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8화 (8/442)

8화 피 묻은 두 손

“이년…… 뭘 하려고!”

이 씨가 날카롭게 외쳤지만, 허세를 부리는 게 분명했다.

“걱정 마세요. 장 씨 쪽을 아직 손보지 못했으니 지금은 죽이지 않을 테니까.”

이 씨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소청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재수 없는 년, 딸년을 저리 가르쳐?!”

그 말에 목운요는 화들짝 놀라 소청을 바라보았다. 이 씨에 대한 증오가 가득한 탓에 어머니가 옆에 있다는 걸 잠시 잊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목운요의 떨리는 눈빛을 마주한 소청은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요아는 심성이 고운 아이예요. 지금 상황은 어머니께서 자초하신 거고요. 요아야, 무서워 마라. 네가 뭘 하든 어미는 널 믿는단다.”

소청의 품에 안긴 목운요가 가볍게 뺨을 비볐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감싸 주듯 어머니의 품은 무척이나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어머니, 어머니가 계셔서 참 좋아요.”

“녀석도…….”

* * *

한편 양 씨가 울면서 이 씨의 집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내 진상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 씨의 악행에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세 지긋한 동네 노인 중에서 고약한 심보를 가진 이가 없었으나, 이 씨만은 예외였다.

* * *

그 시각, 장영안(張永安)은 몸이 달아서 침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소청와 목운요를 데려가기로 이 씨와 일찌감치 이야기를 끝낸 차였다.

그런데 일어나 보니 목 씨 집에 불이 난 것도 모자라 이 씨는 다리마저 부러진 게 아닌가! 이러다간 자신의 계획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초조한 마음을 숨기기 어려웠다.

불안한 마음에 왔다 갔다 하며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자니, 손에 종잇조각을 쥔 총관 정산(丁山)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리, 이것 좀 보십시오.”

“오늘 밤 자시(子时, 밤 열한 시부터 오전 한 시), 낙관(落款)은 계임(桂荏)……. 계임이 무슨 뜻이지?”

장영안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계임이면, 차조기(蘇葉, 들깨와 닮은 식물)인데……. 앗, 차조기라면 소 씨를 가리키는 게 아니겠습니까? 차조기를 계임, 또는 소엽이라고 부르죠! 나리, 이 쪽지는 소청 낭자가 보낸 게 분명합니다!”

소청의 이름에 장영안이 헤벌쭉 웃음을 터뜨렸다.

“오오, 그런 것이구나. 그런 것이야!”

소청의 가녀린 모습을 떠올리며 장영안은 입맛을 다시는 듯 쩝쩝거렸다. 게다가 목운요, 그 계집은 또 어떻고? 야들야들하고 뽀얀 살결하며…….

“그래, 자시로구나. 어서 가장 비싼 의복을 내다오. 내 오늘 천복을 누리겠구나, 흐흐흐!”

* * *

목운요는 약재를 곱게 갈아 손수건에 조심스레 담았다.

“요아야, 뭐 하는 거니?”

바닥에는 처음 보는 약초가 잔뜩 늘어서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어머니, 저 배고파요. 먹을 것 좀 해 주세요.”

목운요가 몸을 돌려 소청의 허리를 껴안으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그래, 지금 만들어 주마.”

그때 온몸에 열이 펄펄 끓는지 이 씨가 끙끙거리며 입술을 핥았다.

“소청, 물을 다오!”

이에 따뜻한 물을 떠 온 소청이 이 씨에게 물그릇을 건네려고 하자, 목운요가 중간에서 잽싸게 낚아챘다.

“제가 목마른 건 어찌 아셨어요? 어머니, 얼른 가서 밥해 주세요. 저 배고파요.”

“이년, 네 할미가 목말라 죽는 꼴을 보려는 게냐?”

“마시고 싶으면 스스로 떠다 마셔!”

목운요는 뼈에 사무치는 증오를 이 씨를 향해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이 씨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가 그리 비참하게 돌아가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씨는 다리가 부러진 자신이 아무리 간청해도 물 한 방울 떠다 주지 않았다. 간혹 밥을 줄 때도 일부러 먼 곳에 먹을 것을 놓아두곤, 제가 개처럼 기어가는 모습을 보며 꼴좋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아직도 자신의 귓가에 생생히 맴도는 것 같았다.

“이년…….”

욕을 퍼부으려던 이 씨는 날카로운 목운요의 눈길에 움찔하며 말을 삼켰다.

그 모습에 목운요가 냉소를 지었다. 이 씨 같은 사람을 상대하려면 그보다 더 독하게 굴어야 한다. 손에 든 가루약을 정성껏 비비는 목운요의 눈빛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해져 있었다.

약초의 효능에 대해선 진왕부에 들어간 후 독 낭자(毒娘子)한테서 배운 것이었다. 독 낭자는 진왕부에 문객으로 드나드는 유일한 여인으로 가끔씩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는데, 그 노래 가사가 지금 자신의 심경과 딱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에 목운요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임에게 한 잔 술 권하니, 강 같은 시름을 쭉 들이마시네.

임을 향해 방긋 웃으니, 빙그레 웃는 모양은 부드러운 칼이로구나.

얼굴 가득 미소 지으며 눈물 흘리니, 야밤에 임을 황천에 보내 드리리.

임이여, 황천에 가거든 원망하지 마소서. 그대 뒤로 허연 백골이 산처럼 쌓였으니.

