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외전 15
레온하르트는 아직도 식은땀이 느껴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셀린느…….’
그녀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 준 지 채 세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그때의 떨림은 레온하르트를 뒤흔들었다.
다분히 충동적인 청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대공의 후계자에 걸맞은 교육을 받고 자랐고, 당연히 청혼은 어떠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당시 자신은 최적의 때와 장소를 가릴 여유가 없었다.
그의 안이함 때문에 불안해하는 셀린느에게 진심을 밝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때마침 셀린느가 좋아하는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온 덕분에 북부의 오랜 전통대로 봄을 의미하는 꽃과 함께 청혼할 수 있었다.
셀린느가 그의 품속으로 뛰어 들어오고, 긴 포옹 끝에 베르누이성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까지만 해도 레온하르트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꿈이 현실로 다가온 건 대공 부부에게 보고를 올렸을 때였다.
대공 부부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말과 함께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누었다.
별다른 반대가 없다는 사실에 레온하르트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집무실을 나서려 할 때, 대공이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레온하르트, 쉽지는 않을 거다. 네게도, 셀린느에게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기에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모든 걸 걸고 셀린느를 지킬 겁니다.”
대공은 안도하는 듯했다.
“그럼 되었다.”
레온하르트는 문을 닫고 우두커니 서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남부나 황성과는 달리 수수하지만 고풍스러운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이 모든 건 셀린느의 소유이기도 했다.
레온하르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조금 전 들은 말에 대해 생각했다.
‘아버지가 옳다.’
대공 후계자의 연인인 것과, 차기 대공비는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더군다나 자신의 저주가 완전히 풀렸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떻게든 셀린느를 제치고 자신들의 딸을 레온하르트와 결혼시키려는 가문이 한둘이 아니리라.
레온하르트는 그 모든 풍파에서 셀린느를 보호해야만 했다.
‘잠깐.’
레온하르트는 잠시 얼어붙었다.
셀린느는 이 사실들을 알까?
당연히 모를 것이다.
그녀는 북부에 대해서, 아니 이 제국 전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으니.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어느덧 셀린느의 처소 근처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본래 가려고 했던 자신의 방과는 다른 방향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셀린느를 만나야 했다.
***
당연히 열린 문 너머에는 레온하르트가 서 있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진지해 보이는, 평소의 레온하르트였다.
셀린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레온하르트를 보니 종일 쌓였던 피로가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듯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손을 잡으며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왜 찾아왔는지에 대한 의문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단지 보고 싶었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 기쁠 뿐이었다.
둘은 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레온하르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아무 말 없이 셀린느의 손만 어루만졌다.
“나타샤가 이제 제가 엄청 바빠질 거라고 걱정하더라고요.”
“왜지?”
“약혼식이요.”
“아.”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셀린느와 자신은 대공 후계자에 걸맞은 약혼식을 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말에 드러난 지친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올리지 않아도 된다.”
“괜찮아요.”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레온하르트가 제 남자라는 걸, 전 제국에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거든요.”
“그런가.”
레온하르트는 조금 전 했던 걱정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저주가 풀렸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무슨 공작이 들어올지 모른다. 그 전에 확실히 해 두는 게 낫긴 하겠지.”
“……공작이요?”
레온하르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셀린느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로 약속했다는 점을 떠올렸다.
“여태까지 내게 혼사가 없었던 건 저주 때문이었다. 저주가 풀린 걸 다들 알게 된다면…….”
“제국 전역에서 혼담이 들어오겠군요.”
셀린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최선을 다해 약혼식을 준비하겠어요.”
“셀린느, 나는…… 네가 이보다 더 지치는 걸 원하지 않아.”
레온하르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미 셀린느는 너무나 많은 일들을 해 왔고, 굳이 약혼식이 아니라도 많은 일들을 버텨 내야 할 것이다.
거기에 약혼식이라는 의무를 얹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타샤도 조금 과장했을 거다.”
“그런가요?”
셀린느가 살포시 웃었다.
“그럼, 제가 열심히 참여한다 한들 그렇게 힘들지는 않겠네요.”
“그, 그렇군.”
레온하르트는 어느새 셀린느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으려는 찰나, 셀린느가 레온하르트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잘 왔어요, 레온하르트.”
“……?”
“마침 보고 싶었거든요.”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셀린느가 그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도, 보고 싶었다.”
“우리, 헤어진 지 겨우 몇 시간밖에 안 되었잖아요!”
“너도 보고 싶었다고 했잖나.”
“그랬죠.”
셀린느가 쿡쿡 웃으며 레온하르트의 품에 반쯤 안겨 벽면을 바라보았다.
한겨울 북부의 황량한 동시에 아름다운 전경을 담은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온 진정한 이유를 떠올렸다.
“셀린느, 말해 주고 싶은 게 있다.”
“뭐죠?”
가볍게 되묻는 셀린느와는 대비될 정도로 무거운 이야기였으나 레온하르트는 망설이지 않았다.
