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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101화 (101/120)

101화.

‘나를 기다렸다고……?’

셀린느는 긴장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헛수고인 듯했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십시오, 셀린느 루테.”

칼 루테의 입에서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말이 흘러나왔으니까.

“제가 여태껏, 당신에게 폐를 끼친 적이 있었습니까?”

셀린느는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칼 루테의 말이 맞았다.

그는 셀린느에게 성심성의껏 마법을 가르쳤으며 위기에서 몇 차례나 구해 주었다.

만약 칼 루테가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들었다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회가 있었던가.

“……없네요.”

“그것 보십시오.”

칼 루테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춥지 않으십니까? 보아하니 마법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 같은데, 모닥불이라도 피워 드릴까요?”

“쓸 수 있어요. 괜찮아요.”

셀린느는 곧바로 마법으로 온기를 불러와 자신의 몸을 둘러쌌다.

“다행이군요.”

칼 루테는 진심으로 안도한 듯한 기색을 내보였다.

‘그래, 괜한 의심은 말자.’

셀린느가 머뭇거리는 사이, 레온하르트는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셀린느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찾아보니…… 여기 계시더군요.”

“여기가 대체 어딘가?”

“황성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레온하르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런 곳을 내가 모를 리가 없지 않나.”

“결계에 가려져 있더군요. 의식적으로 찾으려 들지 않는 이상 모르실 만합니다.”

칼 루테는 이 모든 대답을 하는 중에도 셀린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많이 걱정했는데……. 여기까지 안전히 오셔서 다행입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칼 루테는 여태껏 셀린느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었다.

공자님이 무사히 탈출해서 다행이라거나, 몸은 어떻냐는 등 레온하르트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작 그가 모셔야 할 주군은, 레온하르트 베르누이임에도.

‘왜일까.’

셀린느의 머리가 내놓은 대답은 단 하나였다.

‘칼 루테도, 진엔딩의 일부여서……?’

만약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면, 지금 칼 루테가 레온하르트의 대답에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자신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는 것도 당연하다.

셀린느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게임 속 칼 루테는 플레이어가 스테이지들을 클리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캐릭터였다.

칼 루테와 만남이 진엔딩 루트로의 분기점이었으니, 진엔딩에 칼 루테가 등장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여기로, 제가 와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요?”

“그럼요.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칼 루테.”

레온하르트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 밑으로 나를 유도한 게, 자네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칼 루테가 손사래를 쳤다.

“저한테 그런 힘이 있었다면, 이미…….”

레온하르트가 그의 말을 잘랐다.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고 있군. 그것도 잘.”

“……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잘 알고 있고.”

“맞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말릴 틈도 없이 앞으로 뛰쳐나가 칼 루테의 목에 라쉬르를 들이댔다.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을 텐데도 칼 루테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말해라. 넌, 뭐지?”

“……공자님.”

칼 루테의 목소리는 어딘가 슬프게 들리기까지 했다.

“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거두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넘어갈 생각은 접어라.”

“레온하르트.”

셀린느가 조심스럽게 레온하르트를 제지했다.

“대충 알 것 같아요. 칼 루테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지금 왜 이곳에 있는지도요.”

“…….”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셀린느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라쉬르를 내리고, 셀린느의 곁으로 돌아왔다.

분명 살갗에 검날이 닿지 않도록 거리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했음에도 칼 루테는 목이 조였다 풀려난 사람처럼 자신의 목을 쥐고 비틀거렸다.

“이제 말해 주세요. 왜 저를 기다리고 있었죠?”

칼 루테는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긴 이야기가 되겠군요.”

“여기서 벗어나고 난 후엔 할 수 없는 얘긴가?”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다소 초조하게 들렸다.

“아뇨.”

칼 루테는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직시했다.

“여기에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툭.

그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파열음이 들렸다.

셀린느는 비명을 질렀으나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둠이 그들 모두를 덮쳤기에.

셀린느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다급하게 사방으로 팔을 내저었다.

그때, 누군가가 셀린느를 자신의 품 안으로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였다.

“움직임을 자제하고, 가만히 있어라.”

“여긴…… 뭐죠?”

“결계다.”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이곳에서 결계를 만들 사람이라면 단 한 명, 칼 루테뿐이었다.

‘왜지?’

셀린느는 혼란스러워 자꾸 엉켜 버리는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깰 순 없어요?”

“그게…… 잘 안 되더군.”

“……!”

셀린느의 눈이 크게 열렸다.

‘레온하르트가 해결할 수 없는 결계라니.’

여태까지 레온하르트는 어린아이가 만든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손쉽게 마법으로 이루어진 것들을 파괴해 왔다.

“칼 루테가, 그렇게까지 강력할…….”

셀린느는 말을 뚝 멈추었다.

‘아니야.’

칼 루테가 전설 속의 존재나 다름없다는 레온하르트보다 강력한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이것도 스테이지의 작용이야.’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을 안 쓰십니까?”

