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외전 14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 다오. 네가 없다면…… 나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
셀린느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으나 레온하르트가 오늘 겪은 일을 감안했을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어딜 가겠어요!”
그녀는 일부러 밝게 대답했지만 레온하르트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한동안 생각했었다. 너를 떠나보내야 한다고……. 빨리 말해 주어야 한다고.”
“뭐를요?”
불길한 예감이 셀린느를 엄습했다.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도리어 강해진 그의 손아귀에 갇히고 말았다.
셀린느는 힘을 풀고 레온하르트의 품에 그대로 안겨 주었다.
지금, 레온하르트는 정말로 불안에 휩싸인 상태였다.
조금 숨이 막히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 줄 수 있었다.
이젠 숨 좀 막힌다고 죽는 몸도 아니지 않은가.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목이 꽉 멘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태까지…… 말을 하지 않은 게 있다.”
“사람이 어떻게 말을 다 하고 살겠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셀린느는 자신이 레온하르트에게 털어놓지 않은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특히, 평생토록 말 못 할 진실을.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 미처 말을 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셀린느는 잠시 긴장했다.
그가 이 정도의 태도를 보인다는 건, 그녀가 알아야 하는 사실을 숨겨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뭔가요?”
“…….”
레온하르트는 잠시 설명할 말을 찾는 듯했다.
셀린느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었다.
그녀와 레온하르트가 만난 지 근 반년.
그동안 못 들은 얘기인데, 조금 더 기다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셀린느. 나는 이전부터 흑마법사들이 내게 저주를 걸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셀린느는 조금 당황하며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건 다 해결되었잖아요! 레온하르트가 진작에 그걸 알았든 몰랐든 중요하지 않아요!”
“아니.”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저주다.”
“다른 저주라고요?”
셀린느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래. 부모님도, 나타샤도 안다. 전 제국이 다 아는 저주지. 너만 빼고.”
레온하르트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일로 레온하르트가 농담할 리가 없었다.
“왜 여태까지 말하지 않았어요?”
셀린느의 목소리엔 어쩔 수 없는 원망이 섞여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떨구었다.
“두려웠다, 네가 나를 떠날까 봐.”
“레온하르트.”
셀린느의 목소리에 살짝 노기가 실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를 그렇게까지 못 믿었어요?”
“…….”
레온하르트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셀린느가 저주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저주를 이해할 만한 여자가 이 세상 그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러지 말고 말해 봐요. 대체 무슨 저주인가요? 만약, 아직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셀린느의 말이 부르르 떨렸다.
여태까지 셀린느는 자신이 이 세계의 사람들보다 모르는 게 많다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자신은 이방인이었으니까.
모르는 게 많다 한들 어쩔 수 없었고,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은 앞으로 배워 나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아는 레온하르트가 걸린 저주가 있다는 사실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레온하르트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
설명이 끝난 자리엔 침묵만이 남았다.
“…….”
셀린느는 할 말을 잃고 레온하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레온하르트는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어 베르누이성의 회색 외벽을 응시했다.
“판게아 님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요?”
예상한 질문이었기에 대답은 쉬웠다.
“널…… 보내 줄 생각이었다.”
셀린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디로요? 북부에서 쫓아내려고 했어요?”
“아니.”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셀린느가 그런 추측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일전에 약속한 대로, 베르누이성은 평생 셀린느에게 열려 있을 것이다.
“그런 말은 아니다. 단지……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내가 물러나려고 했다.”
“제가 원하는 삶이요? 그게 뭔데요?”
궁금해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고, 레온하르트가 말하는 바를 모두 알아차렸다.
단지 레온하르트의 대답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셀린느는 잠시 기다렸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레온하르트.”
아직 분노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였다.
“만에 하나 제가 그런 저주를 받는다면, 저를 버릴 건가요?”
“……!”
“아니, 제가 물러나야 마땅한가요? 레온하르트가 결심했던 것처럼…… 다른 여자를 만나, 귀여운 아이를 낳고 잘 살기를 기원해야 하는 건가요? 그게 레온하르트가 원하는 삶일 테니까?”
셀린느는 다다다 말을 쏘아 낸 이후 잠시 숨을 돌렸다.
레온하르트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그 말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이 있었다.
“……너와, 나는 다르다.”
“뭐가 다르죠?”
레온하르트는 시선을 땅으로 떨어트렸다.
우습게도, 셀린느가 좋아하는 샛노란 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미 오래전 포기했다. 내가 만약, 욕심을 부려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내 아이도, 내가 사랑하는 여인도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으니까. 그 운명에서 벗어날 생각도 해 보지 않았어.”
“…….”
얼굴이 하얗게 질린 셀린느가 입술을 깨물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는 달랐다. 비록 평범한 사람이라면 버틸 수가 없는 저주를 받기는 했으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지. 그리고 성공했고.”
“……아니에요.”
셀린느의 얼굴은 더는 분노로 붉게 달아오르지 않았고, 목소리엔 슬픈 기색이 감돌았다.
“저도, 레온하르트가 아니었다면 그냥 모든 걸 포기했을 거예요. 실제로…… 그런 상태였고요.”
