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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100화 (100/120)

100화.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창백해진 셀린느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셀…….”

그는 셀린느를 부르며 괜찮냐고 토닥이려다 손을 거두었다.

‘내게, 무슨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그는 로즈가 자신을 볼 때마다 겁에 질린 짐승처럼 움츠러들었다는 점을 기억했다.

셀린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으나 속은 로즈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더 심하겠지.’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셀린느를 죽였던 기억들은 마치 오래전에 일어난 것처럼 흐릿했으나 그를 미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의 몸을 뒤덮은 붉은 피가 셀린느의 것이라는 자각을 매순간 하게 되었으니까.

자각과 동시에, 뒤따라오는 기억들이 있었다.

공포와 고통에 겨워 눈물로 가득 찬 청회색 눈, 환상통에 시달리면서도 몸을 뒤틀어 시간을 끄려는 시도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무정하게 벤 자신.

만약 셀린느의 저주를 풀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동력이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 무너졌을 것이다.

‘……얼마 안 남았다고 했지.’

레온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나무와 수풀, 가시덤불이 무성함에도 생명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황무지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셀린느일 터.

그는 더더욱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해야 했다.

셀린느는 몇 분이 흐른 후에야 간신히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정신 차려.’

그녀는 자신을 꾸짖었다.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여태까지 두 번째 스테이지를 제외한 모든 스테이지를 통과했다.

두 번째 스테이지는 건너뛴 게 아니라, 스테이지의 순서가 바뀐 것이었다는 정도는 예상했어야 했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에 나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녀는 아직도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레온하르트.”

“괜찮…….”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말을 단번에 끊었다.

지금 중요한 건 자신의 안부가 아니었다.

“저, 여기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전혀 모르겠어요.”

“……신경 쓰지 마라.”

셀린느는 씁쓸하게 설명했다.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어요. 그냥, 알고만 있어요. 제가 생각만큼 도움은 안 될 테니까.”

“셀린느.”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몸 근처에 보이지 않는 방어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어깨가 아닌, 어깨 인근 공간을 살짝 매만졌다.

“그냥…….”

그는 분명 할 말이 있었건만 입 밖으로 낸 순간 잊어버린 것처럼 바로 입을 닫아 버렸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하고자 했던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죽지만 말아 달라고 하고 싶겠지.’

하지만 지금의 레온하르트가 결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리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여태까지의 스테이지들은 적어도 방향성이라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예상을 완전히 깨트리고 등장한 두 번째 스테이지에 대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셀린느는 필사적으로 두 번째 스테이지의 내용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마물들이 나왔던 것 같기는 한데…….’

적이 어떠했는지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수가 없다.

당장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이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좋겠군.”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

레온하르트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색하게 굳은 입매가 아니었다면 순간적으로 그의 복잡한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갈 정도로.

‘레온하르트는, 나를 안심시키고 싶은 거야.’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갈피를 잡지 못해 당황하고 있다는 점을 레온하르트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그래서 레온하르트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셀린느의 괴로움을 덜어 주기 위해서.

‘…….’

셀린느는 잠시 망설였다.

그에게 무작정 움직이는 게 위험하다고 얘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레온하르트가 위험해질 리는 없겠지만, 자칫해서 자신이 또 죽게 된다면…….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레온하르트가 한 번 더 스테이지에 세뇌당한다면.

‘레온하르트가 그걸 버텨 낼 수 있을까.’

속이 타들어 갔다.

레온하르트는 지금, 자신의 앞에서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속은 폭발 직전의 화약고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니야. 두 번째 스테이지에선 레온하르트가 쫓아오지는 않았어.’

셀린느는 쿵쾅대는 가슴을 간신히 가라앉혔지만, 불쑥 떠오른 생각에 숨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하지만, 이건 진엔딩 루트야……. 이미 내가 플레이했던 두 번째 스테이지와는 완전히 바뀌었겠지.’

셀린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민에 휩싸여 몇 분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레온하르트가 다급하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을 때까지.

‘마물!’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생각에 잠긴 사이, 마물들에게 둘러싸인 모양이었다.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수는 점점 더 불어나고 있었다.

셀린느는 곧바로 공격 마법을 쓸 준비를 했다.

‘……!’

눈이 저절로 커졌다.

그녀가 마력을 끌어모으는 데 걸린 시간은 단 수 초.

아직 분출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 인근의 마물들은 조각조각이 난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마법은 자제해라.”

“왜, 왜요?”

“예감이 좋지 않아.”

레온하르트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 걸까.’

셀린느는 아가티르수스를 떠올렸다.

레온하르트가 마법을 자제하라는 덴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알겠어요.”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한결 안심한 기색이었다.