칼 루테의 목소리는 분명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못 쓰는 게 아닌가요?”

“써 보십시오.”

셀린느는 눈을 감고 잠시 정신을 집중했다. 루에게서 빨아들인 마력들이 몸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익숙한 푸른색 불빛들로 사방이 밝아졌다.

‘……공간?’

그들이 있는 곳은 그저 텅 빈 공간이었다.

하늘도 땅도 없이, 오직 그들 셋만 존재하는.

“여기가 어디죠?”

“저도 모릅니다.”

칼 루테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뭐?”

레온하르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자네가 만들어 낸 결계잖나.”

“공자님,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칼 루테는 처음으로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 마땅한 때에, 마땅한 곳으로 온 것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저와는 상관없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예언자였나, 너도.”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분명 레온하르트에게 칼 루테의 말은 자신이 예언자임을 암시하는 것만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셀린느는 그 이면의 의미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칼 루테는 그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는 레온하르트의 질문을 무시한 채 셀린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칼 루테는 품속에서 작은 수정구를 끄집어냈다.

‘저걸 칼 루테가 왜……?’

셀린느가 의문을 품으면서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셀린느에게 수정구를 넘겨주었다.

수정구는 셀린느의 손에 닿자마자 바스러졌다.

셀린느는 조심스레 유리 조각들을 털어 냈다.

익숙한 양피지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찢는 자, 별이 되리라.]

청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문구 또한 익숙했다.

‘이건, 고문실에서…….’

세 번째 스테이지였던 고문실에서 본 문구가, 그녀의 손 위에 얌전히 올라 있었다.

‘이게 퀘스트라니.’

이것의 의미를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는 칼 루테에게 묻는 게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칼 루테는 도저히 시시콜콜할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셀린느가 질문하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칼 루테의 입에서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으니까.

“왜 공자님을 살려 내셨습니까? 절대 그렇게 될 수가 없었는데!”

아주 잠시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은 유효 기간은 레온하르트가 분노에 가득 차 으르렁거리며 끝났다.

“역시, 너는……!”

칼 루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셀린느 루테, 당신은 공자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게 정해진 대로 흘러갔다고요!”

셀린느는 충격에 휘청거렸다.

옆에서 레온하르트가 무어라 소리쳤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귓가가 왱왱 울렸다.

‘말도 안 돼!’

머리가 돌아갈 법도 한데 굳어 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가슴속에 울리는 말은 전부 부정뿐이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 없다…….

칼 루테가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레온하르트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칼 루테의 목소리까지 막지는 못했다.

“당신이야말로 가장 잘 알지 않습니까. 저와 같은…… 예언자라면!”

“몰라요!”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머리가 뱅글뱅글 돌고 토기가 올라왔다.

대체 왜 자신이 레온하르트를 죽이고 싶어 하겠는가.

레온하르트는…….

아주 찰나의 생각이 셀린느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그 끔찍한 집에서 구해 주었고, 끊임없이 죽다가 미쳐 버리는 운명에서도 구해 주었다.

그의 입장에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면부지였던 여자의 저주를 푸는 일에 목숨을 걸고 매달려 주었다.

저주가 풀리지 않고, 마법도 영영 쓸 수가 없게 된다 하더라도 평생 셀린느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과 별개로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죽일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레온하르트였으니까.

“셀린느!”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 간신히 현실로 돌아왔다.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현실로.

바닥도 천장도 경계도 없이 오직 자신과 레온하르트, 칼 루테만 존재하는 곳으로.

“이제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칼 루테는 비꼬거나 공격하는 투가 아니었다.

그는 명백히 셀린느를 걱정하고 있었고, 바로 그 점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너……!”

“공자님. 제 상대는 공자님이 아닙니다. 공자님의 상대 역시 제가 아니지요.”

칼 루테의 명료한 말을 들을수록 머리가 점점 차가워졌다.

셀린느는 자신에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하려는 칼 루테를 잠시간 저지했다.

이미 머릿속에서 퍼즐이 하나둘 맞추어지는 중이었다.

진엔딩을 보면 레온하르트가 흑화한 원인을 알 수 있다는 게임사의 귀띔.

마치 마법 훈련을 유도하는 듯한 스테이지와 퀘스트.

무엇보다도, 레온하르트를 세뇌시켜 그녀와 로즈를 공격하게끔 만든 스테이지.

그리하여 그녀가 레온하르트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것까지.

‘이 모든 건, 정해진 것…….’

셀린느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드디어 칼 루테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절망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아.

왜 자신은 진엔딩 스포일러를 보지 않았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칼 루테의 말이 맞았다.

분명 셀린느 헌트는 저 지하 미로에서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를 죽였어야만 했다.

강력한 마법사로 개화한 게임의 주인공이 살육밖에 모르는 악역을 죽이는 것.

그것이 진엔딩일 테니.

칼 루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전부 깨달으신 모양이군요.”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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