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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15화 (15/442)

15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아이고, 뭐가 그리 급해? 자고로 장사라는 건 말이지, 두부 자르듯이 딱딱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고. 사람한테 왜 입이 있겠어? 말로 하라는 거지, 말로…….”

그에 목운요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가 절 믿어 주셔서 십만 냥을 주겠다던 채월각의 제의도 거절했는데, 겨우 천 냥을 주시겠다고요? 세상 물정 모르는 촌뜨기 계집애라고 무시하시는 거예요?”

“채월각의 담가 놈은 목 소저가 상종할 부류가 못 돼. 십만 냥을 준다고 해서 그 작자가 정말 줄 것 같아? 일단 돈을 줬다가 사람을 시켜 빼앗아 가려고 할 거라고. 그땐 목 소저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도 다칠 수 있다는 걸 어찌 몰라?”

목운요의 기색이 조금 누그러지자 총관은 한숨을 돌렸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만 냥 주지! 필요한 물건은 내가 모두 대 주도록 하고. 어때?”

목운요는 입술을 질끈 물며, 춘수방이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고 되물었다.

도끼로 제 발 찍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총관은 오늘 뼈저리게 깨닫는 중이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야? 춘수방은 여태껏 신용 하나로 먹고살아 왔다고.”

여전히 머뭇거리는 목운요의 모습에 총관은 내심 겁이 났다. 식은땀에 온몸이 다 젖었다는 생각이 들 무렵, 목운요가 천천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춘수방의 명성이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 춘수방이 겨우 돈 몇 푼 때문에 오랫동안 지켜 온 명성을 버리진 않을 테니까요.”

“그, 그래!”

아무리 세상 물정에 밝다고 해도 어린애는 어린애일 뿐이라고 여겼건만, 그런 아이가 자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쥐고 흔드니 총관은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럼 만 냥이면 되겠니?”

“저희 같은 사람한테 만 냥은 큰돈이지만, 춘수방한테는 푼돈이잖아요. 게다가 이걸로 춘수방에서 원하는 걸 얻게 된다면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없으실 텐데요.”

“그러니까 네 말인즉……?”

총관은 난처한 듯 미간을 크게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난 일개 총관이라 그리 큰돈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는 없단다. 게다가 작업물이 다 나온 것도 아니니, 혹여 일이라도 그르친다면 나와 내 식솔들은 하루아침에 춘수방에서 쫓겨나게 될 거야. 그러니 이 정도에서 결론을 짓자꾸나.”

“절반 정도 완성됐어요. 지금 한 것까지 만 냥 주시고, 작품이 다 완성되면 만 냥을 더 주세요. 어때요?”

총관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표정을 가다듬었다.

“후우, 나도 힘든 게 한두 가지가 아니…….”

“큰일을 하려면 작은 일에 얽매이지 마셔야죠. 춘수방을 관장하는 총관 어르신께서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목운요가 고개를 좌우로 내젓자, 총관이 다급한 목소리로 알겠다고 답했다. 이야기가 길어져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만 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물건을 샀으니 그로서는 돈방석에 앉을 날만 남은 셈이었다.

“이렇게 됐으니 더 이상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증서를 쓰는 게 어떨까?”

“좋아요. 그래야 밤잠 설칠 일이 없을 테니까요.”

총관은 사람을 시켜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한 뒤,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소저, 이 증서는…….”

시골뜨기 계집애가 글을 알아보려나?

하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목운요가 붓을 쥐고 잽싸게 손을 놀렸다. 흰 종이 위로 반듯한 소혜체(小楷體)가 떠오르자, 총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이 아이한테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로써 계약이 성사됐다.

* * *

춘수방을 나온 양 씨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마차로 돌아가는 내내 목운요 곁에 바짝 붙어서 주변을 살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행인들도 죄다 수상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목운요의 손에는 만 냥이라는 거금이 들려 있었다. 만 냥, 만 냥이라니…….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언성을 무사히 빠져나오고서야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은 거리를 지나오는 동안 양 씨의 옷이 식은땀에 젖어 축축해져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당장이라도 까무러칠 것 같구나. 그리 많은 돈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양 씨가 가슴을 연신 쓸어내리자, 목운요가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걱정스러워하는 양 씨를 보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자고로 돈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다. 양 씨가 갑자기 다른 마음을 품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사실 언성에 가기 전 어머니에게 양 씨를 데리고 갈지를 물었다. 그에 어머니는 양 씨는 믿어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니 어머니의 안목이 맞는 것 같았다.

“옷차림 때문에 우리한테 큰돈이 있을 거라고 사람들은 짐작도 못 할 거예요.”

“그런 말 하지 말렴. 사람 마음보다 간사한 게 또 어디 있다고?”

“네, 그러네요.”

작게 미소 지은 목운요가 양 씨에게 백 냥짜리 은표(銀票) 두 장을 건넸다.

“아주머니, 그동안 저희 어머니의 벗이 되어 주셔서 감사했어요. 이건 어머니의 성의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 주세요.”

“우리 사이에 이런 게 다 뭐야? 나나 네 어머니나, 시어머니한테 모진 구박을 받았단다. 나는 불행 중 다행으로 시어머니가 빨리 세상을 뜨는 바람에 편하게 지냈지. 그래도 네 어머니가 구박을 당할 때마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돈이 좋긴 좋아. 하지만 이 돈을 받는다면 내 자신한테 부끄러울 것 같구나.”

