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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103화 (103/120)

103화.

‘……뭔 개소리지?’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칼 루테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었다.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이 죽어야 한다니, 그만한 헛소리가 어디 있는가.

“칼…….”

하지만 그는 그녀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았다.

“셀린느 루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지금 와서 흑마법사들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레온하르트가 죽으면.”

셀린느는 간신히 칼 루테의 말을 낚아챘다.

이미 이성을 잃은 듯한 칼 루테를 레온하르트가 아무 잘못이 없다는 논리로 설득하기는 늦었다.

그가 생각하지 못했을 점을 공격해야 했다.

칼 루테의 초록색 눈이 그녀가 레온하르트의 죽음을 대놓고 언급하는 게 의외라는 듯 휘둥그레졌다.

“레온하르트가 죽으면, 흑마법사들은 누가 처치하죠?”

셀린느는 이미 그 답을 반쯤 짐작했다.

‘나겠지.’

죽어도 계속해서 살아나는 데다, 이미 반동을 한 번 푼 전적까지 있으니까.

저리 쉽게 레온하르트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자신 같은 대용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칼 루테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님이 마검사가 되기 전으로 되돌아갈 겁니다.”

“……?”

셀린느는 물론 레온하르트조차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수가 없을 텐데.”

여태까지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하던 레온하르트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에 목숨 바쳐 대항하던 마법사들은 모두 미치거나 죽어 버렸다. 어느 마법사가 대항한다는 거지?”

그는 흑마법사에 대항하다 같은 흑마법사로 변해 버려 자신이 베어야 했던 자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칼 루테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시는 소리입니다.”

셀린느는 힐끗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딱딱했지만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들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행동으로 나서지 않을 뿐이지요.”

“…….”

“이유는 당연히, 공자님이 있으니까요.”

셀린느는 혀를 깨물 뻔했다.

아마 레온하르트의 앞에서 저렇게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칼 루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러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자님이 없어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을 겁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요.”

“…….”

침묵이 내려앉았다.

레온하르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지만, 셀린느는 그의 속내까지 읽어 내지는 못했다.

칼 루테가 침묵을 불쑥 깨었다.

“셀린느 루테. 당신 역시 예전으로 돌아갈 겁니다.”

“……?”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순간 아주 예전처럼 느껴지는 평범했던 삶이 머릿속을 한가득 메웠기 때문이었다.

매시간 죽음을 생각하지도 않는 삶.

그저 좋아하는 취미를 즐기며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

‘아니야.’

곧 셀린느는 칼 루테의 말이 그녀의 ‘저주’ 그 이상 그 이하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네 저주가, 그렇게 풀리는 거였군.”

“저주라니요?”

레온하르트의 중얼거림에 칼 루테가 코웃음을 쳤다.

“그건 저주가 아닙니다.”

셀린느의 입이 벌어졌다.

“네……?”

칼 루테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요.”

머리가 어지러웠다.

‘설마…….’

셀린느는 칼 루테의 말이 암시하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의미는 너무나 그가 말할 리 없는 종류의 것이라, 셀린느의 머리는 더 이상의 생각을 거부하고 말았다.

“셀린느 루테.”

칼 루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그 말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칼 루테는 더는 말하지 않았기에, 남은 판단은 오롯이 셀린느의 몫이었다.

“셀린느!”

칼 루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온하르트가 소리치며 셀린느를 안아 들었다.

이내 그는 셀린느가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것 또한 저 미치광이 예언자 때문이리라.

만약 품에서 축 늘어진 셀린느가 아니었다면, 칼 루테를 단숨에 베어 버렸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무슨 짓이냐!”

칼 루테는 슬픈 눈으로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공자님, 공자님께선 포기하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내 목숨을 말인가?”

레온하르트는 한껏 비꼬았지만 칼 루테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듯했다.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려는 걸 포기하셔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셀린느는 눈을 뜨자마자 이곳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꿈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셀린느가 보고 있는 풍경 자체는 레온하르트도 칼 루테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조금 전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눈으로 뒤덮인 황무지.

하지만 조금 전까지 보던 생생한 광경에 비해 너무나 이질감이 드는 모습이었다.

나무는 나무였고 별은 별이었으며 하늘은 하늘이었으나 그녀가 아는 것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

마치…….

‘……그림?’

셀린느는 바로 옆의 앙상한 나무를 만져 보았다.

아무런 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겨울 나무에게서 느껴져야 할 차갑고 울퉁불퉁하고 단단한 느낌이 아닌, 열이 발산되는 듯한 매끄러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유리?’

셀린느는 얼굴을 찡그렸다.

유리에 보관된 그림 속으로 들어온 꿈이라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게 예지일 리가 없어.’

분명 아까 본 예지는 현실처럼 생생했다.

문득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금은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과거에 그녀가 자주 보던 무언가를 연상시켰다.

‘아니야.’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니야!’

하지만 다음 순간, 셀린느는 경악에 휩싸이고 말았다.

