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외전 8
셀린느는 이제 마력의 흐름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를 위한 저주는 그녀를 덮쳤으나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지나갔다.
등허리에 소름이 쭈뼛 돋는 게 전부였다.
레온하르트가 여전히 그녀의 머리에 턱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그때처럼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레온하르트가 이자를 죽이는 것보다는 나았어요.”
셀린느는 진심으로 말했다.
게임은 끝났고 레온하르트는 악역이 되는 운명에서 빠ㅌ왔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이 촘촘하게 짜 놓은 저주가 사라져 버린 건 아닐 터.
안이하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에게 흑마법사들을 찾아가 처치하는 방법에 대해 얘기했으나, 극도의 거부 반응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 이유를 잘 알았기에 강력히 주장할 수도 없었다.
‘이젠 내가 되살아나지 않으니까.’
좋든 싫든, 이제 셀린느는 완전히 이 세계의 사람이다.
이전처럼 영원히 되살아나는 플레이어라는 점을 무기로 삼아 멋모르고 사방에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셀린느는 조용히 레온하르트의 품속에서 빠져나왔다.
“빨리 내려가요. 루가 불안해하니까…….”
“잠깐만.”
레온하르트는 코델리아의 잔해로 성큼 다가가 라쉬르로 그 안을 뒤적였다.
‘……역시.’
반짝이는 무언가가 오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검은 피 사이에서 빛났다.
“그게…… 뭐죠?”
“황녀의 표식일 거다.”
“…….”
“코델리아 운소렘은…… 자신이 제국의 황녀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들은 적이 있다.”
제국을 위해, 흑마법사가 될 정도로.
레온하르트는 뒷말은 삼켰다.
동기가 어찌 되었든 간에 흑마법사가 된 건 그녀 자신의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다른 부산물들은 무시한 채 반짝이는 장신구만을 집어 들었다.
‘리카르도 전하께서 좋아하시겠군.’
뒷정리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가던 도중, 셀린느가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러지?”
“……데이브 루테를, 깜박했네요.”
“일부러 내버려 둔 줄 알았는데.”
“레온하르트!”
“이미 그자는 도망쳤을 거다.”
레온하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셀린느가 데이브 루테를 제압할 수 있었던 건 타고난 마력량의 차이 덕분.
하지만 셀린느는 코델리아를 죽이기 위해 마력을 쏟아부었고, 빠져나간 마력만큼의 차이는 데이브 루테가 멀리 도망치게 하는 데 충분했을 것이다.
데이브 루테 또한 실력자였으니.
그 사실을 설명하자 셀린느는 얼굴을 찡그렸다.
“왜 진작 설명하지 않았어요?”
“쫓아가기는 늦었으니까.”
“…….”
“그리고, 도망치지는 않았을 거라는 예감이 드는군.”
“설마, 샤프 백작님께 다시 빌붙으려고 할까요?”
“글쎄다.”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코델리아에게 협조한 이유가 있을 터. 그게 해결되기 전까진 이곳을 떠나진 않겠지.”
“뭘까요?”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추측이 가는 건 있었지만, 셀린느에게 얘기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았다.
확실해졌을 때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
“공자!”
샤프 백작은 그들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달려 나왔다.
“무사히 다녀오셨군요. 근데, 데이브 루테는……?”
레온하르트는 간단히 내뱉었다.
“흑마법사의 하수인이었습니다.”
“……!”
샤프 백작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서 얘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샤프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미 데이브 루테가 흑마법사의 하수인이라는 것만으로도 민감한 상황.
그보다 더 조심스레 얘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후.
샤프 백작은 창문 하나 없는 자그마한 밀실에서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군요. 코델리아 황녀님이…….”
“존칭을 붙이지 마십시오.”
레온하르트가 나직이 경고했다.
샤프 백작이 코델리아 운소렘의 운명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샤프 백작에게 코델리아 황녀가 사실 흑마법사였고, 그녀의 영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선 황실의 허가부터 받아야 했을 테니까.
“지금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래도 한때는 황녀였으니까요.”
“제가 알기론, 두 분은 만난 적이 없었다고 압니다만.”
“예.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황녀님이 그렇게 되셨으니까요.”
샤프 백작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황녀님이니까, 동경했죠. 워낙 뛰어나신 분이기도 했고. 그분이 사실 돌아가신 게 아니라는 사실을 들은 건 몇 년 전인데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네요.”
“조금 놀랐습니다.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건 맞습니다.”
샤프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선 항상 무언가를 두려워하셨습니다. 전 그 이유를 정식 후계자가 되기 전까진 알 수 없었죠. 제가 정식 후계자가 된 날…… 아버지께서 알려 주시더군요.”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샤프 백작이 곧 말할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황녀님께선 황실에서 쫓겨난 이후, 가장 먼저 이곳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까지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던 터라, 아버지께선 모든 걸 내어 주셨죠. 성주와 후계자만이 알 수 있는 광산의 비밀 출입구까지도…….”
“그럼, 코델리아는 그동안 남부에 있었던 겁니까?”
샤프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시도는 했지만, 잘 맞지 않았던 듯합니다. 대신 미래를 위해 광산에 비축해 두었던 마력석들이 상당수 사라졌죠.”
