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외전 6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셀린느는 데이브 루테의 목소리가 불안으로 떨린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라쉬르의 검날에서 푸른빛이 사라지는 대신 날카로운 면에 데이브 루테의 붉은 피가 맺혔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데이브 루테가 흑마법사가 아니라, 흑마법사의 협조자에 불과하다는 의미였으니까.
물론 샤프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라쉬르를 거두었다.
“아직까지는 아니군.”
“……커억!”
데이브 루테는 목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저, 전.”
“변명하지 마라. 베어 버리기 전에.”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겁을 먹은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오직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알았나?”
“알겠습니다.”
데이브 루테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느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따라오겠다고 한 것도, 전부 수단이었어.’
그녀는 데이브 루테 또한 흑마법사에게 조종당한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으나, 레온하르트의 반응을 보면 자발적으로 돕는 이인 듯했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흑마법사가 되지도 않는 마법사가, 흑마법사를 도울 이유가 대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그자의 목적은 뭐지?”
“용만, 죽이면 된다고…….”
“……!”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루를요? 왜죠?”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테다. 네겐 말하지 않더냐?”
“예…….”
셀린느는 불안하게 루를 바라보았다.
결계에 부딪혔다 떨어진 루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어떤 문제가 생겼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자는 지금 어디 있지?”
“모, 모릅니다!”
데이브 루테는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레온하르트는 다시금 라쉬르를 들어 올렸다.
“살려 주십시오, 공자님! 공자님께선 오직 흑마법사만 벌하시지 않습니까!”
소름이 쭈뼛 끼쳤다.
데이브 루테의 말이 맞았다.
레온하르트는 오직 흑마법사만 베었다.
가끔 예외가 생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레온하르트가 상대방을 흑마법사로 착각했을 경우뿐이었다.
셀린느는 데이브 루테를 기가 질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레온하르트의 원칙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자가 나타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네게 얻어 낼 게 있으니, 살려는 두겠다. 하지만 만약 거짓말을 한다면…….”
“예, 알겠습니다.”
데이브 루테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예.”
“왜 하필 여기였지?”
레온하르트가 아까부터 셀린느가 궁금해하던 점을 물었다.
데이브 루테가 고개를 숙였다.
“여기가, 공자님과 셀린느 루테를 속이기 제일 쉬울 거라고 하더군요.”
셀린느는 얼굴을 찌푸렸다.
데이브 루테의 말들은 언뜻 보기에는 하나같이 쓸모가 없는 듯했으나 일관성은 갖추고 있었다.
‘흑마법사가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한 건 루를 죽이기 위해. 그리고 하필 이곳이었던 이유는 우리를 속이기 가장 쉬운 장소니까…….’
셀린느는 용을 죽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히려 광기 들린 용으로 만드는 게 더욱 쉬웠다.
‘흑마법사의 목표 또한 그거일 거야.’
자연히 따라 나오는 의문이 있었다.
‘왜?’
흑마법사의 최종 목표는 레온하르트의 죽음일 터.
루가 셀린느와 레온하르트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루 한 마리를 광기 들리게 만들기 위해 흑마법사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빠트려 가며 그들을 유인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셀린느의 생각은 갑작스레 들려온 소음 때문에 강제로 중단되었다.
루가 다시금 불안하게 날개를 퍼덕였다.
셀린느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루 때문이 아니었다.
공기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닷없이 드러낸 사악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타나라.”
레온하르트가 명령했다.
하지만 사악한 기운은 점점 더 강해질 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리며 마력을 탐색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마침내 사악한 기운은 강해지다 못해 그들을 완전히 뒤덮을 정도였다.
셀린느는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거렸다.
흑마법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번은 유독 달랐다.
반항 한 번 해서는 안 될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셀린느!”
레온하르트가 바닥에 함께 주저앉아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전 괜찮아요, 레온하르트. 그냥, 너무 갑갑해서…….”
레온하르트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셀린느는 그의 눈에서 염려와 사랑, 고통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역시 저자를 죽여야겠어.”
레온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그러지 말아요.”
“……흑마법사에게 자의로 협조했는데?”
“레온하르트가 여태까지 지켜 오던 원칙을 저 때문에 깨는 것이야말로 정말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으니까요.”
침묵이 흘렀다.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셀린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셀린느는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알겠다.”
그 한마디로, 레온하르트는 생애 그 어떤 결정보다도 힘들게만 느껴지는 결정을 내렸다.
흑마법사가 나타날 때까지, 셀린느는 그저 바닥에 계속 앉아만 있기로 했다.
데이브 루테는 셀린느에 의해 얼음으로 돌돌 말린 채 땅에 박혀 있었다.
그도 백작가의 마법사가 될 정도로 실력자이니만큼 얼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와 레온하르트는 돌아다니는 건 오히려 흑마법사에게 먹잇감을 주는 일이라는 데 동의했다.
