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레온하르트는 비틀거리는 셀린느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셀린느?”
조심스럽게 셀린느를 불러 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직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어깨만 들썩거릴 뿐이었다.
“칼 루테. 이게 다 무슨 짓인지 설명하지 않는다면…….”
“셀린느 루테께 들으면 되겠군요.”
“지금 그녀는 자네 때문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레온하르트의 몸이 일순간 흠칫했다.
칼 루테의 반문은 평범했지만 지금, 가장 찜찜한 부분을 건드렸다.
여태까지 셀린느의 저주를 풀기 위해 온갖 기이한 일들을 겪었고 기이한 장소들을 거쳐 왔다.
셀린느는 그때마다 ‘꿈에서 보았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지금 역시 칼 루테가 예언을 들먹이는 걸 보면 비슷한 상황이리라.
“……말해라. 무슨 예언이지? 그녀와 자넨 대체 무슨 예지를 한 건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칼 루테가 그제야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그래.”
“공자님께서도, 잘 아실 예지입니다.”
레온하르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칼 루테가 암시하는 예언은 단 하나였다.
베르누이 대공이 예언자란 예언자는 모두 북부에서 쫓아내도록 만든 예언.
“셀린느도, 그 예언을…….”
“완전히 같은 걸 본 건 아닐 겁니다. 그분은 특별하시니까요.”
그때, 셀린느가 레온하르트의 품속에서 비틀거리며 벗어났다.
레온하르트는 입을 열었으나 셀린느가 좀 더 빨랐다.
“신경 쓰지 말아요, 레온하르트.”
“…….”
순간, 말문이 턱 막혀 왔다.
그간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받은 예언에 대해서 별생각을 하지 않았다.
예언은 사기나 헛소리일 뿐이라고 거듭 배워 왔으니까.
하지만, 셀린느를 만나고서 예언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렴풋하게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예언은 항상 옳은 건 아니었지만 분명 그의 아버지가 주장하던 헛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했다.
‘……내가, 가장 많이 그녀를 죽인다고 했었나.’
분명 셀린느는 그렇게 얘기했다.
‘나는 그때 어떻게 반응했지.’
레온하르트는 차라리 떠오르지 않기를 원했으나 셀린느를 만난 첫날은 모든 순간이 선명했다.
- 난 예언자들은 믿지 않아.
- 뭐, 제 말을 안 믿으셔도 상관없어요. 절 죽이지만 않는다면.
- 안 죽일 테니, 따라오기나 해.
하지만 그는 약속을 어겼다.
저 깊은 지하에서, 셀린느를 죽이고 말았으니까.
셀린느는 불안한 눈으로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레온하르트 역시 짚이는 바가 있는 모양인지, 칼 루테의 말에 흔들리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칼 루테가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는 방식으로 [셀린느의 악몽]의 스토리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은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에게 미래는 이미 바뀌었다는 점을 설득하기만 하면 된다.
‘칼 루테는…… 예전의 나와 비슷해.’
그녀는 천천히 칼 루테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래는 바뀌기 마련이에요. 제가 본 예언과도……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요. 칼 루테야말로 그걸 알지 않나요?”
“셀린느 루테.”
셀린느는 움찔했다.
칼 루테의 목소리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사람의 기쁨이 느껴졌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미래는 바뀌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칼 루테의 초록색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예지도 바뀝니다.”
셀린느는 무어라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혀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람은 진정한 예언자였다.
어설프게 아는 게임 스토리로 예언자 행세를 하는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칼 루테는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더니 시간을 확인했다.
“때가 되었군요.”
그리고, 진정한 어둠이 그들을 덮쳤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이 느껴졌다.
‘밖?’
셀린느는 눈을 깜박이다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들어오는 설원에 놀라 눈을 깜박였다.
‘분명, 밤이었는데…….’
그녀는 이제 반쯤 본능이 되어 버린 마법으로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셀린느는 당황하여 마력을 끌어모으려고 했지만, 그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이것도 칼 루테의 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럴 리는 없어.’
칼 루테는 예언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마법사이지, 흑마법사가 아니었으니까.
셀린느는 바싹 경계하며 주위를 살폈다.
‘……!’
청회색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녀가 너무나 잘 아는 곳이었다.
셀린느는 처음 보았을 땐 흉물 그 자체로 느껴졌으나 지금은 아늑함마져 느껴지는 성을 올려다보았다.
‘베르누이성이 왜 여기에?’
칼 루테가 그들을 이동 마법으로 북부로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진엔딩의 일부일지도…….’
그렇다면 레온하르트가 보이지 않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
진엔딩은 결국 주인공 홀로 맞이해야 할 터이니.
셀린느는 홀린 듯 베르누이성을 향해 걸어갔다.
적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밭을 걸어가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일 것이다.
성문은 열려 있었다.
셀린느는 잠시 정취에 젖었다.
이곳에 온 게 얼마 만이던가.
‘납치당한 이후, 처음이지…….’
그동안 누구에게도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가 버린 게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다.
