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사람을 죽이다!
그때 침상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귀신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두 눈 가득 겁을 집어먹은 이 씨의 모습이 보였다.
“네, 네년이…… 사람을 죽이다니…….”
“네, 제가 사람을 죽였어요.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죄다 몰려들도록 할머니가 소리를 치실 차례예요.”
“아, 아니다. 아무 소리 하지 않으마. 그러니 제발, 제발 목숨만은 살려다오!”
“제 몸에 할머니의 피도 흐르고 있는데 제가 어찌 할머니를 해치겠어요? 그러니 얼른 소리를 지르세요. 빨리요. 크면 클수록 좋아요.”
“아, 아니, 나, 나는…….”
어찌나 놀랐는지 이 씨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에 목운요는 눈썹을 찌푸리며 비수를 이 씨의 목덜미에 들이댔다.
“소리 지르라고!”
“사, 사람이 죽었소. 여기 사람이 죽었소!”
이 씨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소리쳤다. 한밤중에 울려 퍼진 비명에 마을 사람들은 죄다 잠에서 깨고 말았다.
* * *
잠시 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 씨는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안으로 들이닥치면 목운요는 그야말로 죽은 목숨일 터.
지난 며칠 동안 이러저러한 일을 겪으며, 이 씨는 목운요를 더 이상 한낱 어린 계집애로 볼 수 없었다. 악귀라도 씌었는지 새카만 눈동자를 볼 때면 차가운 얼음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한시름 놔도 될 것이다. 저년이 사람을 죽였으니 이제 죽을 사람은 다름 아닌 저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이 씨는 다리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 문가를 바라보던 목운요가 비수를 꽉 움켜쥐더니 자신의 팔뚝을 홱 그었다. 피가 주르륵 흐르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핏자국을 장영안의 손에 칠했다. 그런 뒤에 피가 묻은 비수를 장영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년, 무슨 짓거리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씨의 털끝이 쭈뼛하고 일어섰다.
이 씨 앞으로 다가간 목운요는 옷섶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어느 때고 여인에게는 정절이 가장 소중한 법이라죠? 어머니를 더럽다며 항상 멸시하시곤 했는데, 그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오늘은 할머니가 느껴 보실 차례네요.”
이내 겁에 질린 이 씨의 눈동자에 힘껏 날아드는 홍두깨가 비쳤다.
* * *
마을 사람들이 문가에서 서성거리는 사이, 대문 사이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목운요가 튀어나왔다.
“어이쿠, 깜짝이야! 운요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양 씨가 재빨리 목운요를 부축했다.
“아, 아주머니. 사람…… 사람이 죽었…….”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목운요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허겁지겁 정원을 지나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무척이나 참혹했다.
“사람이 죽었소!”
“이, 이를 어쩌지? 관부에 알려야 하나?”
“가서 이장, 이장을 불러와. 어서!”
이장 양명(楊鳴)은 소식을 듣고 냉큼 달려왔다. 환갑을 넘긴 그는 일찍이 군대에 들어가, 높다랗게 쌓인 시체들의 산도 기어오른 몸이었다.
끔찍한 현장에 양명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였으나 다른 사람들처럼 혼비백산할 정도는 아니었다.
“주예(周睿), 주기(周琦)! 너흰 가서 사람들을 몇 명 더 데려오너라. 그리고 밤을 새워서라도 언성에 가서 현령 대인께 마을에 살인 사건이 났다고 말씀드려라.”
“예,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목성의 식솔들은?”
목운요를 부축하고 있던 양 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는 여기 있어요. 한데 온통 피투성이예요. 팔뚝을 크게 다쳐서 어서 치료해야 해요.”
“목성의 어미와 처도 모두 여기 살고 있지 않던가? 어이, 자네! 다른 방에 가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보게.”
“아, 예, 예…….”
이장에게 지목당한 손 씨(孫氏)는 차마 혼자서는 갈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한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옆방의 문을 열었다. 다행히 소청이 방 안에서 단잠에 빠져 있었다.
“소청, 소청……!”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잠에서 깨어난 소청은 크게 놀랐다.
“누, 누구세요?”
“겁낼 것 없어. 나야 나, 손 씨. 어서 본채로 가 봐. 자네 집에 큰일이 생긴 것 같으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요아, 요아는요?”
딸이 누웠던 자리가 차갑게 식은 걸 깨달은 소청이 의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양 씨에게 팔을 치료받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에 소청은 크게 놀랐다.
“요아, 요아야, 어떻게 된 거니? 네, 네 몰골이 어쩌다…….”
“걱정할 것 없어. 팔을 좀 다치긴 했지만 아이는 무사하니. 일이 난 건 자네 시어머니지…….”
