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쿵!
루는 답답한 듯 천장을 향해 온몸을 부딪쳤다.
몇 차례 만에 천장엔 거대한 구멍이 뚫렸고 그 잔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루는 한 차례 크게 울부짖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밤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셀린느는 멍하니 뻥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새카만 하늘에 별들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구멍을 통해 들어와 통로를 한가득 메웠다.
무언가 뜻 모를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뭘까, 이 느낌은…….’
셀린느는 붉어지는 눈시울을 매만졌다.
루가 떠났다.
항상 자신의 손목에 붙은 작은 새끼 용으로만 있을 것 같은 루가.
“……셀린느?”
갑자기,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셀린느는 홱 고개를 돌렸다.
레온하르트가, 라쉬르조차 바닥에 떨어트린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레온하르트가 세뇌에서 풀려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테이지가 끝나는 것뿐.
하지만 이렇게 쉽게 스테이지가 끝날 리가 없었다.
‘확인해 보아야 해.’
그녀가 천천히 손을 링조르로 옮기며 레온하르트를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셀린느…….”
셀린느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선 너무나 큰 고통과 회한이 느껴졌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바닥으로 떨구어지는 눈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
세뇌된 것이 분명한 레온하르트에게 몇 번이고 부딪쳤을 때, 그리고 몇 번이고 죽었을 때마다 문득 치밀어 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스테이지가 끝나면 그가 이 순간을 어떻게 기억할지에 대한 의문이…….
‘잊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잔인하게 죽였다.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버거운 진실이었다.
실은 셀린느 자신조차, 제대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셀린느는 머뭇거리지 않고 레온하르트에게로 다가갔다.
레온하르트가 딱딱하게 굳은 채 셀린느의 움직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셀린느를 향하려는 듯 움직였다가, 둥글게 말려 주먹을 쥐었다.
마치 셀린느를 만져서도 안 될 것처럼.
‘……스테이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어.’
따뜻한 안도감이 가슴에 차올랐다.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스테이지는 끝이 났고 레온하르트는 돌아왔다.
‘이게 원래, 진엔딩 루트였던 걸까. 그래서 진엔딩을 보려면 용이…….’
떠오른 생각들은 레온하르트의 앞에 도달하자마자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 셀린느에게 중요한 건 오직 레온하르트가 돌아왔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녀는 레온하르트를 두 팔 벌려 껴안았다.
“……!”
레온하르트의 몸은 곧바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셀린느를 공격하는 대신, 어색하게 팔을 올려 등을 두드렸다.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
“괜찮아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괜찮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었다.
지금, 레온하르트가 어떤 심정에 빠져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줘야 해.’
이미 밤이라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레온하르트가, 그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건 다음 밤으로 미뤄졌으니까.
지금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다음 밤을 버텨 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방금 일어난 일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침내, 레온하르트의 입이 열렸다.
“미안하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엔 깊은 후회가 절절히 묻어났다.
셀린느는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건 거짓말이었으니까.
하지만 레온하르트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 역시 셀린느의 진심과 거리가 멀었으니까.
지금, 레온하르트에게 가장 말해 주고 싶은 것은 위로였으나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레온하르트를 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셀린느의 시야에 나타났다.
“로즈!”
셀린느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잠시나마 로즈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레온하르트에게서 떨어져 나오며 로즈에게로 다가갔다.
로즈가 창백한 얼굴로 셀린느와 레온하르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공자는…….”
“이제, 괜찮아요.”
레온하르트가 로즈를 향해 다가가려다, 로즈가 크게 움찔하는 걸 보고 제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추었다.
까슬까슬한 목소리가 통로에 울려 퍼졌다.
“미안하다. 베르누이가의 이름을 걸고 사죄하지.”
“……그럴 것까진 없어요, 대공자.”
로즈의 눈은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렸으나 목소리는 태연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공자의 의도가 아니라는 건 알겠으니까.”
“로즈, 몸은 좀 괜찮아요?”
“괜찮겠어요?”
로즈는 허리를 짚었다.
“온몸이 다 쑤시고…… 무겁고. 하지만 뭐, 죽을 것 같지는 않네요.”
그녀는 셀린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 봤구나…….’
지금 로즈가 자신에게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일 것이다.
레온하르트에 대한 배려.
로즈는 천장에 난 구멍을 빤히 올려다보였다.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위치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저기로 나가면 되는 거겠죠?”
“……모르겠어요.”
“여태까지 자신만만하던 예언자님이, 왜 그러신담.”
로즈가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여기서 본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고마워요.”
“대신, 설명은 해 줘요. 알았죠?”
“……그럴게요.”
로즈는 구멍을 향해 다가가더니 바닥을 짚었다.
셀린느는 그녀가 하려는 행동을 알아차렸다.
‘계단을 만들려는 거야.’
로즈는 잠시 눈을 감더니 정신을 집중했다.
번듯한 계단이 바닥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쾅!
셀린느는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
몸 위로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레온하르트였다.
“괜찮은가?”
갑자기, 눈물이 한 방울 맺혀 볼 밑을 타고 흘렀다.
레온하르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셀린느. 어, 어디가…… 안 좋은가? 말을 해 다오.”
“아뇨.”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정말로 괜찮았다.
정말로 그녀가 잘 아는 레온하르트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격했을 뿐이었다.
레온하르트가 이마를 찌푸렸다.