“포기했으면 그날 나를 피해 달아나지도 않았겠지.”
레온하르트가 진지하게 반박했다.
“그건 고통을 덜기 위해서였어요. 그게 전부였다고요! 운명에 맞서 싸우느니, 노력을 멈추지 않았느니…….”
왜인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셀린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레온하르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저주란 저주는 다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셀린느.”
“제가 원하는 건 평범한 삶이었어요. 그래서 제 저주를 푼 거고요. 이제는 레온하르트를 원해요. 저주에 걸려 있든 있지 않든……!”
셀린느는 자신이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점을 자각했지만, 도저히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은 다 끝난 일이죠. 판게아 님이 모든 저주를 없애 주셨으니까.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셀린느는 목이 꽉 멘 소리를 냈다.
“……미안하다.”
“다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숨기지 말아 줘요.”
평생 레온하르트에게 말 못 할 진실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셀린느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꼭 받아 내고 싶은 약속이었다.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더니, 느닷없이 허리를 굽혔다.
셀린느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레온하르트……?”
다음 순간.
순식간에 몸을 일으킨 레온하르트의 손에 노란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생뚱맞은 모습에 셀린느는 작게 웃고 말았지만, 레온하르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셀린느.”
“고마워요.”
셀린느는 꽃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으나 레온하르트는 되레 꽃을 든 손을 살짝 뒤로 뺐다.
레온하르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긴장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셀린느. 앞으로 그 어느 것도 네게서 숨기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다. 그럴 수 있도록…… 네 평생의 반려자가 되게 해 다오.”
“……?”
셀린느는 잠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레온하르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행히 셀린느는 잔뜩 긴장한 레온하르트에게 그 뜻을 묻는 대신 혼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 와서 무슨 얘기예요,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힘을 주어 레온하르트에게서 꽃을 빼 들어, 향기를 맡았다.
고향의 꽃과 꼭 닮은 생김새와는 달리 낯선 향기가 올라왔지만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향긋했다.
“셀린느.”
레온하르트가 멍하니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셀린느는 모든 걸 본능에 맡기기로 했다.
꽃이 땅으로 떨어졌다.
***
대공 부부에게는 레온하르트가 설명했지만, 나타샤에게 설명하는 건 셀린느의 몫이었다.
“그래서, 약혼식은 언제 올릴 생각이야?”
“나타샤는 전혀 놀라지 않네요.”
“시간문제 아니었어?”
나타샤가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는 듯 셀린느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놈의 저주 때문에 저를 내쫓아 버릴 생각도 했다던데요?”
“그럴 리가.”
나타샤가 코웃음을 쳤다.
“레온은 셀린느가 나타나기 전까진, 여자 한 명 마음에 둔 적 없어.”
“네?”
나타샤는 셀린느의 다소 떨떠름한 반응을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꼭 저주 때문이라기보단…… 처음부터 포기했던 것 같아.”
“그게 저주 때문이잖아요.”
“하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 따윈 다 무시하기 마련이잖아?”
셀린느는 자신보다 조금 어린데도 이미 세상사를 다 안다는 듯한 말을 하는 나타샤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꼭 그런 사람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네요.”
“뭐…… 없진 않지.”
나타샤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비밀이야. 레온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알았어요.”
셀린느는 다시 웃었다.
앞으로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겠다는 맹세는 오직 레온하르트에게만 국한된 것이었기에, 이 정도야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었다.
“어쨌든, 레온하르트가 저주 때문에 셀린느와 멀어질 예정이었다면…… 북부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애정 행각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셀린느는 얼굴을 붉혔으나 호기심을 감출 수는 없었다.
“왜죠?”
“레온하르트가 셀린느를 내쫓았을 때, 가장 상처를 많이 받을 사람이 누구겠어? 그걸 생각하면 절대 행동으로 옮길 수 없지.”
나타샤는 당장 약혼식을 치러야 하니 준비해야 할 게 많다며 수선을 떨었다.
“꼭 해야 하나요? 굳이 약혼에 식까지…….”
“해야 해.”
나타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레온하르트 같아, 셀린느는 다시 웃고 말았다.
“레온의 그 끔찍한 저주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전 제국에 공표해야 하니까. 번잡한 자리가 싫겠지만 딱 하루만 참아 줘.”
“오늘 하루만 좀 쉴게요.”
나타샤는 너무 밝아 보여 미처 발견하지 못한 피곤의 흔적을 셀린느의 곳곳에서 발견하고는, 흔쾌히 자리를 피해 주었다.
셀린느는 눈이 휘둥그레진 대니의 축하 인사를 받으며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똑똑.
셀린느는 누군가가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평범한 몸으로 되돌아간 이후, 이제 누군가가 항시 그녀와 함께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대니는 호위 시녀의 방에서 쉬고 있을 것이다.
셀린느는 잠에 반쯤 취해 중얼거렸다.
“대니니?”
“……셀린느.”
셀린느는 벌떡 일어서 문가로 달려갔다.
그녀가 문을 열기도 전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