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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118화 (118/120)

118화.

외전 13

‘……전하.’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황태자를 불렀다.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황실에 충성해야 한다고 배워 왔다.

몇 년 전, 베르누이가가 황실과 틀어지며 생각이 조금 달라지긴 했으나 몸에 오랫동안 밴 습관은 바뀌지 않는 법이다.

더군다나 지금의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를 만들어 낸 건 황태자.

그가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부당하게 대한다고 하여 등을 돌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최근 몇 개월.

특히 샤프 백작령에서, 레온하르트는 황실의 추악한 면을 보았다.

그런데도 황실엔 반기 하나 들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당장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려 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우두머리 마물들을 모두 처치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전혀 생각도 않은 채.

레온하르트는 샤프 백작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이 사실상 황실 탓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를 제외하곤 원망하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샤프 백작이 그러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니, 취해야 했던 이유는 지켜야만 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브 루테와 소년은 달랐다.

그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잃었으니까.

마침내 결정을 내린 레온하르트는 눈을 떴다.

데이브 루테의 체념한 듯한 얼굴과 소년의 분노에 가득 찬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모양새로 고개를 숙인 셀린느도.

레온하르트는 바싹 마른 입을 적셨다.

“내가 이 마법을 무력화시킨다면 어떻게 할 건가.”

“……?”

데이브 루테와 소년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궁에 직접 잠입하기라도 할 건가? 폐하나, 전하를 암살하기 위해?”

“공자님, 농이 지나치십니다.”

데이브 루테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빨리 죽여 주십시오.”

레온하르트는 데이브 루테를 무시하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내가 마법만을 무력화시킨 채, 살려 보내 준다면 넌 어떻게 할 생각이지?”

“궁, 궁에 들어가서…….”

소년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렸다.

레온하르트는 자신 앞에 펼쳐진 광경에서 다시금 눈을 감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결국 소년은 살고 싶어 했다.

그동안 그가 봐 왔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데이브 루테는 소년의 곱절로 먹은 나이만큼이나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숨기는 데 능숙했지만, 소년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폐하나 전하를 암살한다면, 이들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레온하르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라쉬르를 휘둘렀다.

“……!”

라쉬르가 허공을 갈랐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레온하르트가 미친 줄 알았겠지만, 현재 그곳에 자리한 모두가 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레온하르트는 암살 마법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데이브 루테와 소년의 얼굴이 즉각 일그러지며 마법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레온하르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둘의 마법을 계속해서 부숴 나갔다.

“공자!”

소년이 악을 질렀다.

“왜, 그런 자들을 지키려는 거야! 백성 따윈 안중에도 없는 자들을!”

레온하르트는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 애썼으나 일그러지는 입매는 어쩔 수 없었다.

소년이 자신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왜일까.’

황제가 이 나라를 다스리고, 황태자가 그의 뒤를 잇는 건 당연했다.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는 그 사실을 추호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잔혹하게 처형당해야 마땅한 반역자였다.

하지만 백성들을 죽게 내버려 둔 황제의 행보는 레온하르트의 가슴속에 작은 틈새를 만들었다.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덮어 두었던 자그마한 틈새가, 이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균열로 되돌아왔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원망스러울 정도로 차갑게 식은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어떤 면에선 자신은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베르누이가는 4년 전, 황태자가 내린 임무보다 북부에 갑작스레 쏟아진 우두머리 마물의 퇴치를 우선시했다는 이유로 수도에서 쫓겨나듯 철수해야 했다.

리브론성에 베르누이가가 심어 놓았던 세력은 모두 축출당했다.

만약 자신이 대놓고 황실에 반기를 든다면 베르누이가는 물론, 북부 전체가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황제가 몇 달 전 그에게 은밀하게 속삭인 경고처럼.

레온하르트의 사색은 라쉬르의 움직임이 더뎌지게 만들었고, 자질이 뛰어난 마법사에게는 충분한 틈이 되었다.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며 잔뼈가 굵은 데이브 루테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

셀린느의 비명과 함께 레온하르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공격 마법을 그대로 맞이했다.

라쉬르를 휘둘러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방심한 탓인지 왼쪽 어깨를 다치고 말았다.

붉은 피가 팔뚝을 타고 땅에 떨어졌다.

레온하르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상처는 쓰라렸으나 이 정도는 마물이나 흑마법사를 상대했을 때 입은 것들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마물이나 흑마법사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데이브 루테의 마법은 그런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레온하르트가 데이브 루테를 무력화하기 위해 다시 라쉬르를 휘두르려 할 때였다.

거대한 빙벽이 땅에서 솟아올라 그와 데이브 루테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빙벽을 내리치기 직전, 간신히 라쉬르를 물릴 수 있었다.

셀린느가 이유 없이 자신을 방해할 리가 없었다.

“이 둘은 제가 붙들고 있을게요. 원래 하던 작업을……!”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데이브 루테의 공격을 받기 전 파훼하던 마법을 살폈다.

