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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96화 (96/120)

96화.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든 채 앞으로 나아갔다.

라쉬르뿐만 아니라, 셀린느를 향해 다가가는 다리도 모래주머니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만약 바트가 없었다면 레온하르트의 발걸음은 더욱 더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트는 나타났다. 그것도 셀린느에게 강하게 현혹된 채.

레온하르트는 더는 흑마법사를 처단해야 한다는 사명으로부터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레온하르트는 무시했다. 그동안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해 온 일이다.

그중 마티아스처럼 가까운 사람도 있었다.

셀린느가 그들과 다를 건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콱 조여드는 심장을 무시하며 라쉬르를 휘둘렀다.

-챙

부러진 칼날이 땅에 떨어졌다.

바트의 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깜박거렸다.

바트가, 결연한 표정으로 반동강 난 칼을 들고 그와 대치를 시도하고 있었다.

조금 놀라긴 했으나 현혹된 자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바트를 거칠게 밀치며 셀린느에게로 향했다.

현혹된 자들은 흑마법사가 죽으면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아오기에, 그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다.

“루테, 가십시오!”

바트가 레온하르트를 몸으로 막으며 외쳤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공자님, 차라리 절 죽이십시오. 하지만 루테를 죽이신다면…… 공자님은 자신을 용서하실 수 없을 겁니다.”

“난 자네를 죽일 생각이 없어.”

레온하르트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흑마법사의 이런 수작은 처음이 아니었고, 대처에도 익숙했다.

최대한 빨리, 효율적으로 흑마법사를 처치하면 된다.

바로 그때, 셀린느가 아닌, 다른 흑마법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단장, 그만해요! 저자는 대공자가 아니에요!”

“두 분 다 어서 가십시오!”

레온하르트는 당황했다.

지금 상황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바트는 지금 흑마법사에게 현혹되어 있기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왜, 저 흑마법사는 바트를 설득하려는 것처럼 보이는가?

가능성은 단 한 가지였다.

저 흑마법사가 아닌, 다른 흑마법사가 독자적으로 바트를 현혹시켰다.

‘……셀린느야.’

가슴 아픈 깨달음이 레온하르트를 기습했다.

바트를 현혹시킨 흑마법사는 바로, 셀린느였다.

“단장!”

로즈가 바트를 향해 부르짖었지만 바트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로즈, 우린 가야 해요!”

“지금 바트 단장을 버리자는 건가요?”

“……레온하르트는 그를 죽이지 않을 거예요.”

“셀린느, 몇 번이야 말해야 알겠어요? 저자는 대공자가 아니라고요!”

셀린느는 다급하게 애원했다.

“이번만큼은 내 말을 들어 줘요. 레온하르트가 맞아요…….”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바트가 제법 오래 시간을 끌어 주었으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을 터.

레온하르트의 인내심이 남아 있을 때 최대한 멀리 그와의 간격을 벌려 놓아야 했다.

다행히 로즈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단장을, 다치게 하지 않는군요.”

“레온하르트니까요.”

“……알았어요.”

그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셀린느는 전력을 다해 낭떠러지의 반대편으로 뛰쳐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셀린느는 점점 기억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맞아, 이 문양들이 나왔어…….’

미로의 벽면엔 명확한 형태가 없는 복잡한 문양들이 아른거렸다.

뛰면 뛸수록 그 문양들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셀린느의 악몽] 속 미로 스테이지 역시 이랬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가고 있어.’

이제 로즈는 셀린느로부터 확연히 뒤처지고 있었다.

마음에 걸렸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스테이지를 클리어 해야 해……!’

레온하르트는 지금, 전혀 그의 본의가 아닌 의지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빠르나 늦으나 스테이지를 클리어한다면 풀리겠지만 그 전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셀린느는 뛰었다.

단 몇 초라도 더 빨리, 레온하르트를 구해 내기 위해.

어느덧 ‘헤르메스의 신발’조차 효력을 다한 모양인지 숨이 가쁘게 차오르고 발바닥이 불타는 듯했다.

하지만 조금도 달리는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셀린느……!”

외침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셀린느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로즈?’

셀린느는 마지못해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무시한 채 뛰어가고 싶었지만,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로즈를 무시할 수 없었다.

‘……!’

심장이 철렁했다.

로즈가, 바닥에 반쯤 나뒹굴며 발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기이하게 꺾인 발목은 그 어떤 마법으로도 회복시키기 어려워 보였다.

“어, 어서…… 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참았어야 했는데…… 잘못했어요. 셀린느라도 도망쳐요. 빨리.”

“……로즈.”

셀린느는 고개를 내저으며 품속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이건……?”

“마셔 봐요.”

로즈는 동그랗게 눈을 떴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게 무엇인지 물을 시간조차 없었으니까.

그녀는 약병의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쭉 들이켰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

로즈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괜찮아요?”

“셀린느, 이건…….”

“시간이 없어요.”

셀린느는 단 한마디로 로즈의 모든 질문들을 차단해 버렸다.

그들은 머릿속에 미로의 전체 구조를 그려 낼 수 있을 정도로 한참을 헤맸다.

다행히 낭떠러지와 같은 돌발 상황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둘 모두 지쳐 말 한마디 없이 뛰기만 할 무렵.

