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레온하르트는 칼 루테를 노려보았다.
셀린느가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피워 내던 빛은 사라졌다.
하지만 라쉬르에게서 발산되는 빛은 어둠을 집어삼키고도 남았다.
그때, 셀린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레온하르트는 즉각 그녀의 안색을 살피다 흠칫하고 말았다.
크게 열린 청회색 눈은 절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차마 괜찮냐고 묻지도 못하고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셀린느는 비틀거리며 레온하르트의 품에서 떨어졌다.
푹 숙인 고개에선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당신의 술수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죠?”
“그게 진정한 예언이라는 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칼 루테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었다.
셀린느는 반박할 수 없었다.
방금 그녀가 본 것들은…….
‘진짜야.’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도 게임 속 자기 자신과 레온하르트의 대결이 눈에 아른거렸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보란 듯이 빈틈을 내어 준 레온하르트를 그녀 자신이 죽이는 장면이.
그 어느 꿈보다, 그 어느 예지보다도 게임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에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여태까지 셀린느는 진엔딩을 보는 것만으로 레온하르트의 흑화를 막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정보라곤 레온하르트가 흑화한 진짜 이유를 알 수 있다는 것 하나였으니까.
흑화한 이유를 안다면 당연히 그 흑화를 막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완전히 틀렸었어.’
칼 루테가 옳다면, 그들이 아무리 흑마법사들을 막으려 든다 해도 레온하르트는 흑화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칼 루테는 옳았다.
방금 본 것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지 않았던가.
눈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에 부드러운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그들이 지나온 과정을 생각하면 신기할 정도로 깨끗하고 부드러운 손수건이었다.
셀린느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손수건을 꽉 쥐었다.
눈물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장 끔찍한 건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레온하르트의 흑화를 막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내가…….’
셀린느가 지금, 이곳에서 레온하르트를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5년 뒤 흑화한 레온하르트를 베르누이성에서 죽이고 말 것이다.
그것도 죽는 그 순간까지 그녀를 생각했던 레온하르트를.
‘칼 루테의 술수는 아니야…….’
셀린느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 이유 또한 알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게임 속 살인귀로 변했을 테니까.’
그들은 레온하르트의 흑화를 결코 막지 못한다.
흑화한 레온하르트는 강하면 강해졌지 약해지지는 않을 터.
그를 죽일 수 있는 건…….
영원히 죽지 않은 자신뿐이리라.
‘레온하르트는 그때가 되어서도 나를 죽이지 않았어.’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내려가 손수건을 쥔 손에 뚝뚝 떨어졌다.
어쩌면 미래의 자신이 레온하르트를 죽인 건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돌아가고 싶어서.
이곳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 가족과 평화가 기다리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셀린느.”
셀린느는 눈을 천천히 떴다.
눈물로 흐릿한 시야에 레온하르트가 걱정스레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칼 루테에 대한 적대감으로 날카로웠던 눈은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고민하는 겁니까?”
레온하르트가 야생 동물처럼 칼 루테를 향해 몸을 홱 돌렸다.
칼 루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당신에게, 공자님은 돌아갈 수단에 불과하지 않았습니까.”
“……!”
셀린느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어떻게……?’
그녀는 아무것도 물을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칼 루테가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생각만이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무슨 뜻이지?”
레온하르트가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칼 루테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말해도 되겠습니까? 셀린느 루테.”
셀린느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가 텅 비어 버린 듯 낱말 하나 떠오르지 않아 아무런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칼 루테가 조소했다.
“셀린느 루테께선 이미 다 아는 사실이시니…… 공자님께만 설명해 드리죠.”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된 게 있다면……!”
“루테께서 저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계신데 제가 설마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알겠다.”
레온하르트는 팔짱을 낀 채 칼 루테를 주시했다.
“그 집 말입니다.”
셀린느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 저주받은 저택, 말인가.”
“맞습니다.”
칼 루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저주에 걸린 저택이다.”
레온하르트는 그것 하나로 다 설명이 된다는 듯 짤막하게 내뱉었다.
“저주라…….”
칼 루테는 다시 미소지었다.
“무려 공자님께서도 그 깊이를 모를 정도의 저주가, 하루아침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오랜 세월 동안 걸렸겠지. 그것도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다.”
“하지만 셀린느 루테의 과거를 조사한 정보원은, 어릴 적부터 그곳에서 자라났다고 보고했습니다.”
“……!”
레온하르트는 곁에 있는 셀린느를 의식한 모양인지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크게 떠지는 눈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직접 그 집을 가 보았고, 그 집에 몰래 숨어든 아이가 끔찍하게 죽은 흔적도 보았다.
집 전체를 두 번이나 내달리기도 했다.
집 곳곳에 남은 저주의 흔적들은 분명 도저히 그가 손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래된 종류였다.
