신이 든 소청이 목운요를 요리조리 살폈다.

“요아야, 어디 다친 데 없니? 놀라진 않았어?”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괜찮으면 됐다, 됐어.”

소청은 목운요를 품에 안고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머니의 품 안에 안겨 있으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래도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면 소씨 가문과 진왕을 철저하게 짓밟아 줘야 할 것이다.

목운요는 다시금 복수를 다짐했다.

회안성 나루터에 몽둥이를 든 사내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이들은 주변을 한동안 샅샅이 뒤졌지만, 목운요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담팔왕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년이 여기에 없으니 서릉으로 가자. 춘수방, 이 빚은 확실히 갚아 주마!”

* * *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후, 배는 소주성(蘇州城)과 양주성(揚州城)을 지나 경릉강(竟陵江)에 들어섰다.

배가 경릉성 나루터에 멈춰 서자, 목운요는 소청을 데리고 배에서 내렸다. 푸른 벽돌과 검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의 모습에 그녀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 경릉성은 목운요가 신중하게 고른 곳이었다.

돈을 뱃사공들에게 건넨 뒤, 세 사람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소청은 내심 설레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요아야, 앞으로 여기서 사는 거니?”

“네. 여긴 소주성, 양주성과도 가깝고, 남쪽으로는 항주(杭州)와 양자강(揚子江)과도 인접해 있어서 교역을 하는 데 안성맞춤이에요. 게다가 날씨도 따뜻해서 지내시기에 좋을 거예요.”

“그렇구나. 어쨌든 낯선 곳이니 매사에 조심하는 게 좋겠구나. 그러니 너도 조신하게 지내거라. 알겠니?”

“네네, 걱정하지 마세요. 조신하게 행동할게요.”

객잔에서 간단히 배를 채운 뒤 방에 들어온 목운요와 소청은 침상에 누운 채로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는 어떤 집이 좋으세요? 지금은 돈이 별로 없어서 일단 적당히 지낼 만한 곳을 알아보려고 해요. 나중에 제가 돈 많이 벌면 황궁보다도 더 좋은 곳에 모실게요.”

“후후후, 그래. 네 덕에 이 어미가 호강하겠구나.”

“네,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목운요는 자신 있다는 듯 자그마한 주먹으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어서 말씀해 보세요. 어떤 집이 좋아요?”

소청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아이만 옆에 있으면 무서울 것도, 슬플 것도 없을 것 같았다.

“황금 같은 집은 어떨까?”

“좋아요! 두고 보세요, 머지않아 제가 곧 황금으로 지은 집으로 모실 테니!”

“그래, 내 꼭 기다리마.”

* * *

한편 그 시각, 새하얀 전마(戰馬)가 새카만 어둠을 가르며 쏜살같이 하언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뒤로 십여 필의 전마가 바짝 따라왔다.

이들은 마을 서쪽에 멈춰 섰다. 시위 우항이 재빨리 말에서 내려 월왕의 고삐를 잡아 쥐었다.

“주인님, 이곳이 목 소저가 살던 곳입니다.”

말에서 내린 월왕은 자물쇠가 걸린 대문을 쾅 하고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주변을 살핀 그의 낯빛이 정원의 풍경보다도 어두워졌다.

“……어딨지?”

한밤중에 큰 소리가 나자, 놀란 양 씨가 달려 나왔다. 대문이 박살 난 걸 본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다, 당신들은 뉘시오?”

그에 우항이 성큼성큼 걸어와 입을 열었다.

“저희는 목성의 지인들입니다. 목 부인과 운요 소저를 뵈러 왔는데 어디 계시는지요?”

살기를 풍기는 월왕의 모습에 양 씨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 한 달여 전에 마을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는 저도 몰라요.”

월왕의 안색이 점점 싸늘해지자, 우항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아, 끝장이다, 끝장이야!

“주인님, 제가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 대체 어디 가서 주인의 비수를 훔친 자를 찾는단 말인가…….

“가자!”

이내 말에 오른 월왕이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점점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에 양 씨는 속으로 연신 ‘부처님’을 외치며 식은땀을 닦았다. 소청과 운요가 여길 떠나길 천만다행이었다.

월왕 일행이 서릉에 당도했을 무렵, 생일선물을 실은 호송대도 조용히 성문을 통과해 소씨 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다음 날, 머리를 단정히 정리하고 아침밥까지 든든히 먹은 목운요는 소청, 육냥과 함께 집을 구하러 나갔다.

그리고 여러 집을 돌아다니던 중 마음에 드는 집을 한 채 골랐다. 출입구가 두 개 있는 집이었다.

목운요는 집이 너무 크다는 소청을 설득했다.

“어머니, 앞으로 저희가 장사를 시작하면 사람들이 잔뜩 드나들 거예요. 그러니 이 정도는 괜찮아요.”

소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정하고 나자 집이며 정원이며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정자와 누각까지 갖춘 데다 방 하나하나 정성 들여 지은 티가 역력했다.

