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다시 시작된 인연
“너희 년들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틈에 네년들이 날 죽이려 할지 누가 안단 말이냐?”
자신을 향하던 목운요의 살기 어린 눈빛을 떠올리자, 이 씨는 저도 모르게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 목운요가 이 씨 앞으로 다가갔다. 상처라도 살펴보나 했더니, 다른 사람들이 한눈을 판 사이에 그녀는 이 씨의 상처를 힘껏 눌렀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이 씨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곤 또다시 혼절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아주머니, 죄송하지만 할머니를 집으로 좀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가녀린 자태를 지닌 열세 살 소녀의 몸이었지만 목운요에게선 거절할 수 없는 뭔가가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촉촉이 젖은 두 눈은 단연코 일품이었다.
“너도 참, 이리 마음이 약해서야……. 알았다, 할머니도 다리를 다쳤으니 더 이상 난리를 피우진 못하시겠지. 다들 여기 좀 도와줘요.”
이 씨가 사는 곳은 다행히 멀지 않았다. 혼자 사는 집인데도 목운요 세 식구가 사는 집보다 컸다.
원래 목성이 넷이서 같이 살려고 집을 크게 지었다가, 이 씨가 하도 아내를 구박하자 집을 또 한 채 지어 분가해 버린 탓이다.
이 씨를 집으로 옮긴 뒤, 목운요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니 모두 뿔뿔이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소청은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입을 열려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이가 덜덜 떨렸다.
“요아야…….”
방금의 화재 때문에 크게 놀란 게 분명했다.
목운요는 소청의 손을 잡으며 그 품에 안겨 호, 하고 입김을 불었다.
“어머니, 추우시죠? 제가 얼른 가서 아궁이에 불을 지필게요. 날이 밝으려면 아직 두 시진(時辰, 1시진=2시간)이나 있어야 해요. 그동안 잠시 눈이라도 붙이세요.”
“요아야, 할머니가 괜찮으실지…….”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옛날에 착한 사람은 단명하지만, 못된 사람은 천수를 누린다 했죠. 망할 할망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방금 전에 욕설을 퍼붓는 걸 보니 기력이 넘치던걸요!
아궁이에 불을 지핀 목운요는 소청을 끌어다 아랫목에 앉혔다. 온기가 몸을 타고 전해지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 줄이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풀어졌다.
“어머니는 여기에서 몸 좀 녹이세요. 제가 가서 할머니 상처를 봐 드릴게요.”
“요아야, 네 손의 상처는 내가 치료해 주마.”
“이 정도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제 말대로 하세요, 어머니.”
어머니는 원체 온순하고 유약한 성품이라 이 씨를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늙은이를 상대할 이는 자신뿐이었다.
내심 걱정이 앞선 소청이었지만 듬직한 딸아이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방 가운데 누워 있는 이 씨의 다리는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다리에선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목운요는 물을 길은 뒤 천을 쥐고 이 씨의 상처를 닦기 시작했다. 행여 다칠세라 조심스레 상처를 살피는 듯했지만 손에서 결코 힘을 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이 씨가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네…… 네년이 날 죽이려고?”
이 씨의 낯빛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불길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목운요의 사나운 눈빛이 떠오르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번엔 지켜보는 다른 사람도 없으니 목운요가 나쁜 마음이라도 품는다면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 모습에 목운요가 차가운 미소를 날렸다.
“할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흰 한 식구잖아요. 할머니한테 효도도 제대로 못 해 드렸는데 어째서 제가 할머니를 죽인다는 거예요?”
“사, 사람도 아니구나. 짐승- 아니, 악귀 같은 년!”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할머니가 제 것을 ‘도둑질’하지 않았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거예요.”
목운요가 뒤틀린 이 씨의 다리를 바르게 놓은 뒤 천으로 한 겹씩 감기 시작했다.
그에 이 씨가 목운요를 향해 또다시 욕설을 퍼부으려 하자, 목운요의 손가락이 잽싸게 상처를 후벼 팠다.
“아악, 이, 이년…… 지금 일부러…….”
“할머니, 제가 겁이 좀 많아요. 자꾸 험한 말만 하시니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잖아요.”
이 씨가 분한 마음에 이를 악물었다.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목운요가 상처를 힘껏 누르는 통에 더 이상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소청은 크게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겁내실 것 없어요. 우리 얼른 가서 자요.”
“한데 요아야, 네 손…….”
가뜩이나 화상을 입은 손에 물까지 묻히자, 그걸 보는 소청의 마음이 아려 왔다. 자신의 손을 잡는 소청을 향해 목운요가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했다.
목운요는 상흔이 쉽게 남지 않는 체질이었다. 회귀 전에서도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다리가 부러졌었지만 의원한테 치료받지 않아도 결국 괜찮아지긴 했다.
손에 난 상처가 심한 듯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직접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고육지책을 쓰진 않았을 거다.
* * *
이튿날, 목운요는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 일로 늦게 잠든 소청은 아직까지 눈을 붙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좀 더 쉴 수 있도록 목운요는 조용히 침상에서 내려왔다.
