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너는 내 사람이다
어머니가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목운요는 이 씨를 차갑게 노려봤다.
“할머니, 운이 좋아 살아남거든 일 년 반 뒤에 서릉으로 절 찾아오세요. 어쩌면 할머니를 도와 제게 복수할 사람을 찾을지도 모르니까요.”
“요, 요아야! 날 이리 버리고 가면 네 아비가 슬퍼할 것이다. 제, 제발 살려다오……. 흐흑, 목운요 이 독한 년, 네년도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목운요가 이 씨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참, 한 가지 깜빡하고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임강성이 언성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만일에 대비해 입단속 단단히 해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뭐, 뭐 하려는 거냐?…… 저,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마라…… 아아악!”
피 묻은 칼을 수풀에 던진 목운요는 몸을 일으키며 흐트러진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하늘이 지은 죄는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자초한 죄는 그 값을 치러야 하는 법이죠.”
“으윽…… 우으윽…….”
목운요가 소청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머니, 가요. 저희가 할 도리는 다했으니까요.”
“그래, 알았다.”
* * *
두 사람은 조용히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언성에 비해 임강성은 사람도 많고 한층 활기가 넘쳤다. 대로와 건물도 하나같이 웅장하고 화려했다.
게다가 발달한 수로 덕분에 강남땅 어디든 쉽게 갈 수 있어서, 이곳에는 각지로 향하는 상인들로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뤘다.
적당해 보이는 객잔(客棧)을 찾은 목운요는 돈을 내고 방을 하나 빌렸다.
“어머니는 여기서 잠시 쉬고 계세요. 제가 내려가서 먹을 만한 게 있는지 보고 사 올게요.”
“요아야, 낯선 곳에서 함부로 다니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제 꼴이면 어딜 가도 누구 하나 다가오지 못할 테니까요. 방금도 객잔의 심부름꾼이 절 거지인 줄 알고 쫓아내려 했잖아요.”
“어째 점점 왈패처럼 구는 게야?”
“헤헤헤, 아무리 그래도 전 엄마 딸이잖아요. 절 모른 척하시면 안 돼요!”
천진난만한 그 모습에 소청은 아직도 손자국이 불그스레 남은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리 얻어맞고도 소리 한번 못 지르고…….”
“괜찮아요, 어머니. 이젠 별 느낌도 안 드는걸요.”
목운요가 손을 뻗어 제 얼굴을 마구 잡아당겼다.
“아이고, 이 녀석! 그러다가 흉 진다, 그러지 말거라.”
목운요는 눈웃음을 치며 활짝 웃었다.
“어머니, 저 다녀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세요. 절대로 밖에 나가시면 안 돼요.”
“그래, 어서 다녀오거라.”
* * *
객잔 문을 나선 그녀는 길거리를 살피더니,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거지를 발견하곤 가까이 다가갔다.
“얘, 너 여기 잘 알아?”
열대여섯 살로 보이는 아이가 힘없이 목운요를 쳐다봤다.
“응, 근데?”
“어느 뱃사공이 믿을 만한지도 알겠네?”
“왜 물어보는 건데? 네 꼴을 보아하니 배를 탈 돈도 없을 것 같은데.”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돌리던 아이는 목운요가 은자를 꺼내 들자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강성 나루터에서 주 씨(周氏)만큼 실력 좋은 뱃사공도 없지. 뱃삯이 좀 비싸긴 하지만 실력도 좋고 사람을 싣는 객선(客船)부터 짐 싣는 화물선까지 없는 게 없거든.”
목운요는 아이에게 은자를 던져 주곤 재빨리 나루터로 향했다. 임강성에서 강남까지 가는 길이 멀기에 중간에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 그러니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고 강남으로 갈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나루터로 향하는 길에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들어 보니 장사꾼과 손님이 가격을 놓고 흥정하는 것 같았다.
“저런 녀석이 이십 냥이라니, 너무 과한 거 아냐?”
“과하다뇨? 아무리 장사꾼이라도 남 등쳐 먹고 살지는 않습니다. 이거 한번 보십시오. 떡 벌어진 어깨하며, 돌처럼 단단한 주먹! 척 봐도 무공을 할 줄 아는 게 분명합니다. 호위 무사로 쓰기에 딱이란 말입죠.”
“약 먹은 병아리처럼 골골거리는 게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데, 무공을 할 줄 알면 뭐 해? 쳇, 누굴 바보로 아나.”
“어이쿠, 손님!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너무 비싸면 십오 냥이 어떠…… 그럼 십 냥이라도…….”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목운요의 눈에 바닥에 쓰러진 채 손발이 결박된 사내가 보였다.
‘저, 저자는……!’
자세히 보려고 잽싸게 다가가자, 노예 상인이 홱 하고 떠밀었다.
“웬 거지새끼야?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목운요는 그런 노예 상인을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
“눈을 대체 어디에 달고 다니는 거야? 장사꾼이라면서 사람도 못 알아보는 거냐?”
그 말에 노예 상인은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목운요를 자세히 살폈다.
꾀죄죄한 몰골의 거지새끼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복숭아꽃보다도 붉은 입술에 진주알처럼 고른 이,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공자님’이었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느낌이 어느 대갓집의 자제가 분명했다!
“아이쿠, 귀한 공자님께서 어찌 이런 모습을 하고 계십니까? 요새 유행하는 놀이라도 되는 건가요? 소인이 무식해 귀한 분을 뵙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오지랖도 넓군. 그나저나 저자가 얼마라고?”
“역시 귀한 분답게 안목도 높으시군요. 이십 냥만 주십시오. 무공도 할 줄 아니 데리고 다니시면 체면 좀 사실 겁니다.”
