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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114화 (114/120)

114화.

외전 9

“그, 그런가요?”

“그래.”

레온하르트의 말을 끝으로 마차 안엔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셀린느는 그의 시선을 피하는 동시에 얼굴을 엿보기 위해 힐끗거리다가, 문득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레온하르트는 도저히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는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어요.”

셀린느는 바보가 된 기분으로 말을 계속 더듬거렸다.

“이제 알아서 다행이군.”

다행스럽게도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무거운 침묵이 마차에 가득했다.

셀린느는 자는 척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자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지치지도 않고 쿵쾅거리는 심장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숨소리가 깊은 잠에 든 것처럼 고르게 날 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조금 전 본 셀린느의 당황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셀린느.’

그는 셀린느가 완전히 잠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야 겨우 눈을 감았다.

그 끔찍한 밤으로부터 석 달이 지났으나, 그와 셀린느의 관계는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

물론 레온하르트는 더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셀린느에게 사랑을 속삭일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원에 대한 맹세는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었다.

방금처럼 셀린느가 그녀 자신조차 당황할 정도로 앞서 나갈 때, 그 위에 슬그머니 묻어가는 것 외에는.

세간의 상식으로 레온하르트의 태도는 셀린느를 가지고 노는 것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었다.

레온하르트는 바보도, 귀머거리도 아니었기에 이미 비슷한 헛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금 맹한 구석이 있는 셀린느는 모를 수도 있었지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셀린느는,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가.’

레온하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럴 리가 없었다.

어떤 여자가 영원을 맹세하지도 못하는 남자의 곁에 머물고 싶어 하겠는가.

‘……아.’

순간, 뼈저린 깨달음이 레온하르트의 머리를 덮쳤다.

셀린느는 그가 결코 그녀에게 청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당연히 알고 있을 줄만 알았는데.’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에 대해선 이름과 라쉬르 외엔 아무것도 몰랐었다.

심지어 결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조차 몰랐다.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어느 날, 말은 해 주었긴 했으나 그 이유는 모를 것이다.

‘얘기해야 해.’

레온하르트는 눈을 끔벅거리며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숱하게 많은 마법사들을 죽인 것치고는 제법 깨끗한 손이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것들만 일그러지는 게 나았을 것이다.

흑마법사들인 남긴 저주는 그의 미래를 일그러뜨렸으니까.

셀린느를 희생시켜 폭군이 되는 미래는 피한다고 가정하자.

그의 후손은 누구 한 명 제대로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저주는 남아 있었다.

여태까지 그 문제는 레온하르트에게 아무런 짐이 되지 못했다.

후계 문제야 건강한 동생이 둘이나 있으니 훗날 태어날 조카를 입양하면 되었고, 여태껏 인생의 동반자라 생각하고 싶은 여자가 없었으니까.

셀린느 또한, 그와 같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만약 그 눈 내리는 황무지에서 셀린느가 그에게 입을 맞추어 오지 않았다면 레온하르트는 평생 자신의 마음을 숨겼을 것이다.

하지만 셀린느는 항상 그랬듯, 그녀의 마음을 내어 보이며 그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그가 결코 셀린느에게 청혼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셀린느를 속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향해 손을 살짝 뻗었다가 다시 오므려 주먹을 쥐었다.

지금 당장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언제 도달할지 모르는 미래가 문제였다.

언젠가, 셀린느는 자신이 왜 그녀에게 영원을 맹세하지 않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처음엔 단순한 의문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결국엔 그녀에게 털어놓아야 할 것이다.

자신은 결코 함께 미래를 생각할 만한 남자가 아니며,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가라고.

그녀의 영원한 행복을 빌어 주겠노라는 거짓말과 함께.

‘…….’

레온하르트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눈을 뗄 수 없는 셀린느의 모습에서 잠시나마 도망치고 싶었다.

눈을 떴을 때, 레온하르트는 결심했다.

‘북부로 돌아가면, 모든 걸 말해야겠어.’

그리고 셀린느가 그의 마음을 받아 주는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생각지도 못하던 아주 먼 예전의 결심처럼 한 발짝 물러날 것이다.

그때까지는, 셀린느의 곁에서 그녀의 연인 행세를 할 것이다.

비겁한 결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슴 한편에, 평생토록 간직할 행복의 한 조각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으니.

***

셀린느는 뺨에 눌린 자국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정, 정말로 자 버렸네…….’

레온하르트의 집요한 시선이 불편해 열심히 조는 척을 하다가 그만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고개를 들어 보니 레온하르트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셀린느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창문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어디쯤인가요?”

“많이 남았다.”

레온하르트는 짤막하게 대답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

셀린느는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어젯밤과 정반대인 형국이 아닌가.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럴 리가 있나.”

“그건 그렇죠.”

셀린느는 자연스레 레온하르트의 곁에 붙어 앉아 그의 온기를 느꼈다.

레온하르트의 몸이 즉각적으로 뻣뻣하게 굳어져 셀린느는 웃고 말았다.

“레온하르트, 갑자기 왜 이래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말을 하는 도중에도 몸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죠?”

“아니.”

“아니면, 이상한 생각이라도 했어요?”

“…….”

레온하르트가 대답 대신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셀린느는 다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하지만 셀린느는 갑작스러운 충동에 힘입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레온하르트가 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려 줄 수 있어요.”

