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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97화 (97/120)

97화.

레온하르트를 이를 악물었다.

불씨가 남아 있는 숯 위를 맨발로 걸으면 이런 느낌이리라.

그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셀린느를 향해 다가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었다.

흑마법사는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이니.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너무 이를 악문 나머지 입 안에 상처가 났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에게 느껴지는 것이라곤, 오직 셀린느가 흑마법사라는 비정한 현실뿐이었다.

셀린느와 다른 흑마법사는 그를 바라본 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 생각마저도 셀린느다웠다.

레온하르트는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셀린느와 전 제국의 안위를 두고 저울질을 하라면 망설임 없이 그녀를 택했을 터.

아직도 가슴을 아프게 두들겨 대는 감정을 잠재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는 천천히 움직이는 셀린느의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 모양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 레온하르트.

라쉬르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레온하르트는 마지막 남은 자제력을 발휘해 일렁대는 감정을 숨기고 표정을 차갑게 유지했다.

흑마법사에게 그의 동요를 눈치채게 할 수는 없었다.

‘저건…… 셀린느가 아니다.’

레온하르트는 서서히 공격 자세를 취했다.

단 몇 초 후면, 셀린느를 향해 일격을…….

레온하르트의 움직임이 아주 잠시 멈추었다.

‘그 흑마법사다.’

셀린느의 곁에 있던, 어딘지 낯익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흑마법사가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쳤다.

‘……다행이군.’

레온하르트는 망설이지 않았다.

“아악!”

흑마법사는 몸을 날렸지만 레온하르트의 일격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흑마법사가 두 명인 상황은 거의 겪어 본 적이 없으나, 약한 개체를 먼저 노리는 건 전투에서의 상식이었다.

그는 이 흑마법사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이자가 아니었다면…… 그에겐 셀린느를 공격하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니까.

만약 레온하르트에게 이성이 남아 있었다면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모순되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레온하르트를 광기에 가까운 강박증으로 밀어 넣었다.

“로즈!”

셀린느는 다급하게 소리치며 로즈를 뒤로 잡아당겼다.

“괜찮아요?”

“…….”

로즈는 가쁘게 숨을 내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척 보기에도 상태가 무척 좋지 않아 보였다.

초조한 마음에 심장이 파닥거려 죽을 것만 같았다.

분명 끝나야 할 스테이지는 끝이 나지 않았고, 레온하르트는 아직도 셀린느를 흑마법사로 착각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로즈까지 이런 상태에 빠지다니.

“……피해 있어요.”

셀린느는 로즈를 레온하르트의 공격이 닿지 않을 만한 기둥 뒤로 피신시켰다.

‘어떻게 하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금도, 레온하르트는 그들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셀린느는 상황을 살피려다 레온하르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닫고 말았다.

‘……공격해야 해.’

지금, 로즈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가 레온하르트와 싸워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다.

오래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로즈. 제 말 잘 들어요, 제가…… 레온하르트와 싸워서 시간을 끌게요. 그동안 도망쳐요. 그럴 수 있겠어요?”

로즈가 대답 대신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느는 품 안에서 링조르를 꺼내 움켜쥐었다.

근래 들어 눈 감고도 정확하게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손에 착 감겼긴 검이, 지금만큼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셀린느는 그 이유를 알았다.

링조르는 레온하르트가 황제로부터 하사받아 그녀에게 준 검이었다.

셀린느는 지금, 레온하르트가 쥐여 준 무기로 그를 공격해야만 했다.

‘……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말로 레온하르트를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뒤는 막다른 길.

더는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레온하르트, 미안해요.’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느껴지는 동시에 링조르가 파르스름한 빛을 내뿜었다.

레온하르트는 잠시 얼어붙었다.

‘……뭐지?’

셀린느가 다른 흑마법사를 피신시키고 있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흑마법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본인이었으니까.

괜한 희망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저 안에, 아직 그가 아는 셀린느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되돌아온 흑마법사가 여태까지 단 한 명도 없다 한들 뭐 어떤가.

셀린느 또한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이니.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심장은 셀린느가 그를 향해 링조를 빼든 순간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링조르는 흑마법사 특유의 시커먼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더 이상 현혹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바로 그때.

셀린느가 부딪혀 왔다.

셀린느가 레온하르트를 공격한 그 순간, 로즈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노력했다.

‘움직여야 해……!’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손가락만 겨우 꿈틀댔을 뿐이었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느껴졌지만 닦기 위해 팔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왜, 왜지?’

로즈의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 레온하르트가 자신을 공격하자마자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완전히 움직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레온하르트의 공격을 간신히 피할 수는 있는 상태에서 차츰 느려져 지금은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 없었다.

로즈는 무색무취한 독의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와 셀린느는 지나칠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움직여야 해.’

로즈는 더 이상의 생각은 그만두고 모든 힘을 몸을 움직이는 데 쏟아부었다.

셀린느는 자신을 대피시키기 위해 레온하르트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분명 오래 버티지는 못하리라.

‘됐어!’

