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갚지 못한 빚
목운요 역시 그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재빨리 사방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곳의 냇물은 항상 따뜻하니 분명 살아 있는 약초가 있을 것이다.
다행히 몇 걸음 가지 않아 찾으려던 약초가 보이자 냉큼 뽑아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었다.
“다치신 곳이 어디입니까?”
잡초가 높이 자란 터라 피비린내만 날 뿐 상처가 어디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목운요를 차갑게 바라보던 월왕이 한참 만에 입을 뗐다.
“가슴이다.”
잡초를 젖힌 목운요의 눈이 커졌다. 월왕이 걸친 은빛 홑옷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송구하다는 말과 함께 목운요는 재빨리 월왕의 옷을 벗겨 냈다. 상처를 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상처가 깊은 데다 피 또한 붉다 못해 시커먼 것이, 자칫 제대로 처치하지 못한다면 목숨을 내놔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실 조정에서 월왕의 지위는 무척 ‘애매’했다. 위황후(韋皇后)의 적장자이니 본디 그 지위라는 것이 지엄할진대, 위황후가 황자를 독살하는 죄를 지은 탓이다.
비록 황후 자리에서 쫓겨나지는 않았으나 냉궁(冷宮, 죄를 지은 황족들을 유폐하는 일종의 감옥 같은 공간)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냉궁에서 월왕을 낳은 후, 피가 멈추지 않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결국 황제로부터 총애를 받지 못한 월왕은 열네 살이 되기 전까지 줄곧 냉궁에서만 지냈다. 열네 살이 된 해 왕으로 봉해졌으나, 춥고 거칠기로 유명한 월서(粤西)를 봉지(封地, 하사받은 영지)로 받고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목운요가 기억한 대로라면 월왕은 삼 년 후에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왜 지금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도 상처를 치료하는 손은 거침이 없었다. 항시 지니고 다니는 천을 물에 듬뿍 적신 후 핏자국을 깨끗이 닦아 냈다. 하나 이 상처는…….
“저기…… 비수(匕首, 날이 예리한 짧은 칼)를 써야 할 것 같아요.”
목운요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월왕이 자신에게 경계를 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그의 심기라도 틀어진다면 제 목이 달아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상처 주변에 오물이 잔뜩 묻었어요. 게다가 상처에 독이 있는 것 같은데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지혈제를 써도 별 소용이 없을 거예요.”
이에 월왕이 비수를 건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이 상대의 가녀린 목덜미에 머물렀다. 삐쩍 마르고 여린 소녀다. 저 새하얀 목덜미를 한 손으로 누른다 해도 별 어려움 없이 숨통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목운요는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짐승이 제 목덜미를 노리고 있는 듯한 기분에 그녀의 가슴이 세차게 두방망이질 쳤다.
이내 비수를 건네받은 목운요가 월왕의 가슴께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참으세요, 아플 거예요.”
월왕은 개의치 않는 듯 목운요의 얼굴로 보다가 다시금 그녀의 목덜미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 시퍼런 멍 자국과 둔기로 긁힌 듯한 상처가 잔뜩 있어 원래 생김새가 어떤지 거의 알아볼 수 없었으나, 티 하나 없이 새하얀 목덜미는 유독 고왔다.
그 시선을 받으며 그녀가 밭은 숨을 살포시 내쉬더니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월왕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한편 목운요는 상처가 난 곳에서 선홍색 핏물이 흘러나온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약초를 씹은 뒤 상처 위에 발랐다.
“됐어요, 이제…….”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덜미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차가운 손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월왕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손 아래의 촉감을 느꼈다. 예상대로 연옥(軟玉)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코를 대면 그윽한 향기도 날 듯했다. 엄지손가락으로 목덜미에 드리워진 홍조를 슬쩍 문지르자,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몸을 간신히 움직이며 목운요가 입을 열었다.
“목숨을 구해 드렸으니 저를 죽이지 않으실 거죠?”
그의 눈빛이 일순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손에 슬쩍 힘을 주자, 상대의 눈이 쟁반만 하게 커지는 게 보였다. 촉촉한 눈동자는 계곡물보다도 맑고 깨끗했다.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처럼, 상대는 작은 충격에도 깨질 듯 가녀려 보였다.
손을 거둔 영월군의 눈에 그녀의 목에 걸린 붉은 줄이 보였다. 그 줄을 툭 끊어 낸 영월군이 제 손바닥 안에 꽉 움켜쥐었다.
“빚을 졌으니 갚으마.”
영월군에게서 느껴지던 살기가 사라지자, 조심스레 뒤로 물러난 목운요는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는 말과 함께 광주리를 등에 진 채 재빨리 달아났다. 손에는 그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썼던 비수를 쥔 채…….
뱀은 찾지 못했지만 이 비수라면 뱀보다도 쓸모 있을 터였다.
삼십 분 만에 산에서 내려온 목운요는 마을이 보이자, 비로소 발걸음을 멈추곤 거친 숨을 진정시켰다. 그러곤 이마에 난 땀방울을 닦으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마을로 들어갔다.
지금의 목운요는 죽는 게 그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그녀에게는 지켜 드려야 할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갚지 못한 빚도 있고, 이루지 못한 꿈도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 기필코.
월왕이 눈빛을 거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위(侍衛, 호위 무사) 두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전하를 뵈옵니다. 속히 오지 못한 죄를 달게 받겠나이다.”