“어쨌든 루가 여기 있잖아요. 흑마법사는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또, 이 식물들을 조절해서 우리를 공격하게 만들 수도 없지. 오히려 흑마법사의 공격이 이것들 덕분에 억제될 거야.”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는 이미 결계에 대한 분석을 끝냈다.
데이브 루테가 그들이 결계에 대해 눈치채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던 이유가 있었다.
결계는 알아채기는 어렵지만, 일단 한 번 알기만 하면 부수는 건 유리잔을 깨는 것만큼 쉬웠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결계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흑마법사는 상대도, 장소도 완전히 잘못 골랐다.
‘갈기갈기 찢어 주겠어.’
얼마나 지났을까.
셀린느와 레온하르트는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흑마법사가 나타나서가 아니었다.
사악한 기운은 심해지다 못해 땅을 잠식했고, 푸르고 기세등등하기만 하던 식물들이 점차 시들어 갔다.
급기야 그들의 시야에 살아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정도였다.
“모습을 드러내라.”
레온하르트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아주 천천히,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길에서 마주쳤다면 10초 뒤 잊어버렸을 정도로 흔한 외양의 여자였다.
하지만 셀린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이 흑마법사의 연령대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또한 흑마법사의 얼굴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으레 가지고 있는 특정할만한 특징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상해.’
셀린느는 곧 그 사실이 특징점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흑마법사의 머리카락 색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 세계에서 흔하디흔한 금발 같기도 했고, 정반대인 흑발 같기도 했다.
은발이라고 생각하니 은발처럼 보였다.
‘……이것도, 현혹이야.’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아는 현혹 마법은 금발을 은발로 보이게 하는 수준의 난이도 낮은 마법뿐.
이 흑마법사는 현혹 마법만큼은 이미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모습을 드러내는 게 좋을 텐데.”
“이게 본모습이다, 젊은 베르누이.”
흑마법사는 순간 귀를 막고 싶어질 정도로 송곳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배짱으로 우리를 여기로 불렀지?”
“베르누이, 나는 네겐 관심 없다. 네 작은 애인에게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저 용은 넘겨줘야겠어.”
흑마법사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셀린느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루가 몸부림쳤다.
“루!”
셀린느는 루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시들어 죽은 풀들 사이에 나뒹굴었고, 루는 울부짖으며 흑마법사에게로 질질 끌려갔다.
흑마법사는 반쯤 황홀경에 빠진 듯한 눈으로 루를 바라보았다.
“완벽해…… 인간에게 의지하는 성숙한 용이라니.”
푸른 빛이 셀린느의 눈앞에서 번쩍였다.
레온하르트가 셀린느의 앞을 막아선 모양새로 우뚝 서 있었다.
하늘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곧바로 깨달았다.
‘레온하르트가…… 결계를 깼어.’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네 실수다, 흑마법사.”
흑마법사는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음 순간.
흑마법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셀린느는 어안이 벙벙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흑마법사의 흔적은 말라 죽은 식물들에서만 보일 뿐이었다.
어느새 루가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셀린느를 부드럽게 일으켰다.
“가자.”
셀린느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그들은 데이브 루테를 계속 땅에 박아 둔 채 흑마법사의 흔적을 쫓았다.
결계가 깨어지고 나니, 지천으로 널린 게 흑마법사의 흔적이었다.
“이 흑마법사는 결계 안에서만 강력하다. 찾아내기만 하면 그 뒤는 쉬워.”
“그럼 제가 느낀, 그 강력한 흑마법도…….”
“그래. 현혹이다.”
“루가 끌려간 것도요?”
“그래.”
레온하르트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의 현혹 마법은 나도 여태까지 본 적이 없어.”
“대단하군요.”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레온하르트가 동의했다.
“그래. 그래서…… 다들 흑마법사가 되는 거지.”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손을 꼭 쥐었다.
“다들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미안하다. 실언이었군.”
“앞으론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줘요.”
레온하르트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의 흔적은 자그마한 토굴에서 끝이 났다.
레온하르트가 코웃음 쳤다.
“어떻게 이것들은 모두 똑같은지.”
“들어갈까요?”
“보나 마나 이것도 결계로 가득할 거다. 안으로 들어가는 건 목을 내어주는 것밖에 안 돼.”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토굴 입구에 내리찍었다.
동시에 극심한 진동이 라쉬르로부터 시작되어, 땅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수십 개는 되는 듯한 결계가 진동에 의해 깨어지는 걸 느꼈다.
안에서, 흑마법사가 비적비적 걸어 나왔다.
결계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해, 그녀 본연의 모습으로.
“……!”
셀린느는 눈을 의심했다.
나이대를 알 수 없는 건 여전했지만 얼굴은 달랐다.
흑마법사는 결코 얼굴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사람을 무척 닮아 있었다.
‘……황태자?’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쓰디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상하다 싶었다. 용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현혹 마법에 통달한 자라니…….”
자신의 정체가 간파당했음을 직감한 흑마법사는 레온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나를 죽일 수는 있겠나? 젊은 베르누이. 이 제국의 황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