셀린느는 이제는 집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회랑을 따라 걸었다.
베르누이성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땐 낯설고 흉흉하기만 했던 분위기도 이젠 아늑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순 없었다.
진엔딩은, 주인공이 악역을 죽이는 것.
칼 루테가 베르누이성을 살해의 현장으로 삼으려는 목적으로 자신을 이동시켰는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
셀린느는 얼굴을 찡그렸다.
갑자기 홀 쪽에서 무언가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홀로 달려갔다.
“……!”
머릿속이 하얘졌다.
셀린느는 덜덜 떨며 뒷걸음쳤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동물적인 본능만이 느껴질 뿐.
하지만 셀린느는 자리를 떠날 수도 없었다.
베르누이성의 홀 안에서 피를 뒤집어쓴 채 사람들을 살육하고 있는 자는, 레온하르트였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조금 전까지 셀린느가 보던 모습과 흡사했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평소의 진중하고 냉철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망가진 모습으로 검을 휘두르는 살인귀가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셀린느를 흑마법사로 착각한 채 죽이려 들던 레온하르트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서 사람들을 기계적으로 도륙하는 레온하르트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셀린느의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마물 같아…….’
이성을 가지고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 생명을 빼앗는 흑마법사도 아닌, 오직 살육을 위해 움직이는 마물이 그녀의 눈앞에 있는 듯했다.
단지 레온하르트의 껍데기를 뒤집어썼다는 것만 다른.
‘막아야 해.’
셀린느는 왜, 어떻게조차 생각하지 않은 채 홀 안으로 뛰어들었다.
살육이 레온하르트를 움직이고 있다면 지금 그녀를 움직이게 만든 건 절박함이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으나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하인의 목을 쳤다.
사방에서 죽음의 냄새가 느껴졌고 레온하르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셀린느는 어떻게든 마법을 써 보려고 몸부림쳤지만 마력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제발, 제발……!’
어느 순간 홀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의 숨이 끊어졌기에.
셀린느는 어둠 속에서 반쯤 무릎을 꿇은 채 숨을 헐떡거렸다.
‘마법…… 마법!’
빛이 화르르 밝혀졌다.
셀린느는 이제는 억지 미소조차 짓지 않는 칼 루테를 노려보았다.
“무슨 수작이죠?”
“역시, 셀린느 루테께선 저 같은 예언자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군요.”
“……!”
“방금 보신 건, 평범한 예지입니다.”
“평범한…….”
셀린느는 반쯤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칼 루테가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철이 들었을 때부터, 매일같이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공자님께선 셀린느 루테를 찾아서 해결했지만, 제겐 그런 행운이 없었지요. 운 좋게 대공가의 마법사가 될 순 있었지만…….”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에 대한 언급을 듣자마자 그의 안색을 살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그의 존재조차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꽉 감은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잔뜩 굳은 몸에선 긴장이 느껴졌다.
“……셀린느.”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셀린느는 안도감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레온하르트의 눈은 전혀 충혈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셀린느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칼 루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명해 보게.”
“……공자님의 미래입니다.”
“미래는 바뀌기 마련이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찬 것처럼 단호했으나 꾸며 낸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칼 루테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이해를 못 하셨군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매일 꿈을 꾼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꿈은 계속 바뀝니다. 미래가 달라질 때마다요.”
“…….”
“공자님, 공자님께서는 5년 안에 미쳐 버리실 겁니다. 가족조차 그 손으로 직접 죽이게 되시겠지요. 단 한 분…… 대공 각하만이 성에서 홀로 살아남으십니다.”
칼 루테의 목소리에선 이제 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분이 황제 폐하께 가장 먼저 요청한 건 공자님의 살처분입니다.”
“……믿을 수가 없군.”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이젠 경악에 질린 떨림을 숨길 수가 없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칼 루테가 부드럽게 물었다.
“제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답해 드리죠.”
셀린느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여태까지 칼 루테가 이야기를 하는 대상은 그녀였다.
‘내가,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조금 전부터 칼 루테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얘기했다.
소름이 쭈뼛 돋았다.
‘나는, 진엔딩을 보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셀린느의 혼란스러움과는 별개로 레온하르트와 칼 루테의 대화는 이어졌다.
“내가 어떻게 미친다는 거지?”
칼 루테는 레온하르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공자님도 짚이는 바가 있으실 겁니다.”
레온하르트는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흑마법사들이군.”
“맞습니다.”
칼 루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광기가, 공자님의 탓이라면 제가 진작 말씀드렸을 겁니다. 잘못은 예방할 수 있고, 공자님께선 현명하신 분이니까요.”
“…….”
“하지만 공자님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흑마법사들이 오랜 저주를 완성했을 뿐입니다.”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레온하르트는 아무 잘못이 없다.
여태까지 그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칼 루테도 그걸 알아!’
그녀는 칼 루테에게 질문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이내 닫아 버려야만 했다.
칼 루테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으니까.
“그게 바로, 공자님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