목운요 역시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다만 마음에 든 것은 소청과 달리 집이 아닌, 위치였다.

집의 맞은편에는 경릉성에서 유명한 망강루(望江樓)가 있었다. 그리고 삼십 분 정도 떨어진 곳엔 지주의 관저가 있었다.

마음을 정한 목운요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삼천육백 냥으로 집을 구입했다. 안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터라 수리가 끝나는 대로 들어가면 된다고 했다.

머물 곳이 마련되자, 목운요는 본격적으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물밑 작업에 나섰다.

어떻게 해야 경릉성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경릉성의 지주와 친분을 쌓아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참이었다. 이왕지사 더위를 피하려면 큰 나무일수록 좋은 법 아니던가?

마음을 굳힌 그녀는 육냥에게 자수 실을 잔뜩 사 오라고 한 뒤, 본격적으로 옷을 짓기 시작했다.

“요아야, 지금도 형편이 넉넉한데 왜 자꾸 위험한 일을 자초하려는 거니?”

소청이 걱정스러운 듯 아이를 타일렀다. 소씨 가문이나 진왕 모두 이제는 자신들과 무관한 사람들 아니던가? 이리 먼 곳으로 도망쳤으니 그들과 얽히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할 수만 있다면 저도 그들과 얽히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하언촌처럼 외진 마을에 있던 우리를 찾아낸 소씨 가문이에요. 경릉성이라고 해서 과연 무사할까요? 그들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어요.”

입가를 슬쩍 깨문 아이의 모습에 소청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보구나.”

“그저 조용하게 살아가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 저도 잘 알아요. 약속드릴게요. 설사 소씨 가문의 손아귀에 떨어진다고 해도 다시는 다치는 일이 없도록 제가 어머니를 꼭 지켜 드릴 거예요.”

소청은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 녀석, 내가 다치는 건 무섭지 않다. 그저 네가 꿈에서 봤다는 그 길을 또다시 걷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될 뿐이지.”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해도 자신의 귀한 딸이 첩이 되어 평생 구박을 당하는 모습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생은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후회 없이 살아갈 테니까요.”

내리깔린 눈 속에 서늘한 빛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후회 없이 살아가는 건 물론, 그들에게도 일일이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말 테다!

* * *

채월각과 춘수방의 세력 다툼은 경릉성에서도 이어졌는데, 이곳에서는 채월각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오월 하순, 여인들이 매미 날개처럼 얇은 여름옷을 걸치기 시작하자, 채월각의 주인은 장부를 넘기며 연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저, 치마가 참으로 고운데 어디서 맞춘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제가 직접 수놓은 거예요.”

“직접 수를 놓은 거라고? 어쩐지, 이런 무늬는 본 적이 없다 했는데…….”

목소리만 듣고도 상대가 누군지 알 만큼 채월각의 주인은 귀가 유독 밝은 편이었다. 하물며 방금 흥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경릉성에서도 힘깨나 쓴다는 거물의 정실부인이 틀림없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고 재빨리 문가로 달려갔다.

“아니, 금 부인(金夫人) 아니십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부인께서 즐겨 마시는 벽라춘(碧螺春)을 위에 준비해 뒀습니다요.”

“어머, 바쁘신 것 같으니 전 그만 가 보겠습니다, 부인.”

“잠깐. 소저의 손재주가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괜찮으면 나랑 같이 안으로 들어가서 둘러보지 않겠어요? 서릉에서 가장 유행하는 신상 의복을 들여왔답니다. 소저가 마음에 든다면 한두 벌 정도는 선물로 드리죠.”

“그리 큰 신세를 져도 될지…….”

오늘 목운요는 해와 달이 수놓아져 있는 비단 적삼을 걸친 채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한 멋이 살아 있는 의복이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 위를 씌워지자, 단아하면서도 고상한 미모가 더욱 빛을 발했다.

“신세는 무슨.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죠. 머뭇거리지 말고 얼른 들어와요.”

두 사람의 대화에서 채월각의 주인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금 부인은 지주 조운년(曹運年)의 정실로, 서릉의 대갓집 출신이었다. 조운년이 경릉성 지주 자리에 순조롭게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금 부인의 가문에서 힘써 준 덕분이라고 알고 있었다.

한데 남에게 관심을 보이는 일이 드문 금 부인이 먼저 말을 걸고 선물까지 주겠다고 할 정도의 인물이라니.

상대의 제의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게 되자, 목운요는 수줍은 미소를 지은 채 금 부인의 뒤를 따랐다.

한편 금 부인은 눈앞의 소녀를 조용히 살폈다. 기껏해야 열서너 살인 듯한데 범상치 않은 자태가 은근히 드러났다.

서릉에서 오래 지낸 터라 평소 사람 볼 줄 안다고 자부하던 그녀였다. 서릉에 있는 수많은 여아 중에서 저리 귀티가 절로 흐르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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