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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105화 (105/120)

105화.

언제부터였을까.

갑작스레 깨달은 감정은 일시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강렬하고 뿌리 깊었다.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이미 부어오른 목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따끔거렸다.

레온하르트는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그래도 죽음이 두려운 모양인지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영원히 이렇게 레온하르트의 품에 안겨 있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럴 순 없어.’

셀린느는 다소 거칠게 레온하르트의 품속에서 떨어져 나왔다.

레온하르트가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셀린느는 한 차례 심호흡했다.

자신이 할 말은, 레온하르트가 바라는 답이 아니다.

“레온하르트를 죽이지 않겠어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겁게 느껴졌다.

셀린느는 자신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이제 영원히, 돌아갈 수 없어.’

하지만 레온하르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모든 건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셀린느는 이제, 레온하르트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으니까.

아무리 평화롭고, 그녀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세상이라고 한들…… 레온하르트가 없는 세상엔 의미가 없었다.

“셀린느. 물론 네게 힘든 일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레온하르트.”

그녀는 레온하르트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오직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신호로 가득해 그 의중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저도 레온하르트를 만나 행복했어요. 그 어느 때보다도요.”

“……!”

“돌아가지 않겠어요.”

레온하르트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셀린느, 그 말은…….”

지금 상황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희망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말은 이번에도 끊기고 말았다.

전혀 달갑지 않은 인간에 의해.

“보아하니, 제가 나설 수밖에 없겠군요.”

“칼 루테.”

셀린느는 칼 루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조차도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매일 밤 전 세계가 폐허가 된 미래를 꿈으로 꾸고, 그것을 막기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을 어찌 증오하겠는가.

“알잖아요. 당신은 레온하르트를 죽일 수 없어요.”

칼 루테는 쓰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칼 루테.”

레온하르트가 경고하는 듯한 음성을 내었지만, 칼 루테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성장할 만큼 성장한 마법사가 흑마법사가 될 때의 파괴력을 아십니까?”

“이미 여럿 베어 봤다. 하나가 더 늘 뿐이겠군.”

레온하르트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셀린느는 그 안에서 불안을 감지할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불안해하고 있어.’

셀린느는 마른침을 삼켰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칼 루테가 불길한 예감에 마침표를 찍었다.

“공자님, 지금 누군가를 벨 수 있기는 하십니까?”

“…….”

셀린느는 황급히 레온하르트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명백히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다급하게 물었다.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저, 때문인가요?”

“……나 때문이다.”

레온하르트는 나지막하게 고백하며 한쪽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냈다.

그는 잠시 주저하는 듯했지만 셀린느의 애달픈 눈빛에 결국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공격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저 미로에서, 널 죽였을 때가 떠오른다.”

자세하지는 않았으나 충분한 설명이었다.

셀린느는 땅에서 반쯤 튀어 올랐다.

“그건 레온하르트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과연 그럴까?”

레온하르트는 씁쓸하게 대답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전부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네가 죽어야만 하는…… 흑마법사라는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어.”

“그건…….”

셀린느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레온하르트에게 이 세계가 게임이라는 것만큼은 밝힐 수 없었으니까.

“내가 본 그 예지에서도, 나는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지. 아마 전부, 내게는 흑마법사로 보였을 거야.”

레온하르트는 칼 루테를 응시했다.

“자네 말이 맞아. 난 이미 그 저주를 맛보았기에 끊임없이 나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다. 아마 저주가 완성되는 그 순간까지 그렇겠지.”

“저주가 완성되어도, 레온하르트는 레온하르트일 거예요.”

셀린느의 또렷한 목소리에 두 남자는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알아요. 레온하르트의 원래 미래가 어떠했는지, 칼 루테가 어릴 적 본래 보았던 미래가 어떠했는지.”

셀린느는 게임 속에서 자신을 쫓아왔던 악역 레온하르트를 떠올렸다.

