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외전 5
셀린느는 루가 샤프성에 남아 있기를 바랐으나 용에게 무언가를 강요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루는 셀린느의 옆에 착 달라붙어 한시도 그녀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아직도 자기가 새끼라고 생각하는 것 같군. 가능하기만 한다면 손목에 달라붙겠어.”
레온하르트는 조금 질린 얼굴이었다.
셀린느의 생각은 달랐다.
루는 아직도 자신이 새끼용이라고 생각하는 멍청한 용이 아니었다.
“새끼는 맞잖아요. 다 크기 전에 날아갔으니까.”
“자신이 선택한 성장이 아닌가.”
“예언이었어요.”
레온하르트는 단 한마디로 셀린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이해한 듯했다.
“……어쩔 도리가 없었겠군.”
“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도 분명 그렇게나 일찍 성장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 거예요.”
용의 성장은 오직 스테이지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예정된 일이었으니.
레온하르트가, 그 지하 미로에서 세뇌당하여 셀린느를 죽였던 것처럼.
레온하르트는 연민 어린 눈으로 루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것.”
매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으나 셀린느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루 외에도 그들과 합류하고 싶어 하는 자가 있었다.
데이브 루테였다.
셀린느는 물론 레온하르트조차도 놀랄 일이었다.
“진심인가?”
레온하르트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예.”
데이브 루테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물론, 공자님께서 저를 믿지 못하신다면…….”
“……그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도록.”
레온하르트는 데이브 루테를 지그시 응시했다.
“다만, 누군가의 명을 받지 않은 마법사가 내 임무에 따라나서는 건 처음이라서.”
“정말입니까?”
데이브 루테는 조금 전의 레온하르트만큼이나 놀란 듯했다.
“전, 당연히 평생의 영광이라 생각하여 백작님의 허락을 구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셀린느는 그의 기분이 근래 어느 때보다도 좋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샤프 백작이 말한 황무지를 향해 함께 말을 달렸다.
루는 신기할 정도로 말과 같은 속도를 유지하며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았다.
셀린느와 레온하르트 둘뿐이었다면 따로 안내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브 루테는 백작령의 토박이였기 때문에 그들만으로도 충분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기입니다.”
데이브 루테가 말을 멈추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그저 평범해 보이는 산이었다.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산사태가 일어났다고 들었는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네요.”
“백 년 전이니까요.”
데이브 루테는 가볍게 대답하더니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길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데이브 루테는 마법을 이용해 풀숲을 헤치며 산을 올랐고, 남은 둘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엉망진창으로 자란 잡초 더미는 마법 덕분에 말끔히 해결되었지만, 오솔길 하나 없는 산을 오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셀린느는 몇 걸음마다 서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레온하르트가 걱정스레 그녀의 팔을 붙잡고 지탱했다.
“데이브 루테. 좀 천천히 가도록.”
“아, 죄송합니다.”
데이브 루테가 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몸이 많이 약하신 모양이군요.”
“그래.”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셀린느는 자신이 유리가 아니라고 항변하려 했지만 레온하르트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사르르 풀리고 말았다.
“셀린느, 천천히 가도 괜찮다. 무리하지 말도록.”
“레온하르트…….”
셀린느도, 레온하르트도 데이브 루테를 의식하여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손을 꽉 쥐었다.
손에서 기분 좋은 냉기가 느껴졌다.
“뜨겁군. 열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셀린느는 피식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 뜨거운 게 정상이잖아요!”
그녀는 어리둥절해 보이는 데이브 루테에게 이제 자신은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고 세 명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는 그들의 머리 위를 빙빙 돌았다.
그 모습이 제법 즐거워 보여 셀린느는 안심했다.
흑마법사의 기운을 미리 감지하고 겁을 먹을지도 몰라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산 중턱에 올라섰다.
여전히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데이브 루테는 이미 숱하게 와 본 사람처럼 움직였다.
레온하르트가 다소 의아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몇 번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군.”
“예.”
데이브 루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귀한 약초가 많습니다. 꼭 마법사가 아니라도 여기를 오가는 사람은 제법 되었지요.”
“그런데 왜, 길이 나 있지 않나요?”
데이브 루테는 잠시 주저했다.
“그게…….”
“말해라.”
“흉흉한 소문이 돌아서요. 저기를 다녀온 사람은 죽는다는……. 물론 저와 제 동료 마법사들은 괜찮았지만, 일반 약초상들은 제법 죽었습니다.”
“어떻게 죽었지?”
데이브 루테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곳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전염병이 돌았는데, 개중 그곳을 다니던 약초상이나 담력 시험 장소로 사용하던 어린아이도 제법 되었지요.”
“그냥 우연이었다는 거군.”
“예. 하지만 마법사들조차 안 가게 된 지 이십 년이 넘었습니다.”
“왜 마법사들조차 발길을 끊었나요?”
“그곳에 대한 남부 사람들의 적개심이 커지다 못해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돌을 맞을 기세였거든요. 그런 사악한 장소에 가는 건 흑마법사밖에 없다는 소문까지 돌았었지요.”
데이브 루테의 한숨 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뭐, 저희야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다른 지역의 상인에게 얼마든지 약초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곳에 가지 않게 되었고요.”
셀린느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은 괜찮나요?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저희가 흑마법사 취급을 받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요.”
