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외전 4
“어쩌다 보니, 성장한 용을 데리고 나오셨다고요?”
샤프 백작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부들부들 떨렸지만 분노나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서 용을 보았다는 순수한 흥분뿐이었다.
“역시 옛 주인이라 그런지 알아본 모양이군요.”
“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광산에 큰 해를 끼친 루에게 샤프 백작이 겁을 먹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만져 봐도 되나요?”
샤프 백작의 목소리가 너무 간절하게 들려 셀린느는 웃고 말았다.
“그럼요.”
샤프 백작은 조심스럽게 루의 비늘 위에 손을 얹었다.
“……!”
그녀는 천천히 손을 떼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용이군요.”
“네.”
“정말……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녀는 루에게서 간신히 눈을 떼고 셀린느와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계속 데리고 다니실 건가요?”
“아, 아뇨.”
셀린느는 바로 대답했다.
루는 성장한 용.
일시적으로 자신 곁에 머무를 순 있어도 언젠가는 떠나보내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 흑마법사를 처치할 때까지 데리고 다니는 게 좋겠지.’
흑마법사를 처치하지 않는다면 언제 또 루가 같은 상황에 처할지 몰랐다.
‘사는 터전도 정해 주는 게 좋겠어.’
흑마법사만 처치했다고 루를 바로 떠나보낼 수도 없었다.
루 역시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녀의 곁을 떠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본디는 그냥 루와 소통하여 광산에서 데리고 나오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같, 같이 지낼 방을 준비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하녀장의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녀는 루와 셀린느를 연신 번갈아 바라보느라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네.”
셀린느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마땅한 방이 없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다행히 하녀장은 셀린느에게 먼 과거 인간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이종족이 썼다는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별다른 가구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하녀 여럿이 들락날락한 끝에 제법 근사한 방이 완성되었다.
간이침대에 누운 셀린느는 바닥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눈을 느리게 끔벅이는 루를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셀린느는 어둑한 밤이 되어서야 루를 데리고 샤프성으로 돌아간 게 무척 행운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문밖에서 번잡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제대로 된 가구를 넣으러 온 인부들의 소리였겠거니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
하지만 셀린느를 맞이한 건, 샤프 성내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었다.
셀린느는 문 앞에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무, 무슨 일이시죠?”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대답을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막 잠에서 깨어나 멍한 상태의 셀린느가 그중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용’, ‘신성’, ‘위험’ 같은 단어들이었다.
‘루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항의하러 온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사람들은 모두 루를 경탄하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셀린느는 그제야 남부에선 용을 신성시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인파를 헤치고 나타났다.
레온하르트였다.
“셀린느, 이쪽으로.”
셀린느는 루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 노력하며 천천히 레온하르트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틀려도 한참 틀린 판단이었다.
루는 이미 깨어나 있었으니까.
“셀린느, 루가…….”
레온하르트의 다급한 목소리에 셀린느는 뒤를 돌아보았다.
루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갑갑한지 날개를 천천히 퍼덕거려 주위 사람들이 잽싸게 길을 비켜 주고 있었다.
셀린느는 그들의 시선에서 공포가 아닌, 순수한 경외심과 놀라움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이다.’
내심 루를 쫓아내면 어쩌나, 걱정하던 중이었다.
평생을 이렇게 루와 붙어 다닐 생각은 없었지만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는 곁에 머물러 주어야 할 것이다.
흑마법사를 잡을 때까지는 샤프성에 있을 생각이었으니 성내 사람들의 동의가 절실히 필요했다.
셀린느는 자신이 레온하르트와 함께 떠나면 루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자연스레 흩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루가 셀린느를 따라다니듯 그들을 졸졸 따라다녔다.
오히려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인파가 불어나는 듯했다.
‘……너무 심하잖아!’
다행히 루는 작은 새끼용이던 시절, 사람들을 많이 만난 덕인지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레온하르트, 어디로 가는 거예요?”
“데이브 루테를 만나러.”
“데이브……?”
“샤프가의 마법사다.”
청회색 눈이 커졌다.
드디어 루에게서 셀린느와 레온하르트의 마력을 읽어 낸 마법사를 만날 수 있었다.
“기뻐 보이는군.”
“그럼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지.”
셀린느는 쿡쿡 웃었다.
“알았어요. 기쁘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둘은 좁은 회랑으로 접어들었다.
셀린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회랑으로 진입하면 더는 이 인파를 감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쿵!
셀린느는 펄쩍 뛰어올랐다.
루가 무심코 들어가다 회랑의 천장에 심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셀린느는 곧바로 루의 상태를 살폈다.
용은 비늘에 금 하나 가지 않는 듯했지만, 회랑의 상태는 달랐다.
화려한 입구 장식이 반으로 쩍 갈라진 것이다.
셀린느는 인파의 웅성거림을 애써 무시했다.
레온하르트는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여길 통과하는 건 역시 무리였군.”