분명 그녀가 플레이했던 게임과, 게임의 형태로 새롭게 본 미래는 많은 점이 달라져 있었다.

“많은 게 바뀌었어요.”

“당신이 공자님을 죽인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네. 하지만 희망이 생길 정도로는 바뀌었어요.”

“……?”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지 보면…… 제가 레온하르트를 죽인다는 사실마저, 바뀔 수 있지 않겠어요?”

“말도 안 되는……!”

“왜 안 되나요?”

셀린느는 칼 루테를 응시했다.

사실, 자신이 방금 한 말은 조금 왜곡되어 있었다.

달라진 미래를 보았을 때 그녀가 느꼈던 건 절망뿐이었으니까.

희망은 레온하르트의 말에서 피어올랐다.

‘레온하르트는 살인귀가 될 사람이 아니야.’

그는 외적인 힘에 의해 그녀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공포에 아직도 시달려 그 어느 흑마법사도 죽이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단순한 트라우마가 아니었다.

자신의 판단이 틀려 무고한 희생을 자아낼 수 있음을 인지하고 방지하려는 사람의 선택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무차별적인 살육을 벌이는 살인귀가 되겠는가?

설령 흑마법사들의 저주가 완성된다 하더라도 저 지하에서 스테이지가 레온하르트에게 끼친 영향보다 더욱 강력하지는 못할 터.

미래의 레온하르트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흑마법사로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명료한 정신으로 살해 협박을 받는 지금조차도, 흑마법사를 죽이지는 못하겠다고 선언했으니.

“……그게, 당신들의 선택이라면.”

칼 루테 역시 선택을 마친 듯했다.

셀린느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용틀임하는 마력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마력의 차단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라쉬르의 손잡이에 손만 얹고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칼 루테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나서야 해.’

다행히 마지막으로 루와 접촉하여 얻은 마력은 아직도 그녀의 몸속에 남아 있었다.

셀린느는 마지막 남은 마력을 칼 루테를 향해 쏟아부으며 링조르를 휘둘렀다.

어떻게든 흑마법사가 되기 전에 막아야 했다.

자신이나 레온하르트가 아닌, 칼 루테를 위해서.

하지만 칼 루테는 손쉽게 셀린느의 공격을 받아 냈다.

‘아…….’

셀린느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점을 깨달은 탓이었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 어떻게 싸우는지 가르쳐 주었다면, 칼 루테는 그녀에게 어떻게 마법을 쓰는지 가르쳐 주었다.

당연히 자신이 사용하는 마법의 패턴은 꿰뚫고 있을 것이다.

상황은 나쁜 조건들로 가득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앞이 땀으로 흐려졌지만 잠시 짬을 내어 닦을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레온하르트의 단단한 손이 셀린느를 뒤로 확 잡아당겼다.

“레온하르트!”

셀린느의 목소리엔 노기마저 서려 있었다.

자신은 좀 더 버틸 수 있었다. 아니, 버텨야만 했다.

“……잠깐만 살펴봐라.”

레온하르트는 칼 루테가 듣지 못할 정도로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

셀린느는 칼 루테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매분 매초를 겨루어 치열하게 다툴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어떻게…….’

칼 루테의 마력은 마치 셀린느의 마력을 흡수한 것처럼 더욱 크게 불어나 있었다.

다행히 어두운 기운은 아직까지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시간문제이리라.

셀린느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싸움은 그저 칼 루테가 흑마법사로 변모하는 걸 도와주는 데 지나지 않았다는 걸.

‘…….’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칼 루테를 한 번에 제압할 정도의 수단이 필요했지만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왜 멈추었습니까?”

“……도움닫기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칼 루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별로 달라질 건 없습니다, 셀린느 루테. 단지 조금 빨라지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니까요.”

“…….”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자신은 죽지 않는 몸.

칼 루테가 레온하르트를 죽이려 한다면, 몸을 던져 그를 막으면 된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을 죽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여태까지 수도 없이 죽어 왔던 몸이 아닌가.