그 말에 목운요는 추레한 차림의 양 씨에게 절로 존경심이 들었다. 가난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촌부(村婦)가 소씨 가문에서 봤던 여인들보다 아름답고 우아해 보였다.

“아주머니, 그래도 성의는 받아 주세요. 급히 쓸 일이 있거든 이걸로 쓰시고, 아니면 잘 보관해 두셨다가 나중에 저희가 돌아왔을 때 주세요.”

“돌아오다니? 어딜 가려는 거니?”

“아직 생각 중이긴 한데, 춘수방에 물건을 넘기고 난 뒤에 떠날 생각이에요.”

“그렇구나……. 지금 세상이 태평하다고는 하나 그것이야 알 수 없는 것이니. 그래서 어디로 가려는 게야?”

“아마 강남으로 갈 것 같아요.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요.”

“그래, 잘 생각해서 결정하려무나.”

집안의 기둥을 잃은 모녀는 가장 만만한 상대였다. 간신히 이 씨의 마수에서 풀려난 모녀에게 또다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결국 한참의 설득 끝에 양 씨가 은표를 받아 들었다.

양 씨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형형색색의 자수 실을 쥔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만 냥. 그 돈이라면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강남에 가서도 남부럽지 않게 편안히 지낼 수 있을 터.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녀에게 소씨 가문은 지울 수 없는 시린 상처였다. 그들에게 맞서려면 갈 길이 구만리였다.

목운요는 반드시 그들을 제 발밑에 두고 철저히 짓밟아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금수산하도가 첫 단추가 될 것이다.

회귀 전 춘수방은 각지로 세력을 키워 나갔다. 평범한 포목점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목운요 역시 진왕의 첩이 된 후에야 춘수방 뒤에 소씨 가문과 맹씨(孟氏) 가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가문이 진왕에게 줄을 댄 이래, 춘수방은 자연스레 그의 돈줄이 되었다.

진왕이 훗날 세력을 키워 단번에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춘수방에서 나온 돈 덕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춘수방을 집어삼킨다면 소씨 가문은 물론, 진왕 역시 비빌 언덕이 사라지게 될 터.

하나 지금의 목운요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세워 둔 계획은 있으나 그 계획이 성사될지 말지는 하늘에 달린 셈이었다.

* * *

장 씨가 사람을 죽인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민심이 폭발했다. 진노한 황실에서 장영안을 당장 처형시키라는 명을 내리자, 피해자의 식솔들은 궁 벽 밖에서 연신 절하며 황은을 칭송했다.

이번 사건을 담당한 유 현령에게는 천자께서 직접 선물을 하사하였다. 승진된 건 아니었지만 그날이 멀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어린 손녀가 악독한 할머니한테 모진 구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목운요는 기회를 봐서 오작 유 씨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모녀의 이름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그가 중간에서 큰 힘을 썼을 것이다.

“요아야,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니?”

“아, 아니에요. 얼마 뒤면 강남의 절경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제가 마음이 들떴나 봐요.”

“하지만 네 할머니는…….”

“모시고 가면 되죠.”

당연히 데려가야 한다. 지금의 목운요는 효심 지극한 손녀이니, 사람들한테 책잡힐 만한 일이 있어선 안 되었다. 일단 데리고 가서 어딘가에 던져 버리면 될 터.

“그래, 역시 그게 좋겠구나.”

“어머니는 어떤 의복을 좋아하세요? 돈이 있으니 어머니 입고 싶은 것 제가 몽땅 사 드릴게요.”

“난 너만 있으면 된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소청은 지금 이대로가 좋았다. 자신의 아이를 지키며 평화롭게 보낼 수 있는 나날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목운요가 더욱 살갑게 굴었다.

“어머니, 요아 어깨 아파요. 좀 주물러 주세요.”

“그래그래, 내가 주물러 주마.”

소청의 품에 기대자 기분 좋은 손길이 어깨를 주물렀다. 서서히 잠이 든 목운요의 입가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 *

흥성루 안, 상처가 거의 나은 월왕이 홑옷을 걸치고 나왔다. 소나무처럼 늘씬하고 쭉 뻗은 그의 입에서 겨울밤보다 차가운 숨결이 내뱉어졌다.

“비수를 갖고 왔다고?”

“예, 주인님. 평소 지니고 계시던 것과 똑같았습니다. 다만 옆에 새겨 두셨던 무늬가 지워져 있었습니다.”

비수에는 월왕이 무료할 때 새겨 두었던 무늬가 있었다. 불순한 의도를 지닌 자의 손에 들어갔다면 평지풍파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하언촌으로 간다.”

“주인님, 월서에서 속히 돌아와 달라는 서신이 당도했습니다.”

그 말에 월왕의 미간이 구겨지더니 짜증스러운 빛이 가득 찼다. 빚진 만큼 되돌려 주는 게 그의 신조였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주인님, 두 달 후면 황상의 탄신일이니 이곳에 다시 오시게 될 겁니다. 그때 가서 빚을 갚아도 됩니다.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하루속히 돌아가십시오.”

우항의 권유에 월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 뒤엔 그 맹랑한 계집애를 반드시 손봐 주겠노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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