월왕은 고개를 숙인 채 손에 쥔 붉은 끈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알록달록한 실이 초승달 모양으로 감겨 있고, 그 아래에 은방울 두 개가 달려 있었는데 살짝 움직일 때마다 영롱한 소리를 냈다.
“하언촌을 뒤져라.”
감히 내 비수를 가져가다니, 간이 부었군.
“예!”
* * *
“아이고, 운요야. 대체 뭐 하다 온 거니?”
흠뻑 적은 목운요의 치맛자락에 이웃인 양 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겨울에 물놀이가 웬 말인가?
“할머니의 상처가 깊어 의원을 불러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상처를 치료할 약초를 찾아 산에 올라갔었어요.”
목운요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따뜻한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가면 푸릇푸릇한 약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네요.”
“하여간 착하기도 하지. 네 할머니는 어찌 이런 복덩이를 못 알아보고, 쯧쯧. 자, 내가 같이 가 주마. 너랑 네 어머니 둘이서 노친네를 옮기지 못할 테니.”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그렇게 문어귀에 들어서자 이 씨의 욕설이 들려왔다.
“더러운 것, 지독한 것, 천벌을 받아도 싼 것! 물을 먹여 주겠다고 하고선 내게 물을 끼얹어?! 쓸데라고는 쥐똥 대가리만큼도 없는 것, 너 같은 건 불에 타 죽었어야 했는데. 그 허연 얼굴을 불에 지져야 사내를 꼬시는 허튼 짓거리를 하지 못했을 텐데! 성아, 네가 일찍 죽는 바람에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괄시를 받는구나……!”
집으로 허겁지겁 들어가니, 이 씨가 소청을 붙잡고 화풀이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소청의 손목에 시커먼 멍이 든 걸 본 목운요는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양 씨가 빠르게 달려가 이 씨의 손을 뿌리치며, 반쯤 넋이 나간 소청을 향해 소리쳤다.
“저리 괴롭히는데도 어째 도망가지 않는 거야? 다리를 다쳐 드러누워 있으니 쫓아갈 수도 없을 텐데!”
“아주머니, 하지만…….”
소청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 모습에 이 씨는 악에 받친 듯 점점 더 심한 욕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왜 남의 집안일에 감 놔라 배 놔라 간섭이야, 간섭이?! 소청, 네년이랑 붙어먹은 놈팡이랑 손발이 짝짝 잘 맞나 보구나? 사람들 앞에서 날 못된 시어머니로 몰고 가고. 하여간 재주도 좋지, 재주도 좋아!”
보다 못한 양 씨가 이 씨의 뺨을 후려쳤다.
짝!
“아무리 며느리가 밉다고 해도 할 말이 따로 있지, 어찌 그런 막말을 한답니까!”
“오지랖을 떨어도 정도껏 떨라고! 내 며느리 내가 알아서 한다는데 왜 자꾸 참견질이야? 자네는 손자 하나 못 낳는 며느리가 좋다는 거야? 닭도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알을 쑥쑥 낳는데 말이야. 하여간 쓸모도 없는 게 재수까지 없어, 퉷!”
양 씨는 시집온 지 십 년이 넘도록 자식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그녀에게 이 씨가 일부러 자식 이야기를 꺼내자, 양 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에 목운요가 재빨리 양 씨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주머니…… 죄송해요. 일단 집으로 돌아가세요.”
양 씨의 입술이 부들거리더니 한참 뒤에야 간신히 진정한 듯 입을 열었다.
“운요, 그리고 소청. 무조건 참는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걸 두 사람도 명심해. 비록 가정사이긴 하지만 이장(里長)이라면 바른말 정도는 해 줄 테니까.”
그러자 목운요가 입술을 깨물며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생전에 집안의 허물은 밖에 드러내는 게 아니라 하셔서…….”
애써 참는 듯한 모습에 양 씨는 마음이 더욱 아파 왔다.
“쯧쯧…… 운요야. 일단 들어가서 옷이나 갈아입으려무나. 그러다가 고뿔에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앗,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양 씨가 떠나자, 잔뜩 주눅 들었던 목운요가 이 씨를 비딱하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 걸핏하면 사람 괴롭히는 버릇을 고칠 때가 된 거 같아요.”
목운요의 미소에 이 씨는 덜컥 겁이 났다.
“네…… 네 이년,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그에 목운요가 부엌으로 달려가 소금을 가득 퍼 왔다. 그러곤 겁에 잔뜩 질린 이 씨의 상처 위로 소금을 그대로 들이부었다.
“아악! 이년, 이 고약한 년! 네년을 가만둘 성싶으냐! 내 기필코 네년을 죽이고 말 테다!”
하지만 목운요는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할머니, 못된 말을 내뱉는 버릇도 고치세요. 안 그러면 다음엔 제가 펄펄 끓는 물을 실수로 상처 위에 쏟아부을지도 모르니까요.”
“네년이?!”
이 씨가 눈을 부릅떴다. 저년이 언제부터 간이 저리 커진 거야?
“후후.”
옥구슬 굴러가듯 낭랑한 웃음소리에서 말할 수 없는 증오와 원한이 느껴졌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잘 안 되시는 거예요?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할머니가 아니라 저예요. 할머니를 죽이는 건 개미 한 마리 밟아 죽이는 것보다 쉽다고요. 아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