그는 하늘을 빤히 바라보더니, 한 가지 방향을 정한 듯 그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셀린느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최우선 목표는 이곳을 벗어나는 것일 터.

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게 목적인 그녀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레온하르트는 치트키니까.’

물론 아직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스테이지에 크게 영향받은 레온하르트를 직접 겪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레온하르트는 벗어나 주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가만히 멈춰 서 있다간 아까와 같은 상황에 처할 뿐이리라.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와 함께 걸어가면서도 주위 환경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 정도 마물들이 전부일 리가 없어.’

분명, 어딘가에 함정이나 만만치 않은 적수가 나타날 것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셀린느는 오돌오돌 떨기 시작했다.

‘……춥네.’

레온하르트는 흑마법사를 죽일 때 쓸데없는 자상을 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듭된 죽음은 셀린느의 옷을 너덜너덜하게 만들기엔 충분했고, 차가운 겨울바람은 빈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마법을 쓰자니 레온하르트의 말이 걸렸다.

셀린느는 무의식적으로 레온하르트에게 꼭 붙어 걷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곁으로 붙어 오는 셀린느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자신은 셀린느를 계속해서 죽였다.

너덜거리는 셀린느의 옷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레온하르트는 지금 입고 있는 겉옷이라도 벗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겉옷 역시 셀린느의 피를 뒤집어쓴 데다, 링조르에 입은 자상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집중해라,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셀린느가 더는 예언을 할 수 없다는 점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을 제외하면.

‘흑마법사는 아니야.’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또 무언가에 속고 있는 게 아닐지 계속해서 시험해 보았다.

하지만 결론은 모두 같았다.

어슴푸레한 별빛 속에서 그들을 노리고 있는 건, 강력한 마법사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더는 자신에게 흑마법사로 느껴지는 자를 벨 자신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어둠 속에서 그들을 노리는 자가 마법사라는 건 다행으로 느껴졌다.

흑마법사가 아닌 자는 죽이는 대신 제압하는 게 그의 원칙이었으니.

레온하르트는 까슬한 목을 가다듬었다.

셀린느가 마법을 쓰기 전까지는, 저자가 그들의 위치를 먼저 눈치챌 확률은 희박했다.

사실, 기습을 당하더라도 평소라면 걱정되지 않겠으나 현재 셀린느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그는 셀린느를 내려다보며 다짐했다.

끝까지 지키겠다고.

그녀에게 위협이 되는 게 무엇이든 없애 주겠다고…….

그게 설령, 자신이라 하더라도.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곁에서 조금씩 차분해졌다.

레온하르트의 온기는 추위를 달래 주었고 말없이 느껴지는 배려심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래, 조금만 더…….’

진엔딩 루트가 노멀 루트에 비해 길이가 길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게, 정말로 마지막일 거야.’

셀린느는 마음을 다잡았다.

‘끝을 보자. 그리고…… 레온하르트의 흑화를 막아 내는 거야.’

갑자기, 레온하르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셀린느는 입을 열려다 닫았다.

레온하르트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뜻을 전달하기엔 충분한 강도로 그녀를 부드럽게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뭔가 있어.’

셀린느에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보다 레온하르트를 더욱 신뢰했다.

“나와라.”

레온하르트의 차가운 목소리가 싸늘한 겨울 공기에 울려 퍼졌다.

“나오지 않으면, 베겠다.”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레온하르트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건 흑마법사라는 의미.

하지만 흑마법사 특유의 사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셀린느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레온하르트가 또, 미로 속에서처럼 스테이지에 세뇌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라쉬르를 빼 들 기세인 레온하르트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를 만류했다.

“흑, 흑마법사는 없어요.”

“정확하시군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청회색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뭐야, 자네였나.”

긴장이 한풀 꺾인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칼 루테?”

칼 루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말쑥한 모습이었다.

짧게 깎은 은발과 부드러운 초록빛 눈은 여전히 세월의 풍파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몸에 두른 화려한 로브가 별빛을 받아 번쩍였다.

이젠 딱딱하게 굳은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레온하르트와 셀린느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셀린느의 심장이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쿵쾅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듯했지만, 이곳은 스테이지다.

칼 루테가 이곳에 있는 게, 우연일 리가 없었다.

‘만약, 우연히 있게 되었다면…… 진작 모습을 드러냈을 거야.’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자신에게 마법을 쓰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칼 루테는 레온하르트가 자신의 존재를 인지할 정도로 그들을 가까이서 미행하면서도, 협박을 듣기 전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위험해.’

셀린느가 핑 도는 머리를 가라앉히려 애쓰며 레온하르트에게 몸을 기대는 순간.

칼 루테의 입이 열렸다.

“셀린느 루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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