하지만 셀린느는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갑자기, 레온하르트가 칼 루테를 향해 성큼 걸어갔으니까.

“……!”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레온하르트가 칼 루테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 아니었다.

- 쿵.

그가 라쉬르를 냅다 뽑아 눈밭에 집어 던졌기 때문이었다.

“안 돼요,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비명을 질렀으나 레온하르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공자님. 진작 그러셨어야죠.”

칼 루테는 슬프게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랬다면, 저도 이런 짓까지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는 평이하게 얘기하려 했으나 언뜻 보이는 원망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의 태도에서, 셀린느는 그가 정말로 흑마법사가 되고 싶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칼 루테.”

레온하르트는 딱딱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네는 결코 흑마법사가 될 수 없어. 언젠가는 될 수 있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야.”

“될 수가 없다니요!”

칼 루테는 즉각 날카롭게 반응했다.

“제가 어떤 심, 심정으로 흑마법사가 되는 방법을 연구했는지, 공자님은 모릅니다!”

“모른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떤 마법사가 흑마법사가 되는지는 안다.”

“…….”

“강력한 힘을 갈구하는 자들. 하지만 자네는 그런 이들과는 달라.”

“저를 전혀 모르시는군요.”

“그런가?”

레온하르트는 쓰게 웃었다.

“자네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 그냥 도망쳐 버릴 수도 있었어. 아무리 내가 미쳐 버렸다 한들 제국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을 테니.”

“…….”

“내가 흑마법사들로 인해 신음하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처럼, 자네 역시 미래를 외면할 수 없었던 거겠지. 자네는…… 나와 동류야.”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칼 루테의 말은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나 증오하는 흑마법사가 되려고 시도하는 게, 모든 걸 증명하고 있지 않나.”

“…….”

칼 루테의 무릎이 꺾였다.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셀린느와 레온하르트를 멍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셀린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칼 루테에게서 느껴졌던 용틀임하는 마력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셀린느의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셀린느 루테.”

“……?”

갑자기, 칼 루테가 이상하리만큼 낯설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녀를 무미건조하게 불렀다.

“정말로, 돌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셀린느는 그 질문의 의미도,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돌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칼 루테는 다시금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셀린느는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했다.

“……네.”

그 순간, 모든 게 사라졌다.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뭐지……?’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어둠 속도, 눈밭도 아닌 빛 속이었다.

레온하르트도, 칼 루테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녀뿐이었다.

“레온하르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셀린느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여태까지의 패턴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없을 리가 없었다.

‘……?’

셀린느는 조금 당황하며 숨을 들이켰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두 갈래로 나뉜 길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셀린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왼쪽은 반짝이는 노란 벽돌이 가지런히 깔린 멋진 길이었다.

길의 끝엔, ‘True End.’라는 글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아니야.’

셀린느는 도리질을 치며 오른쪽을 살폈다.

‘……!’

질퍽해 보이는 진흙 길은, 몇 걸음 가지 않아 끊겨 있었다.

그 뒤는 끝없는 어둠이 도사리는 낭떠러지였다.

셀린느는 그 심연을 들여다보려고 했으나 본능적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런 단서가 없었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셀린느는 잠시 눈을 감았다.

‘왼쪽을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진엔딩을 택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른쪽은…….

“셀린느?”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즉각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온하르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저 길을 가야 하는 건가?”

그가 벽돌길에 발을 올려놓는 찰나.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손을 꽉 잡았다.

“이쪽이에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진흙 길을 내달렸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함께.

추락하는 순간,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꽉 붙들었다.

라쉬르를 바닥에 내던진 레온하르트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내가, 쿠션이라도 되어야…….’

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추락은 그들 사이를 완전히 떼어 놓았다.

마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마력이 거덜 난 탓인지, 아니면 이 공간 탓인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 순간, 형형색색의 이미지가 그녀의 눈앞을 뒤덮었다.