얼마나 지났을까.

로즈는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녀는 반쯤 기다시피 몸을 끌어 벽면에 기대었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레온하르트의 공격을 버텨 내고 있을 셀린느가 위험해질 것이다.

‘……?’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든 로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셀린느……?’

셀린느 헌트가 레온하르트 베르누이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싸우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유려했으며 끊임없이 자세가 바뀌었지만 누구도 지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로즈는 숨조차 멈춘 채 셀린느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새파란 불길이 일어난 링조르가 라쉬르를 강하게 가격했다.

라쉬르에서도 곧바로 불길이 일어 셀린느를 휘감을 기세로 바닥부터 천장까지 치솟았다.

‘셀린느……!’

로즈의 심장이 잠시간 멈추었다.

하지만 눈을 깜박여 보니, 불길은 가라앉았고 셀린느는 털끝 하나 다치지 모양새였다.

그녀는 링조르를 고쳐 잡으며 다시금 라쉬르에게로 달려들었다.

‘……?’

로즈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녀는 셀린느의 전력을 다한 움직임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았다.

셀린느를 잠시나마 가르쳤기에,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셀린느의 움직임은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보다 훨씬 유연하고 강력했다.

로즈는 레온하르트가 결코 셀린느를 봐주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레온하르트의 움직임에선 강력한 살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식로 움직이고 있었다.

최소한, 셀린느의 사지를 분지르는 것 정도는 목표인.

그 모든 공격들을 셀린느는 가볍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까지…….’

당시, 로즈는 셀린느의 약점을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지금 셀린느가 로즈를 진심으로 공격한다면 십여 분을 제대로 버텨 낼 자신이 없을 정도로 그녀의 실력은 일취월장해 있었다.

‘나도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하지만 로즈는 셀린느를 돕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온몸이, 다시금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식은땀이 다시금 흘러내렸다.

‘대체, 왜……!’

로즈는 이를 악물었지만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쿵.

그녀는 바닥에 그대로 엎어졌다.

셀린느는 반쯤 무아지경에 빠진 채 링조르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녀가 휘두른 자리마다 마력이 꿈틀거렸다.

셀린느는 일부러 레온하르트를 향해 더 많은 마력, 더 강력한 마법을 퍼부었다.

‘날 알아봐 줘요, 레온하르트.’

하지만 셀린느의 간절한 기원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스테이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마력이 어둠에 단 한 줄기도 물들지 않았다는 점을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되려 셀린느가 마법을 쓰면 쓸수록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기만 했다.

그 와중에서도 자신에게 부딪쳐 오는 움직임에선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울컥하는 것이 가슴으로부터 솟아올랐다.

‘레온하르트는 날 죽일 생각이 없어.’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레온하르트는 마치, 그들이 대련할 때처럼 움직였다.

단지 힘 조절을 전혀 안 할 뿐이었다.

대련 시의 레온하르트는 항상 그녀가 다칠세라 조심스러웠기에, 이 단순한 차이만으로도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레온하르트.’

스테이지가 끝나지 않는 이상 레온하르트가 스테이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스테이지 때문에 그녀를 흑마법사로 착각하고 있을 때조차 너무나 그답다는 점이 셀린느의 손을 떨리게 만들었다.

‘……!’

청회색 눈이 공포에 흔들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셀린느와 레온하르트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셀린느에게 틈이 생겼다는 사실을.

절망감이 셀린느를 꽉 메웠다.

이제 둘의 팽팽한 균형은 끝났고, 레온하르트는 틈을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셀린느는 방어하려 노력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하지만 셀린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공격을 받아 내고, 또 그를 공격하러 애썼다.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셀린느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붉은 피가, 그녀의 손등과 팔, 나아가 전신을 흥건히 적셨다.

레온하르트가 묵직하게 그녀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레,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얼떨떨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레온하르트!”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찔린 게 그녀가 아닌지, 왜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공격을 방어하지 않았는지…….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천장을 바라보게끔 조심스레 눕혔다.

조금 전까지 링조르가 박혀 있었던 가슴에서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힐링 포션!’

셀린느는 품을 더듬었다.

분명 힐링 포션을 넣어 두고 다니던 주머니를 쥐자마자 피가 아닌, 차가운 액체가 그녀의 손을 잔뜩 적셨다.

전신에 소름이 좍 끼쳤다.

셀린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힐링 포션을 담고 다니던 주머니를 끄집어내었다.

주머니는 흘러나온 힐링 포션에 푹 젖어 있었다.

깨달음이 그녀를 강타했다.

레온하르트는 애초에, 그녀를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의 공격은 셀린느의 급소를 완전히 비껴가 항상 품에 소지하던 힐링 포션을 담은 주머니를 쳤다.

그때였다.

레온하르트의 눈이 번쩍 떠지더니, 한쪽 팔이 그녀를 기이한 힘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며 아주 힘겹게 한 마디를 만들어 냈다.

“셀린느.”

푸른 눈은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돌아왔구나.

흑마법사에서 나의 셀린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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