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외전 11
“감, 감사합니다.”
판게아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젓더니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원하는 게 있느냐, 젊은 베르누이야?”
“…….”
“눈에 갈망이 가득하구나.”
레온하르트의 목울대가 움직였지만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말하고자 하는 충동을 최대한 자제하는 듯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손을 잡았다.
만약 레온하르트가 원하는 것이 있고, 판게아가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이렇게 머뭇거리는 데엔 이유가 있을 터.
‘판게아에게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몰라.’
그래서 셀린느는 조용히 레온하르트에게 속삭이기만 했다.
“원하는 대로 해요, 레온하르트.”
판게아의 귀는 무척 밝은 모양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동굴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웃음소리를 토해 낸 걸 보면.
“그래, 원하는 걸 말해 보아라. 아이를 구해 준 일에 대한 작은 보답이다.”
“호의에는 감사드리나 더 이상 바라는 건 없습니다.”
“감히 내 앞에서 거짓을 고할 생각을 하다니. 그렇게 욕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
레온하르트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판게아는 고개를 움직여 셀린느를 가리켰다.
“젊은 마법사야말로 바라는 게 없다. 하지만 젊은 베르누이는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욕망의 냄새가 났지.”
셀린느는 반박하고 싶었다.
자신이 바라는 게 너무나 많다고, 너무 많아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판게아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그녀의 입을 꽉 다물게 했다.
“젊은 베르누이야, 이제 말해 보아라. 원하는 게 무엇이지?”
레온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제게 걸린 저주를, 풀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는 셀린느가 어떻게 코델리아를 죽였는지 기억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사람을 직접 죽인 셀린느의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졌는지도.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에게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밤마다 코델리아의 환상에 시달리곤 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았다.
그리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어떤 부류인지도.
셀린느는 결코 그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판게아가 껄껄 웃었다.
“그 말 한마디 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렸느냐?”
“……예.”
“이미 너희들이 루와 함께 들어올 때부터, 나는 네 저주를 풀어 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헌트에게 물어도 마찬가지 대답이 돌아왔을 테니.”
“사실이에요.”
셀린느가 레온하르트의 의문에 찬 시선에 응답했다.
“저도, 레온하르트의 저주가 완전히 풀렸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답은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없군.”
판게아가 레온하르트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육중한 꼬리로 얼음 바닥을 내리쳤다.
그녀의 입에서 눈처럼 새하얀 불길이 뿜어져 나와 레온하르트를 덮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하지만 판게아의 거대한 앞발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셀린느는 용에게 항의하려다가 판게아가 슬쩍 들어 올린 앞발 사이로 보이는 레온하르트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레온하르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판게아를 올려다보았다.
“제게, 무엇을 해 주신 겁니까.”
“저주의 파편을 없앴다.”
“파편이라니…….”
“오래된 저주는 이미 깨진 상태더군. 하지만 파편은 남아 있었고, 그 파편이 평생토록 널 괴롭힐 예정이었다.
“…….”
“이제 그것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안심하도록.”
판게아는 콧김을 내뿜으며 눈을 내리깔기 시작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별것 아니네.”
판게아가 느릿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십 년에 한 번, 운소렘이 나를 찾아오곤 했지.”
레온하르트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시초의 용이 방문을 허락한 건 십 년에 단 한 번.
황실은 제국에 큰일이 일어나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을 때만 판게아를 찾곤 했다.
자신은 십 년에 한 번 찾아오는 그 기회를 써 버린 것이다.
“그때마다 각종 부탁을 들어주었으나 반대로 도움을 받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에 대한 작은 보답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
“……!”
“그리고 이건 내가 도움을 받은 것이니, 운소렘에게 언제든 나를 찾아도 괜찮다고 전해라.”
판게아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동굴 전체에 진동을 일으켰다.
레온하르트조차 균형을 잡고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와 셀린느는 거의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았고, 먼지 사이에서 눈을 떴을 땐 거대한 용도, 자그마한 용도 사라지고 없었다.
“……가 버렸어요.”
셀린느가 적막 속에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안전할 거다.”
“맞아요.”
셀린느는 웃으려고 애썼으나 입꼬리는 자꾸만 일그러졌다.
“다시 볼 수 있겠죠?”
“그럼.”
레온하르트는 이상할 정도로 가볍게 느껴지는 몸으로 셀린느를 일으켜 세웠다.
셀린느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주가, 정말 완전히 사라졌을까요?”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목소리에서 그에 대한 걱정과 약간의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은 모르겠다.”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판게아의 불이 그를 덮쳤을 때, 그동안 자신을 뒤덮고 있던 흑마법사들의 기운이 사라지는 느낌은 받았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오랫동안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던 그 어둑한 기운과 저주의 연관성을 확신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에게 그 기운은 흑마법사들의 별것 아닌 부산물일 뿐이었으니까.
정말로 저주가 완전히 사라졌는지 알려면 황실 소속 마법사들의 검사를 받아 보아야 할 것이다.
-쾅!
그때, 얼음 동굴 전체가 다시금 진동했다.
마치 판게아가 나타났을 때처럼.