“뭐지?”

레온하르트의 말은 다소 건성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살짝 오기가 생긴 셀린느는 몸을 일으켰다.

“……!”

부드러운 입술을 느낀 레온하르트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감겼다.

그는 셀린느를 자신의 몸 쪽으로 힘주어 끌어당겼다.

이 모든 순간을 가슴에 새기면서.

***

‘석 달 만이네.’

셀린느는 우뚝 선 리브론성을 올려다보며 잠시 감상에 잠겼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리브론성의 모습은 초록빛 연기로 가득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으나 지금 성의 모습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왜 그러지?”

“그냥, 오랜만이라서요.”

“그렇군.”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리브론성에 온 건 석 달 만이었다.

북부로 돌아간 직후, 라쉬르를 회수하기 위해 되돌아가긴 했으나 회수하자마자 곧바로 셀린느가 기다리는 베르누이성으로 향했으니까.

“그리웠던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셀린느는 설핏 웃었다.

“전 베르누이성이 좋아요.”

“……다행이군.”

레온하르트의 대답은 아주 작은 멈칫거림 이후에 딸려 나왔다.

그들은 천천히 황제가 기다리는 알현실로 향했다.

다행히 루는 알현실 문밖에서 멈추었다.

문이 루가 들어가기엔 지나치게 작았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알현실엔 황제와 황태자뿐이었다.

코델리아 운소렘에 대한 모든 사실은 기밀이었으니까.

셀린느는 황태자가 평소의 경계심 가득한 얼굴 대신,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레온하르트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온하르트는 바닥에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프레데릭의 아들 레온하르트가 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일어나.”

황제가 손을 휘휘 저었다.

“제비붓꽃에 대한 이야기라는 건 들었다…….”

황제는 태연하게 보이려 노력하는 듯했으나 흐려지는 말꼬리는 숨기지 못했다.

‘제비붓꽃은 암호명이겠지.’

“……예.”

레온하르트는 품속에서 장신구 하나를 꺼내서, 두 손으로 공손하게 황제를 향해 내밀었다.

황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장신구를 건네받았다.

자수정과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정교한 백금 팔찌가 환하게 빛났다.

“이건…….”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으나, 황제가 팔찌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남아 있는 유해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였고, 한때의 신분을 생각하여 정중히 보내 드렸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입에 침 하나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셀린느는 그가 코델리아의 남은 잔재들을 대충 불살라 버린 걸 기억했다.

그마저도 일종의 장례 의식이라기보단, 흔적을 완전히 없애는 뒷수습에 가까웠다.

“……고생 많았다.”

황제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중얼거리더니,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몸이, 좋지 않구나. 보고는 네가 받거라.”

“알겠습니다.”

황태자는 조금 성급할 정도로 빠르게 대답했다.

황제는 브로치를 꼭 쥔 채 명백히 충격을 받은 얼굴로 비틀거리며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셀린느는 그녀가 여태까지 본 황실 일가의 모습 중 가장 나약해 보이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황태자는 황제가 완전히 알현실을 나갔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레온하르트, 말해 보게. 그 마녀가…… 어떻게 죽었지?”

황태자의 목소리에는 기묘한 흥분이 서려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그들이 코델리아와 어떻게 조우했는지, 그리고 그녀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설명했다.

단 하나, 실제로 코델리아의 목숨을 끊은 건 셀린느라는 점은 숨기면서.

레온하르트가 설명을 끝내자마자 황태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를 향해 성큼 걸어갔다.

‘……!’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황태자가 레온하르트를 얼싸안은 것이었다.

아주 잠시간이었고, 황태자는 곧바로 레온하르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지만 그의 눈은 경탄과 기쁨으로 빛났다.

“자네가, 그 마녀를 끝내 주다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 해야 할 일이었지. 하지만 여태까지 자네가 한 그 어떤 해야 할 일보다도 기쁘군.”

“전하의 기쁨이 곧 제 기쁨입니다.”

황태자는 잠시간 알현실 안을 서성였다.

“이걸 어떻게 치하해야 할지 모르겠군.”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게.”

황태자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우리 제국에 도사리는 망령 하나를 없애 주었어…… 어찌 아무런 포상 없이 지나갈 수가 있겠나?”

황태자가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물론 자네는 바라는 게 있을 사람이 아니지. 이미 제국이 줄 수 있는 건 모두 가졌으니까.”

“…….”

레온하르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건 어떤가.”

황태자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서렸다.

“면책권을 주겠네.”

“이미, 저는 상당한 면책권이…….”

“그런 말이 아니야.”

황태자가 고개를 저었다.

“설령 황족을 시해한다 할지라도 면책이 가능한 증서를 주겠네.”

셀린느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황태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설령 주신다 한들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권한을 제가 가지는 것 자체가, 불경이니까요.”

“그런가?”

황태자는 명백히 실망한 듯했다.

셀린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큼은 황태자는 아무런 꿍꿍이 없이, 순전한 호의와 기쁨에서 무리한 제의를 한 듯했다.

“그럼 정녕, 원하는 게 없다는 말인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만……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정말인가?”

“예.”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흘낏 바라보았다가 말을 이었다.

“시초의 용, 판게아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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