목운요가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더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대를 발로 툭툭 찼다.
“고개 들어 봐. 마음에 들면 사 줄 테니.”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하지만 텅 빈 눈동자가 목운요를 응시해 왔다.
그 순간, 서늘한 검날이 자신의 등을 스르륵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 그자다.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듯 진왕을 따르던 측근 호위!’
자신이 진왕의 첩이 된 후에, 언제나 묵묵히 진왕의 뒤를 지키던 그를 보곤 했다. 진왕이 길거리에서 십 냥을 주고 샀다던가…….
호기심이 동해 그를 관찰하다가 딱 한 번, 그가 눈을 들어 자신을 쳐다봤다. 그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고, 북풍 한파보다도 차가웠다.
피비린내를 흠뻑 머금은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목운요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를 마주한 후 이틀 내내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데리고 다니면 한결 위풍당당…….”
“닷 냥, 닷 냥이면 사겠다.”
“닷 냥이요? 그건 너무 싸지 않습니까. 팔고 떨어지는 게 있어야 저도 먹고살…….”
“싫으면 말고.”
목운요가 몸을 돌리자, 노예 상인이 후다닥 달려 나왔다.
“공자님, 그러지 마시고 조금 더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팔겠습니다.”
“그럼 육 냥. 더는 안 돼!”
“아…… 알겠습니다. 그럼 육 냥만 받겠습니다. 자, 이건 매매 계약서니 받아 가십시오.”
목운요는 은자 육 냥을 던져 준 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내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육 냥을 주고 널 샀으니 오늘부터 네 이름은 육냥이다.”
목운요가 대답 없는 사내의 다리를 툭툭 찼다.
“산 거야, 죽은 거야? 안 죽었으면 일어나서 따라와.”
그녀는 사내를 기다려 주지 않고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총총 걸어갔다. 십여 걸음 뗐을 무렵,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목운요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아무래도 이번 생엔 천지신명께서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시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진왕의 호위 무사를 만나게 되다니…….
이 또한 하늘의 조화라면 조화겠지만, 목운요는 그것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 * *
멀리서 나루터가 보이자, 목운요는 걸음을 멈추고 육냥을 돌아봤다.
여전히 밧줄에 묶여 있는 터라 상대는 힘겹게 뒤따라오고 있었다. 한겨울에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에 밧줄이 어찌나 꽉 묶여 있는지, 발목이 다 까져서 움직일 때마다 피가 흘렀다.
“육냥,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알았지?”
육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목운요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자는 진왕 곁에 있을 때도 항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처음 진왕이 육냥을 데리고 나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진왕을 비웃었다. 괴팍한 주인처럼 아랫사람도 사람 구실 하긴 틀렸다며 쑥덕거렸다.
하지만 육냥의 검술을 보게 된 사람들은 자신의 얕은 안목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목운요가 낑낑거리며 커다란 장검을 가지고 나타났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육냥의 아득한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거친 황무지에 간신히 돋아난 새싹처럼…….
목운요는 장검을 뽑아 육냥에게 겨눴다.
“꼼짝하지 말고 가만히 서 있어. 밧줄을 끊어 줄 테니까.”
하지만 장검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해 손에 들린 검날의 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그러자 육냥이 밧줄에 묶인 두 손을 검날 끝에 비비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밧줄은 스르륵 풀렸다.
육냥은 삽시간에 목운요의 손에 들린 장검을 잡아당겨 제 손에 쥐더니, 발목에 묶인 밧줄도 단칼에 잘라 냈다. 그리고 장검을 검집에 넣은 후, 제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돈값 제대로 한다는 생각에 목운요는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점포에 들러 육냥에게 옷과 신발을 사 준 그녀는 함께 객잔으로 향했다.
“육냥, 오늘부터 나는 네 주인이야. 내 말이라면 반드시 따라야 해. 알았지?”
그러나 육냥은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뒤를 따를 뿐이었다.
이에 목운요의 낯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육냥을 쳐다봤다.
“알았으면 알았다고 대답해. 네가 말할 줄 아는 거 아니깐.”
한참 후에야 육냥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목운요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 자신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 정말 말을 할 수 있었을 줄이야!
객잔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방 하나를 더 내 달라고 했다. 그러곤 육냥에게 방에 가서 깨끗이 씻은 뒤 새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지금 저 꼴로 방 안에 들어갔다가는 어머니가 놀라 기절하실지도 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객잔의 심부름꾼은 착잡한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어린 거지가 어디 가서 왕초 거지를 데리고 오더니, 객잔에 묵고 싶다며 돈을 내다니……. 거지조차 돈을 내고 객잔에 묵을 만큼 세상이 좋아졌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홀로 방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소청에게 육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를 호위 무사로 고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소청은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면 우리 둘이서 사내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앞으로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어머니를 부잣집 귀부인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돈 많은 사람들은 밖에 나갈 때마다 시녀, 심부름꾼, 호위 무사까지 우르르 데리고 다니잖아요. 앞으로 어머니의 시중을 들 사람들이 많아질 테니 미리 익숙해지는 것도 좋죠.”
“후후, 말만 들어도 좋구나. 네 덕분에 어미가 앞으로 꽃길만 걷겠어.”
그 말에 목운요가 활짝 눈웃음을 지었다.
* * *
이튿날, 목운요는 깨끗이 씻은 뒤 새로 산 분홍색 비단 치마로 갈아입고선 육냥의 방문을 두드렸다.
목운요가 문을 두드리기 전부터 인기척을 느낀 터라, 육냥은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치마를 걸치고 나타난 목운요의 모습에 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어제 자신을 산 게, 가녀린 소녀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