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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106화 (외전) (106/120)

106화.

외전 1

모든 게 끝난 날로부터 석 달이 지났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겨울도 어느덧 물러났고, 만물이 깨어나는 봄이 북부에도 찾아왔다.

셀린느는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맞으며 야생화가 가득 핀 벌판을 천천히 걸었다.

별다른 마법을 걸지 않아도 기분 좋은 온기가 그녀를 감쌌다.

“셀린느 루테!”

대니의 목소리였다.

몸을 돌리니 살짝 상기된 얼굴의 호위 시녀, 대니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

“그럼,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을 텐데 왜 따라왔어요?”

셀린느는 가볍게 농담을 던졌을 뿐이었지만 대니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안심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 루테께선 다시 살아날 수도 없으신데.”

“대신 예전보다는 훨씬 튼튼해졌잖아요.”

“…….”

대니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알만 또르르 굴리고 말았다.

“넘어질 때마다 잡아 주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디예요?”

하지만 셀린느의 진심 어린 어조 탓에 대니는 흥분하고 말았다.

“셀린느 루테, 루테께선 저주가 아니라도 몸이 원체 약하십니다. 자각을 좀 해 주세요!”

“뭐, 죽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대니는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요.”

대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셀린느 루테가 저런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석 달 전, 그 어떠한 기별도 없이 대공자와 셀린느 루테가 베르누이성에 불쑥 나타났다.

그러고는 셀린느 루테의 저주가 완전히 풀렸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모든 건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적어도 대니가 느끼기엔 그랬다.

대공자와 셀린느 루테의 일과는 마물 사냥과 수련, 휴식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어떤 기괴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근 몇 년 동안 대공가를 들쑤시던 황실에서조차 아무런 방해 공작이 없었다.

대니는 이런 일상이 깨지지 않기를 기원했지만, 셀린느 루테의 지나친 자신감이 사고를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단지 내가 걱정되어서 찾아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 있어요?”

“…….”

대니는 차마 그 말이 맞는다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본 셀린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전 북부의 모든 사람 중에서 레온하르트 다음으로 안전해요, 대니!”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나는 대니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진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셀린느는 놀라지 않았다.

말쑥한 모습의 레온하르트가 따스한 햇살을 한가득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행이라도 했어요?”

“아니?”

레온하르트의 입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찾아왔는데.”

그는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보고 싶어서.”

대니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 주었다.

베르누이성에서 둘 사이의 기류를 눈치채지 못하는 존재는 개와 고양이뿐이었다.

셀린느는 자연스레 레온하르트의 어깨에 기대어 서서 벌판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여기가 그렇게 좋은가?”

“네.”

“왜지?”

레온하르트는 의아한 눈치였다.

샛노란 야생화가 가득한 벌판은 아름답기는 했으나 그다지 특색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예전에 살던 곳이…… 생각나서요.”

셀린느는 그날 이후로 자신이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이 노란 야생화들은 유채꽃을 빼닮았다.

덕분에 이곳에 서 있으면 유채꽃들로 노랗게 변하던 강변도로가 눈에 선하게 떠오르곤 했다.

처음부터 그녀가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고향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레온하르트를 내버리고 돌아갈 생각을 한다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악순환에서 벗어난 건, 순전히 레온하르트 덕분이었다.

베르누이성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우울해진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고는 무엇이 문제인지 집요하게 파냈으니까.

결국 셀린느는 모든 걸 레온하르트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고향이 그립다고, 하지만 그리울 때마다 레온하르트를 저버리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레온하르트는 특유의 냉철한 말투로 물었다.

- 그게 어째서, 나를 저버리는 게 되지?

- 돌아가게 되면, 레온하르트가……!

- 돌아갈 건가?

- 아뇨.

- 그럼, 나에게 미안할 게 아무것도 없군.

그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녀를 꽉 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 미안한 건 오히려 나다. 네가 힘들어하는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까…….

“셀린느?”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그녀를 과거에서 끄집어내었다.

“괜찮나?”

“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손을 잡으며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저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상한가?”

“아뇨.”

셀린느는 수줍게 웃었다.

“저도 마침, 레온하르트가 보고 싶었거든요.”

그들은 해가 기운 다음에야 베르누이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셀린느는 자연스레 자신이 타고 온 말에 올라탔다.

레온하르트가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은 성에서 출발하는 대니를 따라왔으니, 셀린느는 이곳에 혼자 말을 타고 온 게 분명했다.

“말을 탈 때만큼은 대니를 곁에 둘 수 없겠나.”

“레온하르트, 저 그렇게 쉽게 안 죽는다니까요!”

“그래도…….”

레온하르트는 차마 셀린느에게 승마 재능은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셀린느는 평소에는 무난하게 말을 탔지만,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말을 제어하기보다는 말에서 떨어지는 걸 선호했다.

물론 마법사이니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레온하르트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하지만 금발을 휘날리며 석양 속을 달려가는 셀린느의 모습은 레온하르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공자님!”

