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강남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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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모르는 사이 위기에서 벗어난 목운요는 날마다 수놓는 일에만 매달렸다. 양 씨도 손수건에 수놓는 일을 잠시 그만두곤, 모녀에게 밥을 해 주거나 목운요의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그리고 드디어, 목운요가 오랫동안 쥐고 있던 바늘을 손에서 놓았다.
“됐다, 드디어 완성이다!”
그러자 양 씨와 소청이 침상 위에 ‘절경’을 펼쳤다.
“몇 번을 봐도 이게 수를 놓은 거라고는 보이지 않는다니까! 너무 아름답구나!”
힘들게 완성한 작품을 보며 목운요 역시 무척 만족스러웠다. 이걸 볼 때마다 하늘이 자신을 돕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몇 번 살펴본 뒤에 춘수방의 총관님한테 보내면 될 것 같아요.”
지금은 그저 수를 놓는 작업만 끝냈을 뿐이다. 이걸 병풍으로 만드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그래, 후딱 보내자고. 여기에 계속 뒀다간 내 안목이 너무 높아져 버릴 것 같단 말이지.”
자신도 모르게 뻗어진 손을 양 씨는 꾹 참고 집어넣어야 했다.
“아주머니, 내일 아저씨와 같이 언성으로 가요.”
“그러자꾸나. 두 사람만 보내기엔 마음이 놓이질 않아. 바깥양반한테 가서 이장님 당나귀 좀 빌려 오라고 할게.”
“그리고 내일 춘수방에 물건을 넘기면 저랑 어머니는 떠날 생각이에요.”
“이렇게 빨리?”
목운요와 소청을 바라보는 양 씨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오기 시작했다.
“동생, 정말 가는 거야?”
“네, 장 씨 사건으로 시끄러운 데다 운요가 수를 놓는다는 걸 아는 사람이 많은지라 오래 있어 봤자 소란만 일으킬 것 같아서요.”
“후우, 그것도 맞는 말이야.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것이 인심이니. 그건 그렇고, 물건은 다 챙겼어?”
그 말에 목운요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희가 마을을 떠난다는 걸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러니 챙길 것도 없어요. 내일 할머니만 모시고 가면 돼요. 사람들한테는 할머니 다리 치료하려 의원한테 간다고 둘러댈 거예요.”
“그래, 그렇구나. 이제 수중에 돈이 있으니 살림살이야 천천히 마련하면 되지.”
이 씨도 데리고 간다는 이야기에 양 씨는 영 마뜩잖았지만 남의 가정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저 상태로는 더 이상 사람을 괴롭히지 못할 테니 그저 밥만 먹여 주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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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언성에 간 목운요는 이 씨를 양 씨의 남편에게 맡기고 춘수방으로 향했다.
한편 약조한 두 달이 점점 다가오자, 총관은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오늘도 목운요가 오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하언촌에 가서 상황을 살펴보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한데 그때, 총관 앞에 목운요와 소청, 그리고 양 씨가 가게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쿠, 귀한 손님들이 오셨군요. 위로 올라가서 차나 한잔 마실까요?”
입이 귀에 걸린 총관이 서둘러 세 사람을 이층으로 안내했다.
세 사람이 오는 걸 기다리기라도 한 듯 찻물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목이 말랐던 양 씨가 차를 마시려다가 목운요의 당부가 떠올라 찻잔을 내려놨다.
총관은 관심이 온통 흰 면포에 싼 물건에 쏠려 있던 터라, 그 모습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아저씨, 금수산하도를 완성했으니 한번 봐주세요.”
그는 이미 탁자에 최고급 흰 비단을 깔아 두고 있었다. 소청과 양 씨가 금하산하도를 그 위로 조심스레 펼쳤다.
끊어질 듯 말 듯 구불구불 이어진 산등성이, 높은 곳에서 거침없이 떨어지는 한 줄기 폭포가 네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지조화라느니 신의 솜씨라느니 하는 뻔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로우면서도 기품이 넘쳐흘렀다.
머리카락 떨어지는 소리 하나 없을 만큼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오랜 침묵을 깨고 총관이 감탄을 토했다.
“그야말로 걸작이로군, 걸작이야! 실력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허허허!”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남은 만 냥은 준비해 두셨겠죠?”
“아무렴, 이미 준비해 놨지.”
총관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은표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대단한 실력을 묵혀야 한다니, 참으로 아쉽구먼.”
“가문의 비기(祕技)니까요. 설마 이걸 탐내시는 건 아니겠죠?”
목운요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어이쿠, 그런 말이 어딨어? 그냥 생각 없이 한 말이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렴.”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진 비위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인 법이었다.
“그럼 거래는 끝났어요. 그동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흰 이만 가 볼게요.”
“그래, 내가 배웅해 주지. 아니면 마차를 불러 주랴?”
“괜찮아요. 할머니를 의원한테 모셔다드려야 하니 저희가 알아서 갈게요.”
목운요는 총관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하곤, 여유롭게 춘수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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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를 세워 둔 곳으로 가자, 오작 유 씨가 보였다.
“아저씨,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다. 그보다 심부름 온 아이의 말에 누가 장난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정말 너일 줄이야……. 할머니를 의원한테 데려가려고 언성에 온 것이냐?”
“그것도 그렇고, 사실 아저씨한테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그래,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 말해 보거라.”
“저…… 지난번에 저희를 마차로 마을까지 데려다주셨는데, 한 번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좀 멀리 갈 예정인데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요.”
“먼 곳으로 간다고?”
목운요의 말에 유 씨는 잠시 멈칫했지만 목적지를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소개시켜 줄 테니 같이 가자꾸나.”
목운요는 재차 감사하다고 인사를 올렸다.
떠나기 전, 양 씨와 눈이 마주친 목운요가 그녀의 손을 살포시 맞잡았다.