본채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옷차림이 흐트러진 이 씨의 모습이 마을 사람들 앞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바닥에는 정신을 잃은 사내와 숨통이 끊긴 사내도 함께였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어찌 된 일인지 온갖 추측을 쏟아 냈다.
* * *
언성 성문은 일찌감치 닫힌 상태였으나,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났다는 이야기에 누군가가 현령(縣令) 대감을 모셔 오라고 소리쳤다.
반 시진이 지났을 무렵, 성문이 열리며 세 명의 관차(官差, 관아에서 파견하는 관리)와 오작(仵作, 수령이 시신을 검사할 때 시신을 주워 맞추는 일을 하는 하인) 한 명이 마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들은 사건이 난 곳을 자세히 물은 후 하언촌으로 냅다 달려갔다.
주예와 주기는 마차를 바짝 뒤따라가며 하언촌에 도착했다. 피곤해서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지만 이 씨의 집까지 안내한 후에야 길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 * *
힘이 과하게 들어간 탓인지 말소리가 요란한데도 이 씨는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날이 서서히 밝아 올 무렵에야 이 씨는 서서히 정신이 차릴 수 있었다.
어둑어둑한 등불 아래, 방 안 가득 낯선 얼굴이 보였다. 이 씨는 귀신이 방 안에 들이닥쳤다는 생각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악! 사, 살려 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살인 사건이 난 터라 모두가 차분히 현장을 지키고 있던 상황에서 이 씨가 냅다 소리를 지르니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 씨,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이 씨를 향해 이장 양명이 다급히 물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이 씨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이, 이장, 목운요 저년이 사람을 죽였소.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네. 저년한테 귀신이 씐 게 분명하니 당장 저년을 태워 죽어야 해!”
“이 씨는 사람이 어찌 그리 모질어? 운요는 고작 열세 살 먹은 계집아이인데, 장정 둘을 어찌 죽인단 말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아주머니가 평소에 며느리랑 손녀를 마뜩잖게 여긴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죠.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주변의 반응에 이 씨는 애가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어찌 내 말을 못 믿는 게야? 내 다리도 저년이 부러뜨린 거고, 집에 난 불도 저년이 지른 거라고. 제발 내 말을 믿어 줘, 믿어 달라고!”
“할머니…….”
소청의 품에 안겨 있던 목운요는 이 씨의 말을 듣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제가 왜 그런 짓을……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이년…….”
목운요와 시선을 마주친 이 씨는 등골이 오싹해져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혹시나 하던 일말의 의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씨가 목운요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건 마음에 켕기는 것이 있다는 뜻이 분명했다.
한편 소청은 목운요의 손을 쥐고 또 쥐었다.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이 입 밖으로 당장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번 일이 제 딸과 관련되었으리라고 그녀는 넌지시 짐작했다.
하지만 이 사달이 난 건 요아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이 씨가 궁지에 몰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길 리 없었다. 요아는 효심 바르고 착한 아이였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그렇게 모두가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을 이어 나가던 그때였다.
“관차 납시오!”
소청의 품에 안겨 있던 목운요의 눈빛이 은은히 반짝거렸다.
잔뜩 기가 죽어 있던 이 씨는 관차의 등장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관차 나리, 저년이 죽인 것입니다! 목운요 저년이 사람을 죽였으니 당장 잡아가십시오, 당장!”
“모두 정숙하시오!”
언성은 작은 마을이었다. 사람 목숨과 관련된 사건은 일 년에도 채 몇 건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상태에서 사건 현장이 온통 피범벅인 걸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목청 터져라 소리를 질러 대는 이 씨를 보니 왈칵하고 역정부터 났다.
“나리, 소인은 이장인 양명이라 합니다. 한밤중에 사람이 죽었다는 비명을 듣고 와 보니 이 씨의 손녀인 목운요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집 밖으로 달려 나오는 걸 봤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장 씨와 그의 총관인 정산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엇! 장 씨가 움직였잖아. 죽지 않았나 본데?”
정산이 죽은 것을 확인한 마을 사람들은 온몸이 피로 물든 장 씨 역시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저 정신을 잃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개를 들자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자, 놀란 장영안의 손에서 비수가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수를 발견한 관차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 비수는 어디서 난 것이냐?”
“엇? 저, 저도 모릅니다…….”
그 순간, 목운요가 놀란 듯 울음을 터뜨렸다.
“흐흑, 어머니! 장 씨가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저 칼에 하마터면 제 손이 잘릴 뻔했어요!”
관차는 목운요의 이야기를 듣고는 장영안을 포승줄로 결박하라고 명했다.
“아, 아닙니다! 전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소청, 소청이 절 꾀어냈습니다. 한밤중에 만나고 싶다고 연락해 왔기에 와 봤더니, 목운요 저년이 있었습니다. 소인이 미처 손 쓸 새도 없이 절 기절시키곤…… 소인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장 씨의 입에서 소청이 튀어나오자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