“로즈 루테가 만들던 계단이…… 폭발한 것 같군.”
“다친 데는 없어요, 로즈?”
“없어요. 그런데…….”
로즈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 뭔가, 있는 것 같아요.”
셀린느는 로즈가 계단을 만들던 자리로 다가갔다.
천장에 뻥 뚫린 구멍 바로 밑이었기에 겨울바람이 강하게 느껴졌다.
“……?”
셀린느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뭔가?”
레온하르트 역시 그녀 옆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계단 같아요.”
셀린느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매만지던 부분에 발을 올려놓아 보았다.
보이지 않는 디딤돌이 느껴졌다.
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저에게도 느껴지기는 느껴져요. 다만…….”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전 올라가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역시 셀린느는 올라갈 수 있네요.”
“무슨 뜻이지?”
레온하르트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는 그 와중에도 로즈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로즈는 셀린느가 발을 올려놓은 보이지 않는 디딤돌을 가리켰다.
“아까, 전 그 용이 날아가기 전까진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거든요. 저기 근처에 가도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럼, 폭발도 비슷했겠군.”
“네. 폭발이 저절로 일어났다기보단, 몸을 제어할 수가 없었어요.”
레온하르트는 보이지 않는 계단을 향해 성큼 다가가, 셀린느의 옆으로 올라섰다.
“……!”
셀린느는 깜짝 놀라 계단에서 내려가 버렸다.
“레온하르트!”
이 계단이 로즈에게 스테이지와 같은 영향을 미쳤다면, 레온하르트에게도 마찬가지이리라.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바뀐 기색 하나 없이 보이지 않는 계단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 위로, 올라가라는 것 같군.”
“…….”
셀린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레온하르트까지 이 보이지 않는 계단에 올라설 수 있는 지금 더욱 확실해졌고.
하지만 자신과 레온하르트가 이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로즈는 어쩌란 말인가.
‘외부인의 출입을 이렇게까지 막은 적은 없었지.’
초록빛 연기가 리브론성 전체에 영향을 주었던 것도 그렇고, 이 미로에 바트와 로즈가 모두 들어올 수 있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셀린느가 생각할 수 있는, 이 게임에서 예외적인 상황은 단 하나였다.
‘진엔딩이야.’
셀린느는 한 차례 심호흡하며 위를 바라보았다.
‘내가 보았던 엔딩 역시…… 미로에서 빠져나가자마자 시작되었지.’
셀린느가 보았던 노멀 엔딩은 주인공이 레온하르트에게서 영원히 벗어나, 평화롭게 사는 것으로 끝이 났다.
평화는 찾지만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엔딩이었다.
이제 이 투명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셀린느가 그렇게 기다려 왔던 진엔딩이 펼쳐질 것이다.
셀린느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때, 로즈의 단단히 결심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 그냥 되돌아갈게요.”
“로즈!”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내 몸 하나 간수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셀린느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로즈를 과소평가해서가 아녜요. 지금부터 입구를 찾으려면…… 중간에 표식들도 다 없어졌을 테고…….”
“나가는 입구는 여러 개다.”
레온하르트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곳 근처에도 여럿 있는 것 같더군.”
로즈는 놀란 얼굴로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셀린느는 그녀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로즈는 레온하르트가 방금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찾아볼게요.”
“아니.”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말했다.
“괜찮다면, 내가 입구를 찾아 주고 싶군. 그게 더 빠를 테니까.”
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레온하르트가 다른 입구를 찾아낼 때까지 말없이 움직였다.
다행히 다른 입구는 그들이 있던 위치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로즈는 오래되어 녹이 잔뜩 슨 문을 힘을 주어 열었다.
“……!”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서도 문밖이 리브론성 어딘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잘 가요, 로즈.”
셀린느는 아쉬움이 담뿍 담긴 인사를 건넸다.
지금 헤어지는 게 최선이라는 건 알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셀린느.”
로즈는 등을 돌리지 않은 채, 그녀를 불렀다.
“행운을 빌어요. 당신에겐 정말로 많이 필요한 것 같으니까.”
셀린느가 대답하기도 전에 로즈는 문밖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고마워요, 로즈. 전부 다.’
셀린느는 그녀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를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
그들은 다시 루가 탈출하며 천장을 무너뜨린 지점으로 되돌아왔다.
“셀린느.”
레온하르트가 투명한 계단 위에 발을 얹으며 그녀를 조심스레 불렀다.
“이것 한 가지만 알려 다오. 이 모든 게…… 아직 많이 남았나?”
셀린느는 아직도 흔들리는 레온하르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점점 커지는 고통과 죄책감이 그 속에 자리했다.
“곧 끝나요.”
셀린느는 진심을 담아 얘기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는 긴 뜻이 자리했다.
조금만 더 버텨 달라고, 모두 당신의 흑화를 막기 위해서라고…….
털어놓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지만 지금 말할 수 있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되었다.”
그들은 천천히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올랐다.
마침내, 통로를 완전히 벗어난 순간.
셀린느의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말라 죽은 나무들이 즐비한 광활한 황무지에 서 있었다.
“……성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옆에서 레온하르트의 의문에 찬 목소리가 들렸지만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왜…….’
눈물이 다시금 차올랐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진엔딩 루트였기에 건너뛰었다고 생각한 두 번째 스테이지는 말라 죽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황무지였다.
그 두 번째 스테이지가, 게임에서 본 모습 그대로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