“알면서도 데려온 거예요?”
“그 인간이 충분히 통과 가능하다길래.”
“…….”
그제야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마법사들을 원체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레온하르트가 셀린느를 향해 고갯짓했다.
“넌 여기에 루와 함께 있도록. 금방 불러올 테니까.”
“빨리 와요.”
“물론이지.”
셀린느는 루의 등에 몸을 기대었다.
‘루…… 왜 그렇게 빨리 성장해 버린 거니?’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씁쓸함만 감돌았다.
루의 성장은 이미 처음부터 정해진 사실이었다.
사실, 성장 그 당시까지만 해도 셀린느는 스테이지가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기뻐하지 않았던가.
그게, 루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줄도 모르고.
마침내 레온하르트와 샤프 백작, 처음 보는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셀린느 루테.”
“저야말로요. 데이브 루테시죠?”
샤프가의 마법사와 셀린느는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데이브 루테는 산전수전 다 겪은 듯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오래 기다렸나?”
“아뇨.”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지만 피곤함은 숨기지 못했다.
레온하르트가 떠나자마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셀린느의 주위로 더욱더 몰려들었다.
루가 스트레스를 받을까 싶어 걱정된 셀린느는 사람들을 애써 쫓아냈다.
같은 사람인 그녀도 스트레스를 받아 쓰러질 지경인데, 루는 오죽했겠는가.
다행히 인파는 샤프 백작이 그들을 노려보자마자 순식간에 흩어졌다.
“미안해요. 공자께서 여길 통과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거라고 얘기를 했는데…… 딱 알맞은 공간이 있어서, 욕심을 부렸군요.”
“괜찮아요.”
셀린느는 어차피 피해를 본 건 샤프성이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들이 차선책으로 이동한 곳은 샤프가의 기사들이 훈련하는 탁 트인 훈련장이었다.
샤프 백작이 미리 명을 내렸는지 기사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루는 넓은 공간으로 나오니 기분이 좋은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샤프 백작이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 이미 대부분 설명해 주셨습니다. 용이, 흑마법사와 접촉했다면서요.”
“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브 루테께서 언제 루를 만나셨는지 모르겠지만…….”
“백작님께서 북부로 출발하시기 이틀 전이였습니다.”
“그럼, 사흘 전이 되겠군요.”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 사흘.
그사이에 루는 흑마법사의 공격을 받았고, 광기 들린 용이 될 뻔했다.
“그렇지.”
레온하르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긍정하더니, 샤프 백작을 향해 물었다.
“광산은 왜 폐쇄하지 않았습니까?”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용이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 경우, 막는 건 괜한 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샤프 백작의 판단은 타당했으나 타당한 선택이 항상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니었다.
“흑마법사가 어디에 있든, 높은 확률로 백작령을 벗어나지는 못했을 겁니다.”
“찾아야 해요.”
셀린느가 레온하르트의 말에 덧붙였다.
데이브 루테가 얼굴을 찌푸렸다.
“최근에 흑마법사의 기운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광산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의심스러운 보고가 들려온 적도 없었습니다.”
“막 각성한 흑마법사가 아닐까요?”
레온하르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자신의 흔적을 이렇게 숨기지는 못했을 거다. 이미 지천에 그자의 흔적이 널려 있겠지.”
“그건 그래요.”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루는 아직 어리다고는 하나 성장한 용이다. 너와 함께 다니면서 흑마법사도 많이 겪었고. 어지간한 놈에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셀린느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다른 광산은 모두 제대로 관리되고 있습니까?”
샤프 백작은 레온하르트가 광산들을 흑마법사의 근거지로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소 기분 나쁜 듯했으나,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저희도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모든 영역에서 항시 작업한 지 오래입니다. 광부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구역은 단 한 군데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흑마법사는 사람을 조종할 수 있어서…….”
“그랬다간 채굴량에라도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흑마법사가 근거지로 삼을 만한 다른 장소는 없습니까? 자연적인 마력이 풍부하다거나, 생명이 풍부하다거나.”
샤프 백작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면 반대로 황무지인 곳도 근거지로 삼습니다. 보고가 되지 않은 걸 보니 인적이 드문 곳을 근거지로 삼은 건 확실하군요.”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변수가 너무 많았다.
샤프 백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남부는 풍요로운 땅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풍부한 곳은 너무나 많아 딱 꼬집어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특히 지금처럼 늦봄이라면요.”
“그럼, 황무지는요?”
“황무지라…….”
샤프 백작은 잠깐 망설였다.
“한 군데 있긴 합니다. 하지만 거기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무슨 뜻입니까?”
“백 년도 더 전에 일어난 산사태로 완전히 고립된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지금은 황무지가 다 되었겠지요.”
“……!”
셀린느는 직감했다.
흑마법사가 자신의 터전을 새로이 잡는다면, 그곳보다 더 최상의 위치는 없을 것이다.
레온하르트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당장 출발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