그들은 바싹 긴장했지만 동굴은 한 번 진동하기만 하고는 본디로 돌아갔다.
셀린느가 웃기 시작했다.
“의심하지 말라는 뜻, 같죠?”
“……그렇군.”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그렇다면…….’
판게아는 그가 가장 원하는 욕망을 손쉽게 읽어 내었다.
비록 그 힘을 여태까지 직접 목격한 적이 없었으나 숱한 기적을 만들어 낸 시초의 용.
‘저주가, 완전히 사라졌어.’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행이군. 네가, 더는 흑마법사들을 죽일 필요가 없어서…….”
“그게 문제예요?”
셀린느는 조금 토라진 얼굴이었다.
“레온하르트가 이제,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났잖아요!”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크게 달라진 건 모르겠지만, 딱히 나빠진 것 같지도 않네요.”
레온하르트는 도저히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셀린느를 꽉 끌어안았다.
셀린느는 놀라지도 않고 레온하르트의 품속에 그대로 안겼다.
‘……셀린느.’
어디선가 판게아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판게아가 말한 자신의 갈망이 진정 무엇인지 깨달았다.
겨우 저주의 남은 잔재에 대한 걱정 따위가 아니었다.
저주를 방지하기 위해 셀린느가 더는 흑마법사의 목숨을 끊을 필요가 없기를 바라는 배려도 아니었다.
그런 인간으로서 당연한 마음과는 거리가 먼, 들끓는 감정이 레온하르트를 지배했다.
‘저주가 없다면, 나는 셀린느에게…….’
판게아가 괜히 갈망이라고 표현한 게 아니었다.
여태까지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에게 감히 결혼을 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와 셀린느 사이에서 자손이 태어난다면, 죽거나 죽는 것보다 더욱 못한 삶을 살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제, 레온하르트를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충동적으로 셀린느를 붙들었다.
이곳이 청혼하기에 마땅한 장소가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셀린느는 이렇게 어둡고 추운 장소가 아닌, 화려하고 반짝이며 따스한 곳을 더 좋아할 테니까.
하지만 기적이 일어난 바로 이 장소에서 셀린느에게 영원을 청하고 싶은 충동이 레온하르트를 사로잡았다.
“셀린느.”
“네?”
사랑스러운 얼굴이 레온하르트를 갸우뚱하며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요?”
그는 바로 대답하려다, 우두커니 멈추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가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레온하르트를 불렀다.
‘하필……!’
레온하르트가 이를 으득 갈았다.
“데이브 루테가, 리브론성에 있다.”
“……!”
***
그들은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리브론성을 향해 달렸다.
이동 마법은 미리 준비해 두지 않으면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말을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셀린느는 이렇게 급하게 말을 달린 적은 처음이었지만, 동시에 조금 안도감을 느꼈다.
레온하르트는 더는 그녀를 유리 인형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속도가 느려진다 하더라도 같이 타야 한다고 우겼겠지.’
하지만 이제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자신을 따라오리라고 완전히 신뢰한 채 말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셀린느는 미소 지었다.
데이브 루테가 황성에 있다는 건 당연히 나쁜 소식이었지만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이제 저주에서 완전히 풀려났고, 그의 앞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마침내 리브론성에 도착했을 때, 셀린느와 레온하르트는 물론 말 두 마리조차 지쳐서 숨을 헐떡거렸다.
시종이 달려와 불쌍한 짐승들을 마구간으로 데려갔다.
레온하르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쉬는 게 좋지 않겠나?”
“저만요?”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어서 앞장서요, 레온하르트. 그 작자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죠?”
레온하르트는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내 저주는 완전히 사라졌어, 셀린느. 네 도움은 필요가 없어.”
“…….”
침묵이 내려앉았다.
레온하르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셀린느의 완고한 표정에서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천천히, 셀린느가 입을 열었다.
“그럼, 여태까지 레온하르트의 저주에 대한 방패막이로 저를 데리고 다닌 건가요?”
“당연히 아니다! 다만, 단지…….”
레온하르트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농담이에요.”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온하르트가 북부에서 수도까지 바로 달려오느라 지친 자신을 배려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잘 알았다.
사실 그의 판단이 맞았다.
지금 자신은 무척 지쳐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레온하르트 또한 지쳐 있지 않은가.
“레온하르트의 생각이 맞아요. 전 지금 피곤하고, 쉬고 싶어요.”
“셀린느.”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레온하르트와 함께 데이브 루테를 쫓고 싶어요.”
“……왜인가.”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의문에 차 있는 듯하여, 셀린느는 순간 웃어 버릴 뻔했다.
“정말 모르겠어요?”
그녀는 레온하르트에게로 한 발짝 다가갔다.
둘 사이의 거리는 한 뼘도 되지 않았다.
“저는 항상 레온하르트의 곁에 있고 싶어요. 레온하르트가 위험할 때나, 즐거울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
이번만큼은 셀린느는 자신이 무엇을 얘기하는지 알았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명백한 암시에 당황한 쪽은 레온하르트였다.
“셀, 셀린느.”
“그러면, 안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