“아주머니, 저희 대신 할머니를 잠시 부탁드릴게요.”
“걱정하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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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는 유 씨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그가 유 현령과 사촌지간인 터라 함부로 굴 수 없었던 것이다.
“조 씨(趙氏)는 어디 있나?”
“잠시만요. 조 씨! 유 씨 어르신이 오셨네!”
“어이쿠, 유 씨 어르신께서 어쩐 일로 소인을 다 찾으십니까?”
조 씨라고 불린 마부는 사오십 대로 보이는 중년 사내로, 머리가 희끗희끗했지만 활력이 넘쳐 보였다.
“할 일이 있네. 이 두 분은 내 오랜 친구의 식솔인데, 먼 곳에 갈 예정이라 자네가 모셔다드렸으면 하네.”
소청과 목운요를 살핀 사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예, 알겠습니다. 두 분, 처음 뵙습니다. 조 씨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조 씨는 손사래를 치더니 잽싸게 뒤뜰로 달려갔다. 얼마 뒤에 그가 마차에 몸을 싣고 나타났다.
목운요는 고개를 돌려 유 씨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어서 가거라. 부디 조심하고.”
“네!”
이내 마차가 성문으로 당도하자, 양 씨가 그곳에서 이 씨를 마차에 태웠다.
“두 사람, 부디 몸 성히 잘 지내고.”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형님도 부디 잘 지내세요.”
양 씨와 소청이 눈물을 흘리며 손을 맞잡았다.
“아주머니, 주변이 좀 잠잠해지면 돌아올게요. 빠르면 반년 안에 돌아올 수도 있어요. 그때, 맛있는 밥 해 주세요.”
“그래그래, 이 아줌마가 실컷 만들어 주마.”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한편 이 씨는 입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며 목이 쉬도록 울부짖었다.
“이 못된 것들,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게냐?”
그에 목운요의 눈빛이 싸늘해지더니, 방금 전 금수산하도를 감싸는 데 썼던 천으로 이 씨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양 씨가 깜짝 놀랐지만 더 이상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수중에 있던 보따리를 목운요에게 건넸다.
“네 말대로 산 것들이다. 이제 그만 가거라, 어서.”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이곤 소청을 마차에 태웠다.
“아저씨, 그만 가요.”
“이랴!”
히이힝, 힘찬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언성 남쪽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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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을 빠져나온 지 반 시진쯤 지났을 무렵, 마차가 갈림길에 멈춰 섰다.
“양 갈래 길이라오. 이쪽으로 가면 임강성(臨江城)이고, 저쪽으로 가면 동괴성(東魁城)인데, 어디로 가면 되겠소?”
그에 목운요는 마차의 휘장을 젖히곤 마차를 자신에게 팔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으응?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소저, 이 마차는 파는 게 아니라오.”
“마차랑 말 모두 시가로 치면 백 냥 정도 될 것 같은데, 제가 사백 냥 드릴게요. 이백 냥은 마차랑 말값이고, 나머지 이백 냥은 오작께 사례금이라고 전해 주세요. 어때요?”
이백 냥이라는 말에 조 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직 나이도 어려 보이고 걸친 옷도 신통치 않던데, 그런 큰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손에 가루약을 조용히 움켜쥔 목운요의 눈에 고개를 끄덕이는 조 씨의 모습이 보였다.
은표를 챙긴 조 씨는 말을 어떻게 몰아야 하는지 알려 준 뒤에 잽싸게 돌아갔다.
반면 이렇게 멀리 나온 것은 처음이라 소청은 덜컥 겁이 났다.
“요아야…….”
“겁내실 것 없어요. 여기서 임강성까지 반 시진 정도 걸린대요. 일단 성에 가서 앞으로 어찌할지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요.”
말을 마친 목운요가 마차 안으로 뛰어 들어가 양 씨가 준비해 준 보따리를 펼쳐 들고는, 남장(男裝)을 했다. 그런 뒤에 흙을 한 줌 쥐곤 제 얼굴에 덕지덕지 발랐다.
이내 앞자리에 올라앉은 그녀가 마차를 끌고 임강성을 향해 내달렸다.
겨울이라 길가에는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는 길 내내 두 사람은 애가 바짝 탔지만, 무사히 임강성에 당도할 수 있었다.
목운요는 인적이 드문 숲에서 마차를 세운 뒤 이 씨를 끌어내더니, 말의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경험 많은 말은 길을 잘 알고 있다고 하던데, 여긴 언성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혼자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자, 얼른 네 주인에게 돌아가렴.”
마차를 끌고 점점 멀어져 가는 말의 모습을 확인한 목운요가 살며시 숨을 돌렸다.
“요아야, 말을 왜 돌려보낸 거니?”
“강남까지는 길이 멀고 험해서 저희끼리 가기엔 너무 위험해요. 차라리 수로(水路)로 가는 편이 훨씬 빠르고 안전할 거예요.”
“아, 내 그걸 몰랐구나. 네가 있어서 든든하구나. 그런데 우리 둘이서 할머니를 제대로 모실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할머니, 보셨죠? 저희 둘이 할머니를 모시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니 여기서 좀 쉬고 계세요.”
“……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네 친할미다. 어찌 날 버, 버리고 간단 말이냐?”
이 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지금으로선 목운요와 소청 외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아야. 할머니를 두고 간다니, 대체 무슨…….”
“어머니, 제가 들려 드렸던 이야기 기억나세요? 제 다리가 부러진 건 모두 할머니 때문이에요. 게다가 그동안 할머니가 어머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해 보세요. 장가 놈이 어떤 작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저희를 팔려고 했어요. 그저 같은 피가 흐른다고 불쌍히 여길 필요가 있나요?”
그 말에 소청이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녀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