‘……이런.’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데이브 루테가 자신의 시선을 돌린 사이, 소년이 암살 마법을 빠른 속도로 보강한 모양이었다.

‘대단하군.’

급박한 상황임에도 레온하르트는 소년의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들이 셀린느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손쓸 수 없을 지경까지 흘러갔을 것이다.

빙벽 너머에서 비명과 신음이 들려왔지만 레온하르트는 신경을 쓰지 않고 암살 마법을 부수는 데 집중했다.

둘의 실력은 충분히 보았다.

‘셀린느가 훨씬 강해.’

문득, 두꺼운 빙벽 너머에서 셀린느가 자신의 생각을 읽고 미소 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레온하르트는 암살 마법을 조각 하나 남기지 않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셀린느는 빙벽을 내렸다.

소년과 데이브 루테는 허망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소년은 여전히 분이 가시지 않는 얼굴이었고, 데이브 루테의 주름진 얼굴에 눈물이 맺혔다.

공포에 기인한 눈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조용히 라쉬르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다시 묻겠다. 너희들을 살려 준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

데이브 루테와 소년의 눈이 커지는 동시에 입이 벌려졌다.

그제야 그들은 레온하르트가 조금 전 물었던 질문의 의미를 깨달은 듯했다.

하지만 둘 다 입만 뻐끔거릴 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내면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들이 부디 그들 자신을 위해 어리석은 대답을 하지 않기를 빌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데이브 루테였다.

“……하인리히를 데리고, 도망치겠습니다.”

“데이브!”

소년이 악을 쓰며 항의했으나 데이브 루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시는 황성에 발을 들이지 않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이게 공자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입니까?”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데이브 루테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공자님, 언제까지나 그렇게 사실 수는 없을 겁니다.”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셀린느도, 레온하르트도 말 한마디 않은 채 데이브 루테가 소년을 설득해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다음에야 레온하르트는 기나긴 한숨을 토해냈다.

“레온하르트…….”

어느새 셀린느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손에서부터 올라와 코끝을 간질였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손이 세상과 그를 잇는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붙들었다.

“고생했어요.”

“네가 더 고생하지 않았나.”

레온하르트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자신이 빙벽 너머에서 암살 마법을 부수는 데만 치중하는 사이 셀린느는 두 마법사를 막아냈다.

형체가 없는 마법을 부수는 것보다 살아 있는 사람을 상대하는 게 당연히 더 고생스러운 법이다.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레온하르트가 제일 힘들었잖아요.”

그 말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어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셀린느의 말이 맞았다.

오늘, 자신은 여태까지 애써 눈을 감아 오던 구렁텅이를 들여다보고 말았다.

어떤 방법으로도 메울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구렁텅이를.

더 끔찍한 건, 앞으로 그 심연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셀린느조차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다.

오직 그 혼자,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다시 셀린느의 목소리가 들리고 난 다음에야 레온하르트는 여태껏 자신인 침묵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온하르트, 더 들러야 할 곳이 있나요?”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엉망진창으로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땀투성이 얼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움직임.

확실히 셀린느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한시라도 빨리 황성을 떠나고 싶었기에,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북부로 바로 돌아가고 싶군. 물론 마차를 수배해서…….”

셀린느가 싱긋 웃었다.

“레온하르트, 그새 까마귀 고기라도 먹었어요?”

“까마귀 고기?”

영문 모를 말에 레온하르트가 멍청하게 되묻자, 셀린느가 품속에서 작은 물체를 하나 꺼냈다.

‘아.’

샤프 백작이 루를 데려가 달라며 도움을 청할 때, 셀린느에게 준 마력석이었다.

베르누이성으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이 남아 있는.

“하지만 피곤하지 않나. 그게 있으니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묵는 게 나을 것 같군.”

“레온하르트, 빨리 여기를 떠나고 싶은 거 아니에요?”

셀린느는 정곡을 찔린 듯한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저도 그렇거든요.”

잠시 후.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레온하르트와 셀린느를 뒤덮더니, 순식간에 베르누이성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좀 더 정확히는, 베르누이성의 외벽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셀린느의 안색을 확인했다가,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리브론성에서의 셀린느가 지쳐 보일 뿐이라면, 지금의 셀린느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이었다.

“정확도가 너무 떨어져요, 레온하르트…….”

아마도 마법 연습을 더 해야겠다는 말을 하려는 듯했다.

“신경 쓰지 마라. 난 이곳으로 온 게 더 좋으니.”

레온하르트는 한꺼번에 큰 마력을 쓴 부담이 온 듯 비틀거리는 셀린느의 손을 붙들며 대답했다.

“그런가요?”

셀린느가 미소 지었다.

쏟아지는 봄 햇살 같은 미소였다.

레온하르트는 충동에 따라 움직였다.

손을 붙드는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셀린느를 끌어안으며 그를 사로잡은 감정을 속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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