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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3화 (3/442)

3화 절망의 시간

목운요는 소청을 위로하면서 제 자신을 다독였다.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는 데 나흘이면 충분했다.

“요아…….”

딸아이를 안은 채 끅끅거리며 울던 소청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요아야. 상처는, 상처는 괜찮은 거니?”

머리 뒤에 난 상처 때문에 눈앞이 새까매졌지만 목운요는 아프다는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괜찮아요, 어머니.”

“핏자국이 배어났는데도 괜찮다는 거야?”

소청이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떠 와서 머리에 난 상처를 깨끗이 닦아 주었다. 상처를 천으로 다시 감싸는 소청의 눈에서 더 굵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어머니께서는…… 참으로 모진 분이시구나.”

그런 소청을 바라보던 목운요가 허리를 굽혀 제 어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머니, 그런 못된 노친네는 상대하지 마세요. 그런 사람은 죽어서 천벌을 받게 될 테니까요.”

하늘에서 천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그 죗값을 치르게 해 줄 테다.

소청의 품에 안긴 목운요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언제나 연약한 모습이었다. 온몸에 책 향기를 가득 담은 어머니는 작은 손짓 하나에도 남들과는 다른 고고한 분위기를 풍겼다. 주변에서는 그런 어머니를 향해 허세를 부린다는 둥,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는 주제에 잘난 척만 한다며 수군거렸다.

그러다 훗날 외갓집인 소씨 가문에서 사람이 찾아왔는데, 화려하고 위풍당당한 그 자태에 관리들조차 어떻게든 연줄을 잡으려고 굽실거렸다.

그제야 목운요는 어머니가 소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라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어머니는 소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이 당도하기도 전에 딸을 지키려다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뒤였다.

장 씨가 그간 저질러 온 온갖 음행과 악행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면 목운요 역시 일찌감치 끌려가 괴로움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데다 다리까지 절게 되자, 목운요는 이 씨한테 의지해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곱게 봐줄 리 없는 이 씨였다.

다리까지 부러져 힘쓰는 일도 할 수 없게 된 데다, 날로 꾀죄죄하게 변하는 목운요에게 이 씨는 걸핏하면 분풀이하곤 했다.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성안의 의원을 부르려 했지만,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욕설을 퍼부어 쫓아내곤 했다.

그 후 일 년여 동안, 목운요는 하루가 일 년 같은 지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부뚜막의 불빛을 보며 이 씨와 자신을 전부 불태워 버렸으면 좋겠다고 셀 수도 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목운요는 그리할 수 없었다. 제 목숨은 어머니의 목숨과 바꾼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살아야 했다.

그렇게 일 년 하고도 반년이 지난 후, 소씨 가문에서 준마(駿馬)가 끄는 마차에 비단옷을 걸친 사람들을 잔뜩 보냈다.

선녀 같은 여인은 하늘거리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목운요에게 다가와, 부드러우면서도 고고한 말투로 소씨 가문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목운요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소씨 가문으로 가는 길 내내 그녀는 불안에 떨며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침내 소씨 가문에 도착한 날,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호화롭고 위풍당당한 가문의 모습에 목운요는 더욱 어쩔 줄 몰라 하며 온종일 전전긍긍했다.

그 이후로도 그녀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좀처럼 섞이지 못했다. 설상가상 누군가가 ‘그녀가 장부에서 굴렀다.’는 소식을 마구 퍼뜨리는 바람에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이에 그녀는 스스로에게 그 누구보다도 독하게 굴었다. 할 줄 모르면 배우고, 부족하면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렇게 피땀 흘리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갔다.

하지만 결국 첩자라는 오해만 받으며 제 어미처럼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자신이 죽는 장면을 떠올리자, 가슴이 갑자기 아파 오더니 낯빛도 새하얗게 질렸다.

소청은 그런 목운요를 꼬옥 안아 주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온몸을 떠는 걸 보니 가슴이 더욱 아파 왔다.

“요아야, 왜 그러니? 어디가 안 좋은 거니?”

그 말에 목운요는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절망으로 가득한 눈빛이 점점 반짝거리는 생기로 채워졌다.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운명을 바꿀 기회가 있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삶을 짓밟았던 자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고 말 테다!

“괜찮아요, 어머니. 얼른 가서 세수하고 오세요. 우시느라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됐잖아요.”

문득 목운요의 새하얀 뺨을 붉게 물들였던 손자국이 푸르스름하게 변한 게 보였다. 거기에 깨진 그릇으로 그었던 상처까지 더해져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다가 상처가 땅겨지는 바람에 아픈지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하여간, 덤벙거리긴.”

그 모습에 소청은 안쓰러우면서도 애가 탔다. 그녀는 아이의 이마에 손을 뻗으려다가 상처를 보고 잽싸게 손을 거뒀다.