한데 양 볼이 붉어진 이 씨가 미간을 찌푸린 채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아마도 열이 오르나 보다.
이 씨를 향한 차가운 시선을 거둔 목운요가 등에 지는 광주리를 짊어지고 대문을 나서 뒷산으로 향했다.
이왕에 판을 벌였으니, 놀 거면 확실히 놀아야 하는 법! 이 씨가 아무리 밉다고 해도 그녀 때문에 자신의 명성에 먹칠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회귀 전의 자신은 무엇 하나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다르다. 뭐든 최고의 것만 누리고 손에 쥘 것이다. 거기에 명성도 예외일 순 없었다!
한겨울, 얼굴을 스치는 찬 바람이 여린 살갗을 파고들자, 오소소 소름이 돋다 못해 아픔까지 밀려왔다. 하지만 목운요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겨울엔 초목이 바짝 마르는 터라 약초를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안목이 좋은 목운요는 지혈 효과가 있는 엉겅퀴와 마취 효과가 있는 흰 독말풀 줄기를 재빨리 찾아낼 수 있었다.
약초를 광주리에 던져 넣은 그녀는 계속해서 안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뒷산에는 일 년 내내 마르지 않고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는 샘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첩으로 삼으려는 장 씨에게 ‘선물’로 줄 뱀 한 마리를 잡을 생각이었다.
‘제물’로 말이다.
산등성이를 돌자, 희미한 안개 속에서 샘이 보였다. 목운요는 광주리를 내려놓은 뒤 따뜻한 물로 얼굴을 닦았다. 개운함과 함께 기분도 덩달아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녀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따뜻한 물 덕분에 근처는 봄날처럼 푸릇푸릇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뱀이 동면을 취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굴을 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유난히 풀이 무성하게 자란 곳을 확인한 목운요가 허리를 굽힌 채 높다랗게 자란 풀숲을 헤쳤다.
그때, 눈앞에 서늘한 빛이 스치는가 싶더니 예리한 검날이 목덜미에 드리워졌다.
“누구냐.”
음산하다고 느낄 만큼 낮은 목소리에서 뱉어 낸 한마디 말이 차가운 검날처럼 귀에 박혔다.
그 소리에 목운요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한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 저는…… 산 아래 하언촌에 살고 있어요. 약초를 캐러 왔을 뿐 다른 뜻은 없으니 제발 살려 주세요.”
하지만 목덜미에 드리워진 검날이 풀어지기는커녕 도리어 조금 전보다 더 묵직이 파고들자, 목운요가 두 눈을 부릅뜨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제게 피를 멈추게 하는 약초가 있어요!”
상대한테서 풍기는 진한 피 냄새에 목운요는 그가 심한 부상을 입었다고 확신했다. 해서 자신이 상처를 치료해 주면 혹시 살려 주지 않을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샘물이 졸졸졸 흐르는 가운데, 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목운요는 가슴을 졸였다.
한참 뒤, 풀숲이 부스럭거리는가 싶더니 검날이 사라진 자리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운요는 고개를 들었다가, 크게 놀라 하마터면 그 자리에 털썩하고 주저앉을 뻔했다.
창백한 얼굴과 서늘한 미간, 짙은 먹을 흠뻑 머금은 붓으로 하나하나 정성껏 그려 낸 듯 사내의 이목구비는 무척이나 섬세하고 수려했다.
그중에서도 차가운 연못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 눈동자가 담담히 스치고 지나갈 때면, 서늘한 기운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하지만 그저 귀태 나는 용모 때문에 목운요가 놀란 건 아니었다. 그녀의 간담을 서늘케 한 진짜 이유는 그가 바로 당대 사황자(四皇子)인 영군월(寧君鉞), 즉 월왕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만난 것은 한 번뿐이지만,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다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는 차갑다 못해 뼈를 에일 듯한 지독한 한기를 온몸에서 풍기고 있었다.
두려움에 자신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는 몸과는 달리, 목운요의 가슴속에서는 그에 대한 증오가 활활 타올랐다.
회귀 전의 자신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죽기 전까지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죽음이 월왕과 관련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월왕이 눈을 들자, 차가운 연못과도 같은 그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약은?”
그 말에 번쩍 정신이 든 목운요가 재빨리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냇가에서 제가 꺾어 올게요.”
강한 적을 상대할 때는 경거망동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 하물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일을 키워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월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목운요의 모습을 지켜봤다. 치맛자락과 버선이 냇물에 젖는 모습도 묵묵히 바라봤다.
목운요는 등에 쥔 광주리의 끈을 꽉 움켜쥔 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몇 번이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월왕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된다. 들켰다간 절대로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손에 쥔 약초를 건네는 목운요는 여전히 눈을 착 내리깐 채였다.
“이것은 엉겅퀴입니다. 피를 멎게 하는 효능이 있답니다.”
바짝 말라붙은 약초를 본 월왕의 눈빛에 한기가 스쳤다.
“지금 나더러 건초를 그냥 씹어 먹으라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