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외전 10
셀린느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시초의 용?’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다.
셀린느는 베르누이성의 서재에 있는 거의 모든 관련 서적을 뒤져 보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중 어디에서도 시초의 용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황태자 역시 놀란 듯 레온하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초의 용이라…… 자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예.”
레온하르트는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압니다.”
셀린느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황태자를 관찰했다.
‘저 속 좁은 인간이, 또 화를 내지는 않아야 할 텐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자신이 레온하르트의 행동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던 시절은 지났다.
레온하르트의 행동 하나하나는 그녀의 심장을 하늘 끝까지 올려놓았다가 순식간에 땅 밑으로 떨굴 수도 있었으니까.
시초의 용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지만 레온하르트가 지금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다행히 황태자는 화가 난 기색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유를 듣기 전까지는, 허가해 줄 수가 없군.”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돌려 그들이 들어온 문을 바라보았다.
“전하, 괜찮으시다면 한번 저 밖으로 나가 보시겠습니까?”
“……?”
황태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흔쾌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잠시 후,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알현실 전체를 한가득 메웠다.
“이것 때문이었군!”
“그렇습니다.”
레온하르트가 문으로 다가가며 대답했다.
셀린느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루가 그녀를 보고 반가운 듯 날개를 파닥거리며 달려들었다.
“얘기는 들었다만……이렇게까지 큰 줄은 몰랐는데. 시종들이 제지하지 않던가?”
“제게 말입니까?”
레온하르트의 가벼운 농담에 황태자는 다시금 웃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간 큰 시종이 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그런데, 왜 이 용에게 판게아가 필요한 건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레이디의 곁에 있으면 되는 게 아닌가?”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셀린느에게 더 큰 짐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불편하고요.”
“레온하르트, 루가 알아듣잖아요…….”
“…….”
레온하르트는 입을 다물었으나 루는 심기가 불편한지 셀린느의 곁에 더더욱 가까이 엉겨 붙었다.
황태자는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저러면 확실히 곤란하긴 하겠군.”
“그리고, 또 다른 흑마법사가 이 용을 노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
셀린느는 아려 오는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루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레온하르트에게서 설명 한 번 듣지 못했지만, 그가 지금 무엇을 시도하려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시초의 용에게 루를 맡기려는 거겠지.’
자신 역시 평생 루를 데리고 다닐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당한 때가 되면 떠나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적당한 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꿰뚫어 본 것이다.
루는 미성숙한 용.
인간의 품에서 성숙해지려면 수백여 년은 걸린다.
셀린느가 늙어 죽고 난 이후에는?
대체 누가 아무런 사심 없이 덩치만 커진 용을 데리고 다닐 수 있다는 말인가?
어린 용들이 성장할 때까진 사실상 마력석 역할밖에 할 수 없는 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레온하르트의 말이 맞아. 코델리아만 루를 탐내었다는 보장도 없지.’
셀린느는 발개진 눈을 감추기 위해 빠르게 깜박거렸다.
그 어떤 흑마법사도 다시는 루에게 손을 댈 수 없게 해야만 했다.
황태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군. 자네가, 정확히 무얼 요청했는지는 알고 있겠지?”
“예.”
“레온하르트, 자네는 지금 제국의 10년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레온하르트는 똑바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가, 10년은 더 제국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
황태자는 웃음을 토해 냈다.
비웃음과는 거리가 먼, 경탄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야……. 좋다.”
그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레온하르트에게 쥐여 주었다.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잃어버리는 날엔 자네의 목이 달아날 것으로 알게.”
“명심하겠습니다.”
***
레온하르트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빠져나온 다음에야 셀린느에게 자신이 받은 것을 보여 주었다.
작은 손거울이었다.
“이게 뭐죠?”
“지도.”
레온하르트는 간단히 대답했다.
“이게 지도라고요?”
“판게아가, 첫 운소렘에게 준 선물이지. 이게 있어야 판게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
“전하께선 대단한 결단을 내리신 거다.”
셀린느는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황태자는 잔혹하고 염치를 모르는 인간쓰레기였으나 이번만큼은 레온하르트에게 큰 선물을 해 주었다.
“어떻게 쓰죠?”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거울로 셀린느의 얼굴을 비추어 주었다.
처음에는 금발 머리의 창백한 여자만이 나타났으나, 곧이어 그 얼굴은 잠든 용으로 천천히 바뀌었다.
셀린느는 용이 얼음 동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좀 더 들여다보자, 거울 속에 보이는 광경은 점점 넓어졌다.
용이 잠든 얼음 동굴은 동전 크기로 작아졌으며, 그 주위의 풍경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도저히 착각할 수가 없는 지형들을 알아보았다.
“북부에 있네요?”
셀린느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레온하르트가 거울을 가져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왜죠? 북부니까 훨씬 편할 줄 알았어요.”
“여긴 변방이야. 베르누이성에서 사흘은 말을 타고 달려야 할 거다.”
“그보다 더한 것들도 많이 해 봤는걸요. 이동 마법을 쓰는 건 어때요?”