데이브 루테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과, 셀린느 루테잖습니까! 모두가 오랜 저주를 없애러 갔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 그런가요…….”
왜인지 모를 부담감이 느껴졌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데이브 루테가 웃기 시작했다.
“저희 같은 평범한 마법사들과 두 분이 똑같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부가 수준급이군.”
“백작님께 똑같은 소리를 하시면 경악하실 겁니다.”
어느덧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셀린느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여긴…….’
용암 스테이지 바로 다음 스테이지였던 폐가촌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명이 풍부한 남부의 버려진 마을은 화산 지대의 폐가촌보다 더욱 기괴한 모습이었다.
반쯤 무너진 지붕 위에 자라난 사람 키만 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각종 덩굴과 잡초들이 한때는 집이었던 곳들을 뒤덮었고, 산사태의 흔적 위 역시 식물이 한가득 자라나 있었다.
“흑마법사는 여기에 없는 듯한데.”
레온하르트의 언짢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흑마법사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다면 이 식물들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괜한 수고를 하게 만들어 미안하게 되었군.”
“아닙니다.”
데이브 루테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첫 시도부터 성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백작령은 넓으니…….”
바로 그때.
루가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내었다.
셀린느는 자리에서 반쯤 뛰어올랐다.
“루……!”
루는 날개를 퍼덕이며 셀린느를 반쯤 감쌌다.
셀린느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루는 불안에 차 계속해서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덩치가 그녀의 몇 배나 되었기에, 도리어 셀린느의 몸을 조이는 행색이 되었을 뿐.
“레온하르트. 흑마법사가 주변의 생명을 죽이지 않을 수도 있나요?”
“충분히 가능하지.”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생명을 죽이는 건 오직 본인들의 의지다. 베르누이성에 침입한 자는 들키지 않기 위해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니.”
“근처에, 있는 것 같아요.”
셀린느는 루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루와 딱히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불안에 떨고 있는 용의 상태가 근처에 흑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
레온하르트는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더니, 낭패한 얼굴로 눈을 떴다.
“너무 어렵군.”
“봄이라서 그렇죠?”
“그래.”
레온하르트가 힘없이 대답했다.
“겨울과 너무 다르군.”
“괜찮아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다독거렸다.
레온하르트는 백 번을 해내어도 단 한 번을 실수하면 자책하는 타입이었다.
“지금 루가 불안해하니 근처에 있는 건 확실하잖아요. 금방 찾을 수 있겠죠. 이런 지형에서 빨리 도망치지도 못할 거고.”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안색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이런 흑마법사를 여럿 처치한 적 있다. 가장 까다로운 부류들이지.”
“……공자님, 무슨 뜻입니까.”
“너무 약았어, 이자는.”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면 용에게 최소한의 흔적만 남기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괴롭히는지 잘 아는 자. 이렇게 생명이 풍부한 지대에 숨어들면서 살생에 대한 욕구를 억누를 정도로 자제력이 강한 자…….”
“능구렁이군요.”
“그래.”
데이브 루테가 한마디 거들었다.
“최소한 이곳을 알 정도면, 나이도 상당히 든 자일 겁니다. 절대 풋내기가 아니에요.”
레온하르트는 무심코 라쉬르의 검집 위에 손을 짚었다.
“본디는 약한 자라고 생각했는데, 정반대라니. 예감이 좋지 않군.”
“우리를 먼저 공격할 리는 없을까요? 다른 흑마법사들처럼…….”
“이런 자들의 특성상 기습이라면 모를까, 당당히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아.”
별안간 셀린느는 이유 있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 정도로 영리한 자가 이렇게 뻔한 곳에 숨어들 리가 없다.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했던 걸까?’
그렇다면 이곳 전체가 거대한 함정이 된다.
틀릴 확률이 커 보이는 생각이었으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레온…….”
갑자기, 루가 날개를 크게 펼치며 빠른 속도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루!”
셀린느는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루는 돌아오지 않고 계속해서 날아올랐다.
-쿵!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루가 하늘에 있는 무언가에 부딪쳤다.
“……당했군.”
레온하르트가 옆에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쿵!
루는 다시금 하늘에 부딪히더니 비틀거리며 땅으로 다시금 하강하기 시작했다.
“결계다.”
레온하르트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데이브 루테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고 동공이 크게 열렸다.
공포의 신호였다.
“데이브 루테.”
셀린느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다가갔지만, 데이브 루테는 더 소스라칠 뿐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어요.”
“정말로 죄송하겠지.”
“……?”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차가운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자는, 샤프 백작이 말한 황무지로 우리를 데려오지 않았어.”
“……!”
“버려진 지 오래된 마을이라. 그래, 그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가 어딜 보아서 황무지인가?”
레온하르트의 말이 맞았다.
마을 자체는 버려진 지 오래되어 황폐하긴 했으나 결코 척박하지는 않았다.
흑마법사가 근거지로 삼는 황무지는 생명이 척박한 땅.
데이브 루테는 그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곳으로 그들을 데려왔다.
같은 버려진 마을이라는 조건으로 그들을 현혹시키면서.
레온하르트가 라쉬르를 빼 들었다.
푸른 섬광이 데이브 루테의 목을 노렸다.
“말해라. 네 뒤에 숨은 자는…… 어디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