금발에 청회색 눈을 가진 앙증맞은 소녀가 눈밭에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셀린느가 공포에 가까운 감정에 질린 건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예지에서 셀린느는 이미 미래의 레온하르트를 보았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꿈에 나타난다고 달라질 건 없다.

하지만 그녀는 소스라치고 말았다.

눈앞에 나타난 소녀는, 그림이었기에.

그것도 그녀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모습의.

“셀린느의, 악몽…….”

입이 바싹 말랐다.

소녀는 그녀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유려한 2D 캐릭터와 정확히 같은 모습이었다.

진짜 주인공이, 진짜 셀린느 헌트가 그녀의 눈앞에서 움직였다.

앙증맞은 그림의 모습인 셀린느 헌트는 눈밭을 총총 뛰어갔다.

그녀는 쫓아가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시야가 절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아니야.’

그녀는 깨달았다.

이건 그림도, 꿈도 아니었다.

그녀는 실제 게임을 보고 있었다.

***

셀린느가 눈밭을 한참 뛰어 도착한 곳은 베르누이성이었다.

성문은 셀린느가 손을 대기도 전에 저절로 열렸다. 힘이 없어 깜박거리는 유령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셀린느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반짝이는 화살표를 따라 움직였다.

화살표는 중심부가 되는 탑을 지나, 탑과 탑을 이어 주는 연결부로 셀린느를 인도했다.

***

그녀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았다.

‘레온하르트의 탑이야…….’

무의식적으로 혀를 움직이며 입을 뻐끔거렸기에 소리가 나와야 할 터였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셀린느의 움직임에서 눈 한 번 떼지 않았다.

***

셀린느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앙증맞은 얼굴에 지친 기색이 비쳤을 무렵, 울부짖는 늑대 모양 문고리가 달린 문이 나타났다.

셀린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한 사내가 문을 등진 채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레온하르트.

셀린느 헌트를 이미 한 번 죽였던, 이 게임의 악역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

그녀는 울부짖고 싶었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이상한 점을 감지했으나 머리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이유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등을 천천히 돌린 남자는 그녀가 절대 잊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피를 뒤집어쓰고 핏발 선 눈의 악마.

‘셀린느의 악몽’에서 튀어나온 듯한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

셀린느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 레온하르트.

- 셀린느.

둘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구도 무기를 꺼내 들지 않았고, 공격하려는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셀린느의 눈가가 붉어졌다.

- 여기에 오고 싶지는 않았어요.

- 나도, 여기서 널 보고 싶지는 않았다.

- …….

- 왜 온 거지? 일부러 살려뒀건만.

- 미안해요, 레온하르트.

먼저 공격한 건, 셀린느였다.

***

‘이건…….’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려고 했으나 이내 자신에겐 손발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더욱 중대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셀린느의 악몽’의 진엔딩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스포일러를 본 적이 없으니 내용조차 모른다.

하지만 그 내용이, 지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습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진엔딩 루트 역시 셀린느 헌트를 죽이려는 레온하르트 베르누이에게서 달아나는 이야기였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둘의 대화는 분명 ‘셀린느의 악몽’ 속에서 일어났을 법한 대화와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나와, 레온하르트의 대화야.’

그녀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

셀린느는 그녀가 지향하고 레온하르트가 가르쳤던 것처럼 유려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탭댄스의 스텝을 밟는 사람처럼 일정한 간격과 시간으로 그를 공격했다.

링조르가 사방에서 번쩍였다.

셀린느에게서 뿜어져 나가는 마법들은 눈이 부실 정도의 광채를 띠었다.

레온하르트는 그 모든 공격들을 무심하게 막아내면서 반격했다.

양쪽 모두 쉬지 않고 움직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분명 둘 모두 지쳤을 법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둘의 자세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셀린느의 마법도, 레온하르트의 검도 전혀 무뎌지는 기색이 아니었다.

- ……!

셀린느가 눈을 크게 떴다.

레온하르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제자리에서 크게 비틀거린 탓이었다.

셀린느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링조르가 정확히 레온하르트의 가슴 부근에 꽂혔다.

검은 피가 튀어 올랐다.

셀린느는 자신이 한 일에 놀란 듯 뒷걸음질 쳤다.

- 셀린느…….

레온하르트가 애달프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비쳤다.

그게 끝이었다.

레온하르트의 고개는 맥없이 꺾어지더니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셀린느의 무릎이 꺾였다.

그녀는 바닥을 뒤덮은 시커먼 핏물에 무릎을 꿇고, 한참 동안 레온하르트를 내려다보았다.

밤이 되어 빛 한 점 없는 어둠이 그녀를 덮을 때까지.

***

이제 그녀는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아니, 발버둥 치려고 노력했지만 그 무엇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친숙하기 그지없는 음악이 들려왔다.

스테이지의 클리어를 알리는 음악이…….

그녀는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한 채 눈을 감았으나 눈꺼풀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 무엇이든 실제로 보고,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에 금빛 글자가 천천히 떠올랐다.

Tru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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