지난날의 원한을 이제 갚으니, 억울한 혼백이여- 한밤중에 웃지 마시오…….”

오늘 밤, 목운요는 ‘임’을 황천에 보내 드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 * *

소청이 채소를 조금 데우고 밀전병을 구워 왔다. 채소와 거친 반죽의 떡이 얼마나 맛있겠느냐마는, 목운요는 맛나게 먹었다.

지금 같은 기분이라면 소청이 모래가 섞인 밥을 내준다고 해도 한 그릇 깨끗이 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 다 드셨으면 따뜻한 물 한 잔 드시고 주무세요.”

환하게 밝아진 방 안에서 목운요가 따뜻한 물이 담긴 그릇을 건넸다. 그 불빛 아래서도 물이 유난히 누렇게 보였다.

한 모금 마시니 그 맛 또한 평소 마시던 물과 달랐다.

“요아야, 이 물은…….”

“푹 주무시라고 약재를 좀 넣어 봤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그 말에 소청은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운요와 함께 베개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졌다.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난 목운요가 낑낑거리며 소청을 업고 서쪽 방으로 향했다.

간신히 소청을 옮긴 그녀가 숨을 크게 헐떡거렸다. 지금의 몸은 확실히 너무 약했다.

이불을 편 목운요는 그 위에 소청을 잘 눕힌 후 아궁이에 불을 지펴 온기가 도는지 확인했다. 그런 뒤에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본채로 돌아가 장 씨가 오기를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자 간혹 개 짖는 소리 말곤 마을 전체가 쥐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이 씨의 집을 향해 다가왔다.

* * *

문어귀에 선 장영안은 손에 부채를 쥐고 있었다. 체통을 지키려고, 언성(郾城)에서 제법 고상하다고 불리는 이한테 특별히 전수받은 비법이었다.

총관 정산이 문을 슬쩍 밀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장영안이 히죽거리며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소청이 수절을 맹세한 열녀인 줄 알았건만, 지금 보니 남녀상열지사에도 꽤나 밝은가 보다!

고요한 정원 안, 희미한 등불은 본채에서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영안은 정산에게 여기서 기다리라는 눈짓을 보낸 뒤, 본채 문을 살짝 두드렸다.

“후후, 낭자의 초대를 받고 왔소이다.”

등불 아래, 목운요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얼굴 위로 그림자가 생길 만큼 그녀의 눈썹은 길고 풍성했다.

“들어오셔요.”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온 장영안의 눈앞에 목운요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장영안이 더욱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호오, 날 초대한 게 따님이셨구려.”

얼굴에 든 멍 자국을 빼느라 목운요는 낮 동안 열심히 달걀을 굴려야 했다. 덕분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를 정도로 멍 자국은 거의 다 사라져 있었다.

깨진 그릇으로 낸 상처가 남긴 했지만, 이는 그녀의 미모를 깎아내리기는커녕 오히려 처량한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 효과를 냈다.

아련한 등불 아래 촉촉이 젖은 눈동자,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가녀린 자태. 삼혼칠백(三魂七魄)을 절로 앗아 갈 만큼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장영안은 그런 목운요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눈을 깜빡거리는 아주 잠시라도 그 모습을 놓치는 게 원통할 지경이었다.

“오늘따라 멋지게 차려입으셨네요.”

관에 입고 들어가기에 딱 맞는 수의(壽衣)로군!

“흐흐, 이 의복이 마음에 든다면 내 날마다 입어 주겠네.”

점차 다가오는 장영안을 향해 목운요가 한쪽에 놓아두었던 손수건을 던졌다.

“후후, 어디서 장난을, 으윽…….”

얼굴을 덮은 손수건을 집어 내리며 장영안이 웃음을 터뜨리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이 굳고 말았다.

그 순간 목운요가 재빨리 몸을 일으키더니 탁자 아래서 홍두깨를 꺼내 장 씨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퍼억-!

아무리 그녀에게 힘이 없다고 해도 불시에 일격을, 그것도 제대로 맞은 터라 장영안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그때 문 앞에 서 있던 총관 정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 날 법한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총관님, 장 씨 어르신께서 갑자기 혼절하셨어요. 얼른 들어와서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목운요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어머니를 욕보인 자들 중엔 정산도 있었다. 그러니 놈도 죽여야 한다!

놀란 정산이 허겁지겁 방문을 열자, 귓가에 ‘쉬익’ 하는 바람 소리가 났다. 정산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홍두깨를 잡아채곤 목운요를 향해 발을 날렸다.

그에 목운요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서 손수건을 정산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정산은 약 냄새를 맡는 순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머리 위로 홍두깨가 힘껏 내리꽂혔다.

퍽!

“네, 네 이년…….”

한낱 시골 촌뜨기 계집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정산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그를 목운요는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홍두깨를 휘둘렀다. 정산은 비틀거리다가 결국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홍두깨를 아무렇게나 던져둔 목운요가 비수를 꺼냈다. 지난번 월왕을 치료할 때 빌렸던 비수였다. 목운요는 천천히 다가가 정산의 심장을 향해 힘껏 비수를 찔러 넣었다!

푹-!

“역시 좋긴 좋네.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숨통을 끊을 수 있다니.”

피로 물든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던 목운요의 동공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평소처럼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피를 바쳐야만 제대로 살아갈 팔자라면, 원수의 피로 그 길을 닦는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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