목운요는 앞으로 다가가 어머니의 손을 끌어 제 머리 위로 올려 두었다. 따뜻하면서도 건조한 손바닥이 이마에 닿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온도를 그리워했던가? 그리움이 사무친 날에는 밤새 눈물을 흘리곤 했다. 서러움에 눈가가 붉게 물들더니, 푸른 하늘 같은 그녀의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왔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오랜 세월 동안 내리눌러 왔던 그리움과 서러움이 ‘어머니’라는 그 한마디 말에 담겨 있었다.

“그래그래. 엄마 여기 있다, 여기 있어.”

소청은 부드럽게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게 모두 제 탓이다. 자신이 무능해 어린 딸아이가 나서고 말았다. 소청은 안타까움에 눈물을 삼켰다.

* * *

두 사람은 함께 어지러워진 방을 치우곤 밥을 지었다.

나흘 뒤 장부에 갈 일을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묵직해진 소청은 밥숟갈을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지금 자신이 위로의 말을 건넨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괜한 말이라도 했다가 어머니가 눈물을 쏟아 내면 또 어찌한단 말인가?

식사를 마친 후 목운요가 설거지를 하려 하자, 소청이 가서 쉬라고 타일렀다. 미안함이 담긴 어미의 눈을 보자, 목운요도 더는 고집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뒷방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혼자서 집안일을 챙겨야 했다. 땔감이 늘 부족한 탓에 아궁이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오래된 솜이불을 몇 겹이나 덮었지만 추위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목운요는 전에 없이 마음이 편안했다. 소씨 가문이나 진왕부(晋王府)의 비단 이불보다도 따뜻하고 포근했다.

어느새 그녀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꿈에서 목운요는 또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가 있었다. 날카로운 욕설이 귓가에 맴돌았다.

“더러운 것. 그분은 장차 큰 아가씨의 부군이 되신다. 제 주제도 모르고 고매한 왕야(王爺)를 넘봐?!”

“더러운 피가 어디 가겠어? 저년의 어미도 화냥년이라지 아마? 보고 배운 게 그런 것뿐이니 결국 이 사달이 날 수밖에.”

“널 친자매처럼 대한 큰 아가씨한테 비수를 꽂아도 유분수지, 저런 배은망덕한 건 저수지나 돼지우리에 던져 버려야 해!”

“재수 없는 년.”

한겨울, 침상에 있다가 얇은 옷만 걸친 채로 바닥으로 끌려 내려온 날이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자, 목운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방법을 써서 진왕의 침상에 올랐는지 간에, 저들은 자신을 죽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꺼이 웃을 수 있었다.

그러자 큰 아가씨의 고운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이 사라졌다. 차가운 얼굴, 멸시와 혐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마치 더러운 것을 보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환하게 웃을수록 상대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걸 보자, 목운요는 왠지 모르게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소부(蘇府)에 왔을 때, 처음부터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자신의 처지가 여의치 못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런 자신을 향해 큰 아가씨는 호의를 보여 주었다.

큰 아가씨는 한없이 아름답고,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벌이나 시련도 기꺼이 대신하겠노라 할 만큼 제 마음을 줬었다.

그러다 향불을 올리려 함께 호국사(護國寺)로 향하던 중, 강도떼를 만나고 말았다. 목운요는 큰 아가씨를 지키려다가 하마터면 치욕을 당할 뻔했다.

간신히 도망쳐 나온 목운요는 큰 아가씨가 무사한지 허겁지겁 달려갔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귓가에 들린 것은 잔혹한 진실이었다.

그녀를 공격한 강도떼는 사실 큰 아가씨의 사주를 받은 이들이었다. 진왕이 그녀를 향해 ‘반반한 얼굴’이라고 한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자신에게 잘 대해 준 것도 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겸사겸사 자신한테 쓸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알아볼 겸.

그래서 진왕이 장차 큰 아가씨의 부군이 되리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를 유혹해 침상을 차지했다. 그러곤 주변의 구박과 냉대를 묵묵히 견디며 아이까지 가졌다.

큰 아가씨의 얼굴에 힘껏 먹칠을 한 목운요는 그렇게 진왕부에 입성할 수 있었다. 비록 배 속 아이는 잃게 되었지만, 진왕부에 머문 삼 년 동안 진왕은 자신을 애지중지했다.

월왕(鉞王)을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절에 향불을 올리고 돌아오던 길, 말이 뭔가에 놀랐는지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마차에 타고 있던 목운요는 마차 밖으로 튕겨져 누군가의 발치로 굴러가고 말았다. 다름 아닌 월왕이었다.

월왕의 시선이 그녀에게 오래 머무르는 것을 본 진왕은 그녀를 곧장 월왕부로 들여보냈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월왕에게 첩자로 낙인찍혀 포승줄에 결박되어 있었다.

첩자의 끝은 항상 좋지 않은 법이다. 목운요의 끝은 유난히 참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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