‘그러고 보니…….’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설명과 자신의 판단이 도저히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셀린느는 그가 꿈을 꾸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녀가 저주에 걸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집에 남은 흔적들은 오래되고 뿌리 깊은 저주들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훨씬 전.’
하지만 셀린느가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기에 따라 발동과 휴지기를 반복하는 저주도 있다. 셀린느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칼 루테가 다소 감탄하는 투로 레온하르트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셀린느 루테는 그런 경우와는 거리가 멉니다.”
“……자세히 설명해라.”
칼 루테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셀린느 루테께서 저주에 걸린 건 맞습니다. 하나, 영원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저주에 걸린 건 아닙니다.”
“……?”
“루테께선, 저 몸에 갇히는 저주에 걸리신 겁니다.”
셀린느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 저주라고……?’
자신이 지금, 이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저주였다니.
‘진엔딩을 보면 저주를 풀 수 있다는 거짓말이, 맞았었구나.’
이어지는 깨달음에 입맛이 썼다.
레온하르트는 당연하게도 전혀 감을 잡지 못한 듯했다.
“몸에 갇히다니, 그게 무슨 생뚱맞은 소린가.”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셀린느 루테의 삶은 본디 루테께서 사셨어야 할 삶이 아닙니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레온하르트는 아직도 칼 루테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혼란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이해는 시간문제일 것이다.
‘……칼 루테의 입으로 알아야 할 사실은 아니야.’
그녀는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고 입을 열었다.
“레온하르트.”
순간, 그녀를 바라보는 레온하르트의 눈길에서 너무나 큰 감정이 느껴졌다.
그 감정만큼이나 큰 죄책감이 셀린느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제가…… 제가 설명할게요. 전…… 원래 완전히 다른 곳에서 살았어요.”
“……셀린느.”
“이름도 셀린느가 아니었고요. 생긴 것도 완전히 달랐어요. 말도 달랐고, 글자도 다른 곳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어느 날 그 집에서, 끊임없이 죽고 있더라고요.”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셀린느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원랜, 어떻게 살았다고?”
“그냥…… 평범했어요.”
“어디서 살았지? 제국 밖인가?”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집요하게 따라붙는 늑대의 눈빛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말해도 모를 거예요.”
“……일단 말해 봐라.”
레온하르트는 애원하고 있었다.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레온하르트에게, 당신은 게임 속 캐릭터이며 나는 게임을 만든 세계에서 왔다고 하겠는가.
무엇보다도 이제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그리고 그가 사랑하며 목숨을 바쳐 지킨 이 세상을 단순한 게임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알려 주는 순간, 레온하르트는 무너지고 말 테니까.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항상 그랬듯 답을 찾아내었다.
“지금은, 가려 해도 갈 수가 없는 곳인가?”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정한 고향으로…… 진정한 본디의 삶으로 돌아갈 방법은 나를 죽이는 것뿐이고.”
이번에는 셀린느는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으나 레온하르트는 침묵 속에서 원하는 답을 얻은 듯했다.
“돌아가.”
“……!”
셀린느의 전신이 경악과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
잘생긴 입매에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흑마법사들의 저주가 완성되는 걸 막을 수가 없다면 어차피 넌, 나를 죽이게 될 거다.”
셀린느는 도리질을 쳤다.
“아니에요! 대체 왜 그렇게…….”
“난 네가 본디 어떤 이름이었는지 모른다.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디서 살았는지조차 몰라.”
레온하르트는 조용히 읊조렸다.
“하지만, 항상 내 곁에 있어 주었던 셀린느 헌트는 안다. 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사람은 아니지…….”
그는 셀린느를 슬프게 바라보았다.
“셀린느. 네가 본 예지에서…… 아마 넌 나를 죽였겠지. 괜찮다. 그때의 나 역시, 널 원망하지 않았을 거야.”
간신히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목이 따끔거렸고 너무 울어 눈앞이 깜박거렸다.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의 말이 모두 옳다는 건, 셀린느도 알았으니까.
“어차피 이 모든 건……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잘못이 있다면, 예언을 허투루 들은 우리 베르누이가의 잘못이겠지.”
그는 셀린느를 가볍게 감쌌다.
“나는 괜찮다. 널 만나서……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으니까.”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옷을 잡아당기며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냐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차마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라는 사람에게 그럴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셀린느의 등을 어루만졌다.
‘아…….’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품속에서 깨닫고 말았다.
자신은 도저히 레온하르트를 죽일 수 없다.
설령 레온하르트를 죽여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온 지구를 구한다 하더라도 레온하르트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로.
그녀는 이 남자를,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상처받을 그녀의 알량한 양심마저도 달래 주려고 하는 이 남자를…….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를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