***

<셀린느의 악몽>

‘……!’

셀린느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이 더 이상 추락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눈앞에 나타난 글씨와 아기자기한 배경, 그에 어울리지 않는 음산한 음악.

‘셀린느의 악몽’을 켤 때마다 보게 되는 시작 화면이었다.

이내 셀린느는 자신이 시작 화면만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니터야.’

셀린느는, ‘셀린느의 악몽’이 플레이되는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홀린 듯 손을 뻗었으나 금세 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이 아니었기에 쉽게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예지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나도 놓치지 않겠어.’

다음 순간, 셀린느는 소스라쳤다.

‘셀린느의 악몽’의 타이틀 로고가 산산이 부수어져 내린 것이다.

‘뭐지……?’

타이틀 로고뿐만이 아니었다.

음악은 알 수 없는 불협화음으로 변했고, 아기자기한 배경들 역시 엉망진창인 모자이크가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반복되었다.

다섯 번째 시작 화면이 망가진 이후에야 셀린느는 어렴풋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게임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걸까.’

그 생각에 응답하듯 여섯 번째 시작 화면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셀린느는 다시금 추락하기 시작했다.

***

-퍽!

셀린느는 자신이 레온하르트와 함께 수북한 눈밭 위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칼 루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죽을 줄 알았는데, 안 죽었네.’

분명 이 정도 높이에서 아무런 마법을 쓰지 못하고 떨어졌으면 죽는 게 정상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눈더미에 떨어졌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자신은 마법이 없으면 넘어지기만 해도 죽는 신세였으니.

하지만 등과 허리만 얼얼할 뿐 죽은 기억도, 환상통도 없었다.

‘설마……!’

셀린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로, 그 예지가 게임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려 준 거라면…….

그렇다면 자신은 더는 공포게임의 주인공이 아니다.

레온하르트 역시 공포게임의 악역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도, 그의 삶도 온전히 그들 자신의 손에 달려 있게 된 것이다.

“셀린느.”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레온하르트의 잘생긴 얼굴이 그녀의 코앞에 불쑥 다가와 있었다.

“괜찮은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괜, 괜찮아요!”

레온하르트는 갑작스레 물러나더니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살폈다.

“여긴, 칼 루테가 결계를 펼친 곳은 아닌 것 같다.”

셀린느는 그를 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편에 높게 치솟은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성벽들이야 다 비슷했지만 조금 전까지 리브론성에 있었으니 정체를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리브론성 안인가요?”

레온하르트의 망설이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베르누이성의 외벽이다.”

“…….”

셀린느의 머리는 생각을 멈추었다.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난 하루였다.

레온하르트가 부드럽게 말했다.

“눈이군. 어서 들어가는 게 좋겠어.”

그제야 셀린느는 함박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하얗고 포근한 눈이 레온하르트의 머리와 어깨 위에 하나둘 떨어졌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여느 때처럼, 의중 모를 반응을 보이는 그녀를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갑작스러운 충동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가, 곧바로 뒤로 물러났다.

눈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만큼이나 찰나의 순간이었다.

레온하르트의 창백한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셀린……!”

“좋아해요, 레온하르트.”

어느덧 셀린느의 머리도 차가운 눈이 뒤덮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마법으로 녹일 수 있었지만 셀린느는 그러지 않았다.

녹여 버린다면, 얼어붙어 버린 듯한 머리가 돌아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비난을 시작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레온하르트?”

아주 잠깐의 침묵 끝에 셀린느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울어요?”

“……아니.”

레온하르트는 순식간에 눈물을 훔쳐 냈지만 벌게진 눈가는 숨기지 못했다.

“단지, 이것도 꿈인가 싶어서.”

“…….”

“사랑한다, 셀린느.”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에 쌓인 눈이 레온하르트의 온기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들은 한참 동안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서 있었다.

장밋빛 새벽이 찾아올 때까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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