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피로 물든 우산
말끔한 얼굴의 미청년을 마주하고도 목운요는 별반 놀라지 않았다. 진왕부에서 이미 여러 번 본 적 있기 때문이다.
왼쪽 뺨에 남은 붉은 상흔만 없다면 육냥은 전형적인 미남자였다. 특히 그의 두 눈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또렷하고 깊었는데, 아무래도 이역(異域, 다른 나라)의 핏줄이 섞인 것 같았다.
“육냥, 강남 경릉성(竟陵城)에 갈 배를 빌려야 해. 믿을 만한 뱃사공이 모는 배를. 네가 가서 배를 알아봐 줘. 알겠지?”
말을 마친 목운요가 은표 몇 장을 내밀자, 육냥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은표를 받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멀어져 가는 육냥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목운요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당초 육냥이 충직하게 진왕을 보필하기는 했으나, 자신에게도 충성을 다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목운요는 그의 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거금을 받아 간 육냥이 과연 제 곁으로 돌아올 것인가…….
똑똑.
두세 시진 정도 지나고 하늘빛이 어둑어둑해진 후에야 육냥이 방문을 두드렸다.
목운요의 눈빛에 이채가 어리더니 어느덧 맑은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갔다. 볼수록 사람의 시선을 끄는 눈빛이었다.
“배를 빌렸어?”
육냥이 증서와 함께 남은 은표와 잔돈을 건넸다.
증서에 적힌 금액과 남은 돈을 확인해 보던 목운요가 멈칫했다. 금액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아떨어졌다.
“설마 이 시간이 되도록 아무것도 안 사 먹은 거야?”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보려야 볼 수 없는 이 곰탱이가 설마 온종일 굶고 다녔던 건 아니겠지?
육냥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지만 목운요는 그가 평소와 달리 뻣뻣하게 군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먼저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
묵묵히 방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에 목운요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심부름꾼을 불렀다. 다행히 너무 늦은 시간은 아니라서 식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녀는 심부름꾼에게 식사와 약을 육냥의 방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뜻밖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앞으로 오랫동안 육냥은 자신의 최대 조력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그의 마음을 사야 했다.
계획을 세운 목운요가 소청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한편 육냥은 눈앞에 차려진 식사와 약병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는 한참 뒤에야 젓가락을 쥐고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약병을 품에 넣은 육냥은 장검을 쥐고 옷을 입은 채로 침상에 누워 잠이 들었다.
* * *
이튿날. 소청과 목운요, 그 뒤를 따르는 육냥 세 사람이 아침 일찍 강남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목운요가 배 한 척을 몽땅 빌린 터라 두 뱃사공은 깍듯하게 행동했다. 특히 육냥을 본 뒤로는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이유를 목운요는 알진 못했지만, 멍청한 질문을 던지는 대신 빙긋 미소 지을 뿐이었다.
힘찬 소리와 함께 배가 서서히 출발했다. 파도를 가르며 남쪽을 향해 가는 배 위에서 소청은 목운요의 손을 꽉 잡았다.
소청의 얼굴이 허옇게 질린 듯하자, 목운요는 미리 준비한 매실을 소청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어머니, 이걸 드시면 좀 괜찮아지실 거예요.”
“고맙다. 배는 처음 타 보는 거라 익숙하지 않구나.”
“제가 덤벙거리는 바람에 어머니가 뱃멀미하시는지도 알아보지 않고……. 이럴 줄 알았으면 육로(陸路)를 알아봤을 텐데.”
“이 정도는 견딜 만하니 신경 쓸 것 없다.”
소청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가 하룻밤 사이에 다 자란 것 같았다.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말도 조리 있게 하고, 자신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역할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에 대견하면서도 왠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먼 길을 가야 하는 탓에 배 안에는 웬만한 생필품이 다 갖춰져 있었다. 식사는 직접 만들어 먹어야 했지만.
목운요는 아픈 소청과, 부엌칼 한번 쥔 적 없는 것 같은 육냥을 대신해 팔을 걷어붙이고 식사를 준비했다.
다행히 그녀의 음식 솜씨는 나쁘지 않았다. 조촐한 반찬을 만들어도 맛있고 신선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었다.
뱃사공들이 말린 식량을 먹는 동안, 목운요는 휘리릭 삼 인분의 식사를 마련했다. 미심쩍어하던 육냥도 며칠 지나고 나자 익숙해진 듯했다. 목운요가 먹으라고 하면 하나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우곤 했다.
마침내 열흘째 되던 날, 배가 떨어진 물건을 사러 잠시 정박하기로 했다. 이곳은 회안성(淮安城)으로, 언성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누각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소청을 부축해 배에서 내린 목운요는 땅을 밟자마자 살짝 현기증이 돌았다.
“어머니, 성 구경도 하면서 필요한 물건을 사도록 해요.”
“응, 그러자꾸나.”
쉴 새 없이 오가는 인파와 강가에 자리 잡은 다양한 상점에, 눈을 잠시도 뗄 수 없었다.
목운요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구경하던 소청은 우산을 파는 곳 앞에 멈춰 서더니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강남에는 비가 많이 내린다고 해요. 마음에 드시면 두 개 사서 나란히 쓰고 다닐까요?”