“……비싼 수업료를 치르셨군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다소 차갑기까지 한 어투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지만, 샤프 백작은 도리어 수긍했다.
“잘못된 선택이었죠. 황녀님께 줄을 대려 하다니. 그 뒤로 황실과 저희 가문의 사이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고요.”
셀린느는 깜짝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황실이 남부의 절박한 구조 신호를 거부한 건 뿌리 깊은 원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한편으론, 황녀가 흑마법사임을 숨긴 황실에 근본적인 잘못이 있지 않은가 싶었으나 이 자리에서 꺼낼 말은 못 되었다.
“……구조 요청을 거절한 건, 큰 실수였습니다.”
레온하르트의 말에 주어는 없었으나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고맙군요.”
샤프 백작은 딱딱하게 굳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북부도 조심하십시오. 근래 들리던 소문이 보통이 아니던데…….”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언제든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하셔도 됩니다.”
“든든하군요.”
레온하르트는 잠시 감사를 표하고는 일어섰다.
“지금 당장, 리브론성까지 갈 마차를 내어 주실 수 있습니까?”
“당장, 말입니까?”
샤프 백작은 잠시 멍한 얼굴이더니 이내 미소 지었다.
“공자답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셀린느는 푹신한 방석으로 가득한 마차에 편안하게 몸을 뉘었다.
이제 그녀와 레온하르트는 같은 마차를 써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따로 떨어진다는 건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피곤해…….’
리브론성으로 떠나는 데까진 제법 시간이 걸렸다.
순전히 루 때문이었다.
루는 한사코 마차 안까지 따라오려 하더니, 화려한 마차 두 대를 부수고 난 다음에야 결국 포기한 채 마차의 지붕 위에 올라타는 걸 선택했다.
샤프 백작은 처음에는 각종 세공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귀빈용 마차들을 내놓았지만, 다섯 번째 마차가 부서진 이후엔 포기하고 튼튼한 짐마차를 준비해 주었다.
짐마차의 내부는 하인이 열 명이 넘게 달려들어 꾸몄기 때문에 무척 아늑했다.
레온하르트 역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따뜻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 피곤했어요.”
“고생했다.”
“데이브 루테는 쫓지 않아도 되나요?”
“…….”
레온하르트는 잠시 망설였다.
“데이브 루테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나는, 오직 흑마법사 혹은 흑마법사로 의심되는 자만 처단할 수 있다.”
“……!”
“저런 자들을 꽤나 봐 왔다. 아직은 흑마법사가 아니라는 점을 이용해 나를 농락하려는 자들을…….”
레온하르트는 씁쓸하게 얘기했다.
“쫓아서 붙잡는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가둘 순 있잖아요!”
“그럴 권한조차 없다. 여기가 북부라면 후계자로서 즉결 처분을 내릴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니.”
침묵이 흘렀다.
셀린느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지만, 그 이유를 캐내기가 조금 두려웠다.
“……레온하르트, 그 이유만은 아니죠?”
레온하르트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이 맞는다면, 제가 데이브 루테를 땅에 박아 둔 것도 문제가 되잖아요. 전 귀족조차 아닌걸요.”
“헌트가는 최소한 두 대 위까지는 귀족이었어.”
레온하르트가 정정했으나, 셀린느는 물러서지 않았다.
“원래의 저는 귀족도 뭣도 아니었어요. 데이브 루테보다 더 신분이 낮은 존재였다고요.”
순간, 말도 안 되는 충동이 레온하르트의 마음속에 일었다.
셀린느가 한낮 백작가의 마법사보다도 신분이 낮아 문제가 된다면, 그와 결혼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었기에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심호흡하며 최대한 자신을 제어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가 걱정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뭘 잘못 말했어요?”
“……아니.”
레온하르트는 한숨과 함께 대답을 토해 냈다.
“네 말이 맞다. 데이브 루테를 쫓지 않은 덴 다른 이유가 있었어.”
“뭐죠?”
“데이브 루테에게 표식을 박아 두었다.”
“……!”
“그자는 분명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어. 그게 코델리아와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자를 죽인다면 진실을 영영 모르게 되겠지.”
“왜 그걸 말을 안 했어요!”
셀린느는 진심으로 분개한 얼굴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충분히 나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네게 더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는 걸 느꼈다.
마침내 게임이 무너져 내린 날부터 지금까지, 그녀와 레온하르트는 별달리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우두머리 마물을 여럿 잡기는 했으나, 스테이지를 거치며 단련된 실력 덕에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다르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코델리아를 죽이려는 레온하르트를 막고 대신 죽였기 때문일까…….’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선, 고마워요. 절 그렇게 생각해 주어서.”
“…….”
“하지만, 저는 이제 레온하르트가 곁에 없으면 살 수가 없는걸요.”
“……!”
셀린느가 자신의 입을 막는 동시에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무슨 말을……!’
셀린느는 수습을 하고 싶어서 입을 뻐끔거렸으나 한 번 내뱉은 말은 결코 되돌릴 수가 없었다.
땅에 고개라도 처박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수그린 셀린느에게 떨리는 말 한마디가 들려왔다.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