“루까지, 옮길 수 있겠나?”
“…….”
말문이 막힌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 수십 명을 옮기는 것이야 어려울 일이 없었지만 루는 마력으로 가득한 존재.
그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거울을 품속에 소중히 집어넣었다.
“어서 출발하는 게 좋겠군.”
***
며칠 후.
레온하르트와 셀린느, 그리고 루는 정확히 거울에 나타난 얼음 동굴에 도달했다.
셀린느는 심각한 얼굴로 동굴에 먼저 들어가는 레온하르트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나에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지도를 받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였던 레온하르트는 북부에 가까워질수록 점차 우울해졌다.
셀린느가 그 이유를 캐내려고 해도 별것 아니라는 대답만 하며 좀체 알려 주지 않았다.
‘큰 문제가 아니라면 좋을 텐데.’
사실, 단지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 말하기 꺼려지는 문제일 뿐이라면 지금 당장 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큰 문제라면 가능한 빨리 알아서 그의 짐을 덜어 주고 싶었다.
‘레온하르트가 말하기 싫으면, 나도 강요할 순 없으니까…….’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가 가라앉은 그녀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곁에 다가와 몸을 비볐다.
‘너랑 헤어지러 온 건데, 바보.’
셀린느는 루의 등을 탁탁 쳐 준 다음, 동굴에 들어섰다.
얼음 동굴은 밖에 화사하게 봄꽃이 피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춥고 거대했다.
높이 자체는 웬만한 건물과도 맞먹을 정도였다.
아직 본격적인 얼음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곳곳에 맺힌 고드름들이 그들이 거울 속 장소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루는 기온이 맞지 않은 모양인지 떨기 시작했다.
‘겨울도 견뎌 냈는데, 왜 이러지?’
셀린느는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 루의 전신에 온기를 둘러 주었다.
-쾅!
셀린느는 바닥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루에게 온기 마법을 쓰자마자 거대한 파열음이 들리며 동굴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 앞서서 전방을 살피던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셀린느!”
그는 곧바로 라쉬르를 방패 형태로 변화시켜 그녀를 방어했다.
셀린느는 방패 밑으로 숨어들었지만 동굴의 흔들림은 점점 더 강해졌다.
“판게아 님!”
레온하르트가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크게 부르짖었다.
그 순간, 진동이 멈추었다.
하지만 셀린느의 놀란 심장은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크게 달달 떨렸다.
동굴 전체의 흔들림은 멈추었지만, 제법 거리가 떨어진 곳으로부터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육중한 발걸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쿵
-쿵
-쿵
거대한 은빛 용이, 동굴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셀린느는 숨을 집어삼켰다.
레온하르트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셀린느는 알 수 있었다.
이 용은, 이 제국의 그 무엇보다도 오래된 용이었다.
‘시초의 용이야.’
셀린느는 이유 모를 충동에 이끌려 입을 열었다.
“판게아 님.”
거대한 용의 입이 아주 약간 벌려지더니, 천둥 같은 목소리가 얼음 동굴을 때려 메아리가 울렸다.
“무슨 일로 내 잠을 깨우고, 내 아이에게 한낱 인간의 마법을 둘렀지?”
그 어느 인간의 목소리와도 닮지 않은, 위협적이며 힘이 넘쳐 흐르는 목소리였다.
“……!”
셀린느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판게아는 루를 자신의 아이라고 칭했다.
용들의 관계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생판 모르는 용을 자신의 아이라고 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셀린느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루의 알도, 북부에 있었어.’
그녀는 판게아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루의…… 이 아이의 어머니셨군요.”
“그렇다.”
판게아의 목소리는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서 네 조잡한 마법을 거두어라.”
셀린느는 황급히 온기 마법을 거두었다.
루는 겁을 먹은 듯 그녀를 완전히 둘러쌌지만, 셀린느는 빠르게 루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판게아가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보아하니, 내 아이 때문에 여기까지 온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코델리아가 그렇게 된 이후로, 그 어떤 운소렘도 용에 손을 대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저는 운소렘이 아닙니다.”
“그걸 내가 모를 것 같으냐?”
판게아가 명백히 비웃는 투로 얘기했다.
“운소렘은, 용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내 아이가 죽든 살든……관심이 없어 보였건만.”
셀린느는 판게아가 자신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천천히, 루를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어떻게 루가 자신을 떠나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설명했다.
모든 설명을 들은 판게아는 슬픈 눈으로 루를 바라보았다.
“이래서 아이를 낳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군. 하지만 누구나 실수를 반복하곤 하지…… 심지어 나조차도.”
“루를, 보살펴 주실 수 있나요?”
“그럴 수밖에 없겠군.”
판게아의 말은 일견 냉정하게 들렸지만 셀린느는 그 안에 담긴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데려와 주어서 정말 고맙다, 헌트와 베르누이.”
“저를 위해서였어요.”
셀린느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루를 위해서였겠지.”
셀린느는 조금 놀라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이 아이의 이름이, 루였나요?”
“네가 그렇게 지었잖나.”
판게아는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루 역시 다른 이름을 원치 않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