“아냐, 우산을 두 개나 사서 뭐 하려고? 이 색이 네 지금 옷과 잘 어울리는 것 같구나.”
우산에는 복사꽃이 그려져 있었다. 몇 번의 붓질로 쓱쓱 그린 듯했지만 그 때문에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는 복사꽃의 생생함이 더욱 두드러졌다.
목운요는 우산을 들어 펼치더니 한 바퀴 빙 돌며 소청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니, 저 어때요?”
“요아야, 참 잘 어…….”
소청이 환하게 웃으며 답하던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소저. 이 우산이 마음에 드신다면 제가 사 드리고 싶습니다만.”
화려한 비단옷을 걸친 젊은 사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음흉한 눈을 한 사내는 우산을 쥐고 있는 목운요의 손을 만지려는 듯 쑤욱 하고 손을 뻗어 왔다.
소청이 재빨리 목운요 앞을 막아서며 호통을 쳤다.
“백주 대낮에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라니? 그저 아리따운 따님에게 우산 하나 선물해 드리려는 것뿐인데요?”
젊은 사내가 눈짓하자, 뒤에 있던 건장한 시종 하나가 달려 나와 소청을 홱 하고 밀어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소청은 사내의 힘에 밀려 하마터면 바닥에 나뒹굴 뻔했다. 그 모습에 목운요가 ‘탁’ 하고 우산을 접더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게 우산을 선물해 주고 싶으시다고요?”
“오오, 그렇습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제가 사 드리죠.”
“저희 도련님은 장차 채월각의 주인이 되실 몸이랍니다. 강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죠!”
“도련님의 마음에 든 걸 보니 전생에 나라라도 구하셨나 봅니다!”
채월각? 세상이라는 게 이리 좁은 곳이었나? 얼마 전에 채월각의 이름을 팔아 춘수방의 총관에게 한몫 단단히 뜯어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여기서 장차 채월각의 주인을 만나다니…….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제대로 ‘판’을 벌리는 수밖에!
우산을 두 손에 쥔 목운요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우산의 색이 참 곱지 않습니까? 도화색도 나쁘진 않지만 전 피처럼 붉은 선홍색이 더 좋아요.”
그 말에 젊은 사내가 우산을 파는 장사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봐, 소저가 하시는 말씀 못 들었어? 선홍색이 좋다고 하시잖아. 어서 꺼내 봐!”
“고, 공자님……. 선홍색 우산은 저, 저희 가게에 없습니다요.”
선홍색 바탕에 복사꽃이 들어간 우산이라니, 주루에서나 쓸 법한 물건을 대체 누가 판단 말인가?
“없으면 만들어 내야지! 안 그러면 사람을 시켜 가게를 박살 내 줄 테다. 소저, 제가 선홍색 우산을 반드시 구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안성 담씨 가문은 비단 장사로 유명한데, 이들한테 누에 실을 대 주고 먹고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담씨 가문의 공자인 담팔왕(譚八旺)에게 바른 소리를 하지 못했다.
목운요는 싱긋 웃더니 백옥처럼 흰 얼굴을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공자께서 직접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요? 아, 좋습니다, 좋아요! 제가 ‘손수’ 도와드리죠! 그런데 뭘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까? 흐흐흐…….”
담팔왕이 목운요를 홀린 듯 쳐다보며 슬쩍 다가왔다.
그 순간, 목운요가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들어 올리더니 담팔왕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담팔왕의 허리가 꺾이자, 목운요는 놓치지 않고 그의 고간을 세게 걷어찼다.
“채월각 따위가 감히 춘수방 사람을 희롱해?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날뛰다니, 다시는 어디 가서 그 이름 들먹이지 못하게 해 주마! 숙부님이신 한춘(韓春)께 너희 채월각을 박살 내 달라고 할 테다!”
“추, 춘수방이 뭐 그리 대수라고? 우리 채월각이 겁낼 것 같아?”
그에 목운요가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담팔왕을 흠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겁 안 난다고? 그럼 네 아비가 왜 우리 숙부한테 그렇게 알랑방귀를 뀌어 댔을까? 내가 오늘 네놈을 때려죽인다고 해도 네 아비는 입도 뻥끗 못 할 거다!”
“이, 이년이……! 내가 이 꼴이 되도록 너흰 뭐 하고 있어? 어서 와서 구하지 않고!”
담팔왕이 얼떨떨한 표정의 시종들에게 소리쳤다.
“엇, 공자님!”
그러자 목운요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육냥, 이놈들을 싹 쓸어버려!”
육냥은 손에 들고 있던 간식을 홱 버리곤, 장검을 뽑아 무심히 휘둘렀다.
목운요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던 시종의 손가락이 칼을 맞고 바닥에 투둑 떨어졌다.
“아, 아악! 사, 사람 살려!”
“멈춰, 육냥. 오늘 네 아비의 체면을 봐서 목숨만은 살려 주지. 이 몸은 서릉으로 가는 중이니 복수하고 싶거든 날 찾아오라고. 그나저나 선홍색 우산은 덕분에 구한 것 같네.”
손에 든 우산을 펼치자, 우산 곳곳에 핏자국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이 우산을 줄 테니 기념으로 간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