곧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 꼭 알아야만 하는 사실이었으니까.
“황실과 거리를 두고자 한다.”
“……!”
셀린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온하르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대공 각하께선 그러고 계시잖아요?”
“아니.”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선 황실의 그 어떤 명도 거부하지 못해. 설령 그게, 내게 해가 된다 하더라도…… 나 역시 그렇고.”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레온하르트의 말은, 언뜻 들으면 반역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었다.
“황실이, 레온하르트를 내버려 둘까요.”
“그렇게 하도록 해야지.”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반쯤 감싼 몸에 힘을 주었다.
“네게는 결코 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
“설령 해를 입게 되더라도 괜찮아요.”
짧은 시간에 결정을 마친 셀린느가 느릿느릿하게 대답했다.
여태까지 황실에 충실하기만 했던 레온하르트가 변한 건, 데이브 루테와 이름 모를 소년의 힘이 컸을 것이다.
셀린느 또한 미래의 대공비로서 무작정 황실에 충성하고 싶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그리고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으니까요.”
“……셀린느.”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엔 어딘가 물기가 묻어 있었다.
“네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평생 폐하의 명을 받들었을 거다.”
“저요?”
셀린느는 조금 놀라 되물었다.
“그래.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평생토록 충성하며 흑마법사를 베는 삶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이제는 부드럽고 윤기가 나는 셀린느의 머릿결을 살짝 쓰다듬었다.
“하지만 네 덕에,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
셀린느는 충동적으로 레온하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눈으로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네게, 그리고…… 우리의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천천히 레온하르트에게로 다가갔으나, 그가 조금 더 빨랐다.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부드럽게 부여잡는 동시에 아찔한 감각이 셀린느를 지배했다.
그들은 서로의 부드러운 입술을 탐닉했다.
머리에서 시작된 열기는 전신으로 퍼져 나갔고, 어느덧 셀린느는 헐떡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레온하르트의 청혼으로 둘의 관계가 변화한 것처럼, 셀린느 역시 여태까지와 동일한 선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셀린느는 잠시 레온하르트의 단단한 가슴팍에서 빠져나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퍼덕거렸다.
“셀린느.”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걱정이 가릴 수 없는 격정을 찾아내었다.
갈망.
셀린느는 천천히 침상 쪽으로 향했다.
레온하르트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 속도를 맞추어 그녀를 따랐다.
셀린느는 침상에 앉아 레온하르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이 남자를 이 세상, 아니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세상을 통틀어 사랑했다.
분명, 레온하르트 또한 자신과 같은 감정이리라.
“레온하르트.”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그림자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
시간은 물 흐르듯 빠르게 지나갔다.
레온하르트와 셀린느의 약혼식은 전 제국에서 온 손님들 앞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걱정과는 달리 혼담은 몇 개 들어오지 않았다.
대니는 그게 다 셀린느의 명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누가 감히 루테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겠습니까? 하루 만에 죽지 않으면 다행인데.”
“그, 그런가요?”
“그럼요.”
대니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티르수스도 그렇고, 황성에서도 흑마법사들의 구조물을 홀로 없애셨잖아요.”
“대공자비가 원래 그런 일을 하는 자리는 아니잖아요.”
“루테, 모르셨군요!”
대니가 무척 즐거운듯한 기색으로 설명했다.
“공자님이 첫 혼담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아세요? 자신의 비가 될 정도면 우두머리 마물 정도는 혼자서 벨 줄 알아야 한다고…….”
대니는 말끝을 흐렸다.
셀린느는 살짝 놀란 듯한 대니의 시선을 따라갔다.
레온하르트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밀이었는데.”
“죄, 죄송합니다.”
대니는 깍듯이 사죄하더니,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었다.
“정말로 그랬어요?”
“효과가 좋더군.”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조금 과장은 있지만…… 사실이지 않나.”
“그렇다고 치죠.”
계속 웃음을 터뜨리는 셀린느를 레온하르트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셀린느는 따뜻한 품에 안겨 중얼거렸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왜지?”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황실과 북부의 갈등은 셀린느를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아직은 황실이 레온하르트에게 무리한 임무를 내리지 않아서 가시적인 갈등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본격적인 충돌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어깨에 얼굴을 살짝 묻었다.
“나는 이대로 흘렀으면 좋겠는데.”
“왜요?”
“시간이 멈추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나쁜 일뿐만 아니라…… 좋은 일도.”
“그렇네요.”
셀린느는 수긍했다.
레온하르트의 말이 옳았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와 함께 살아가는 평생을 원했다.
만약, 시간이 여기서 멈춰 버린다면 그녀는 그 평생의 반의반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 괜찮을 거예요.”
“예언인가?”
셀린느는 대답하는 대신 미소 지었다.
게임이 끝났기에 이제 자신은 예언자 행세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셀린느는 확신했다.
그 끔찍한 미래를 바꾸었던 것처럼, 어떠한 고난이 앞에 놓여 있든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레온하르트와 함께.
-외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