말에서 뛰어내린 레온하르트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시종과 마주쳤다.

“무슨 일이지?”

“손, 손님이 오셨습니다.”

“내 손님인가?”

“예!”

시종은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지?”

“그게, 저도 모릅니다.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셔서…….”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모양새는 귀한 손님이라기보단 침입자에 가깝지 않은가.

“신분을 밝히지 않았는데, 내 손님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 그게…… 샤프 가문의 징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레온하르트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한 가문의 징표는 오직 가주나 후계자만이 소지할 수 있었다.

샤프가엔 아직 정식 후계자가 없을 터.

후보는 단 한 명이었다.

“당장 안내해라.”

그들은 반쯤 내달리는 시종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잠시 후, 레온하르트의 언짢은 듯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좀 천천히 걷도록. 조금 더 기다린다고 해서, 샤프 백작이 죽지는 않아.”

셀린느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헐떡거렸다.

석 달 전, 그 날 이후.

게임이 붕괴한 탓인지 ‘헤르메스의 신발’은 평범한 신발로 돌아갔다.

셀린느는 제법 아쉬워했지만 레온하르트는 깨끗한 신발을 신겨 주고 싶었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이렇게 숨이 찰 때마다 ‘헤르메스의 신발’이 그리워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백, 백작님이셨습니까?”

다행히 시종은 너무 놀란 나머지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래, 그러니 가만히 서 있지 좀 말고 제대로 안내하도록. 천천히.”

그들은 셀린느의 걸음걸이에 맞춰서 움직였다.

마침내, 시종은 레온하르트의 탑의 다섯 개가 넘는 응접실 중 하나에 멈춰 섰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낯익은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서 그들을 향해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공자, 루테. 잘 지내셨습니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백작께선 그간 어찌 지내셨는지…….”

레온하르트는 가볍게 대답했으나 걱정을 완전히 숨기는 덴 실패하고 말았다.

샤프 백작가는 남부를 대표하는 가문 중 하나.

그녀가 제대로 된 수행원 하나 없이 이곳까지 왔다는 건 큰 걱정거리가 있다는 뜻이리라.

어쩌면, 저번보다 더욱 큰 문제일 수도 있었다.

샤프 백작은 미소지었다.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엔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게 아니니까요.”

“그럼……?”

“제안을 하나 하러 왔습니다, 공자.”

레온하르트는 샤프 백작을 잠시 응시했다.

날카로운 눈빛과 그에 못지않은 고고한 눈빛이 서로 부딪쳤다.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니군요.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샤프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고풍스러운 탁자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시원한 음료와 달콤한 다과를 내오라고 명했고, 하인은 즉각 음식들을 가져왔다.

셀린느는 냉차를 홀짝이며 샤프 백작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당시 열어 주신 광산 덕분에 웬만한 피해는 다 복구했습니다. 물론 죽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지만…….”

샤프 백작은 생각만 해도 고통스러운 듯 잠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래도 덕분에, 남은 사람들은 나름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저야말로,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레온하르트는 다소 쑥스러워 보였다.

“여전하시군요, 그런 면은.”

샤프 백작은 작게 웃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저희 광산에 불청객이 하나 살게 되어서입니다.”

“……흑마법사인가요?”

셀린느는 불쑥 끼어들었다.

팽팽한 긴장이 그녀의 목소리에 감돌았다.

그날 이후, 그들은 흑마법사에 대한 보고는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어딘가엔 흑마법사들이 살아 숨 쉬어 아직도 레온하르트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요.”

샤프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용입니다.”

“……용, 이요?”

셀린느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레온하르트 역시 얼빠진 표정을 짓는 것이, 그리 다른 반응이 아니었다.

“예.”

샤프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용은 귀한 존재이고, 행운을 불러오지만…… 이번만큼은 불청객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력석이란 마력석은 모두 먹어 치우고 있거든요.”

“새끼 용이면, 마법사와 각인을 시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까.”

샤프 백작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제법 큰 용입니다. 저희 가문의 마법사는 자신이 여태껏 본 용 중 가장 크다고 하더군요.”

“얼마나…….”

“적어도 사람 덩치는 훌쩍 뛰어넘을 만큼? 직접 확인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도 저희 가신들이 반대해서요.”

샤프 백작의 말엔 아쉬움이 묻어났다.

결국 그녀도 남부 사람.

신성시되는 용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저희가 여유가 있다면 광산 하나 내주는 건 일도 아니긴 합니다.”

“하지만 여유가 없지 않으십니까.”

레온하르트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샤프 백작가는 새로운 광산과 기존의 광산들을 총동원해야 간신히 예전의 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느닷없이 찾아온 식충이 따위는 전혀 달갑지 않은 게 당연했다.

더군다나 그 식충이가 먹는 게, 값비싼 마력석이라면.

“예.”

샤프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어떤 종류의 용인지부터 확인해야 했지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저희 가문의 마법사가 확인한 결과, 두 분의 마력이 느껴진다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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