‘끝, 끝이야…….’

셀린느는 스테이지 클리어가 바로 목전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복잡한 문양이 통로의 벽면은 물론 바닥과 천장까지 한가득 메웠다.

다양한 색깔로 시시각각 변화하며 빛나기까지 해 눈이 아플 정도였다.

셀린느는 뛰는 속도를 늦추었다.

‘스테이지가 이렇게 쉽게 내게 클리어되려고 할까.’

지금부터는 극도로 경계해야 했다.

“뭔가, 이상해요.”

이제 확연히 여유를 찾은 로즈가 중얼거렸다.

“뭐가요?”

“모르겠어요? 분명 마법적인 것들인데……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아.”

셀린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둘러댈 자신이 없었다.

“분명 대공자가 저러는 것과도 무슨 연관이…….”

로즈의 말이 뚝 끊겼다.

막다른 길이었다.

“돌아나가야겠네요.”

“…….”

셀린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이렇게까지 왔는데, 막다른 길이라고?’

그들은 한참 동안 갈림길 하나 없는 일직선 통로를 달렸다.

지금 와서 돌아간다면 결국 레온하르트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사방에서 번쩍이는 이 문양들을 보면,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 같지도 않았다.

‘혹시…….’

셀린느는 그들의 앞을 막고 있는 벽면 위에 손을 올리고 마력을 끌어모았다.

‘역시.’

벽 뒤는, 텅 비어 있었다.

셀린느는 정신을 집중해 벽면 전체를 무너뜨리려고 했지만 벽은 미세하게 흔들릴 뿐 금 하나 가지 않았다.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로즈가 다가와 벽면에 손을 올렸지만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셀린느는 대답 대신 품에 손을 넣었다.

링조르가 잡혔다.

로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느는 링조르를 벽에 냅다 가격했다.

벽면에 곧바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됐다……!’

셀린느는 링조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단 몇 초 후.

그들의 앞을 단단히 가로막았던 벽면은 산산조각이 나 발치에 흩어졌다.

다시금 끝없이 길어 보이는 통로가 펼쳐져 있었다.

둘은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

“공자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바트는 자신을 떼어 놓고 셀린느와 로즈를 쫓으려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버럭 고함을 쳤다.

“…….”

하지만 레온하르트에게서 돌아온 건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그는 무어라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떠났다.

“공자님!”

바트는 급속도로 멀어지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 레온하르트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라쉬르로 바닥을 가볍게 그었다.

“……!”

파란 불꽃이 땅바닥에서 천장까지 치솟았다.

바트는 그 불꽃을 뚫고 지나가려고 시도했다간 자신이 뼈도 추리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공자님…….’

바트는 타오르는 불꽃 사이로 흐릿해지는 레온하르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자신을 꾸짖었다.

‘뭐 하는 거냐, 바트.’

그는 등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대공자가 그 자신까지도 갉아먹어 버릴 실수를 하기 전에 막을 사람들을 불러와야 했다.

‘……너무 오래 걸리는군.’

레온하르트는 기계적으로 셀린느와 로즈를 쫓아가며 생각했다.

그는 셀린느가 달리는 속도를 알았다.

웬 신발을 신고 난 이후부터 빨라지긴 했으나 그래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렇게까지 거리가 좀체 좁혀지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잠시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렇게 무식하게 쫓아갈 순 없었다.

흑마법사의 마력은 당연히 흔적을 남길 터.

그 흔적을 추적하다 보면…….

‘……?’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지?’

어디에도 흑마법사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셀린느.’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셀린느의 마력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순간, 바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레온하르트는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그럴 리 없어.’

셀린느는 탑에서 떨어지고, 자신을 만나기까지 걸린 그 몇 시간 사이에 흑마법사가 되었다.

이 흔적들은 아직 흑마법사가 되기 전의 셀린느가 남겨 놓은 것들이리라.

“아…….”

레온하르트는 나지막하게 신음했다.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나 때문이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은 그 기이한 탑에서, 셀린느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셀린느가 이곳에 떨어지고 난 이후에도 그녀를 찾지 못해 흑마법사가 되는 데 일조했다.

‘그래도, 내가 막아야 해.’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막아야 했다.

그 외엔 그 누구도 셀린느를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무한히 살아나는 흑마법사.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자신이 셀린느를 제압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자신조차 그녀에게 허망하게 죽고 말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방법으로 시간을 지나치게 허비하고 말았다.

***

‘드디어……!’

셀린느의 심장이 희망으로 부풀어 올라 퍼덕거렸다.

그들이 도달한 통로의 끝엔, 기묘한 초록빛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저기야.’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 뒤에도 그들의 진로를 막는 벽들이 나타났고, 레온하르트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다는 공포에 떨며 링조르로 그 벽들을 부숴야 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끝난다.

‘조금만 기다려 줘요, 레온하르트.’

마침내 끝까지 도달한 셀린느는 침을 꼴깍 삼키며 횃불을 집어 들었다.

‘……?’

셀린느는 당황하며 횃불을 떨구고 말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셀린느?”

로즈가 그녀보다 더욱 당황한 얼굴로 물어 왔지만 셀린느는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이, 이, 이걸 만지면…… 길이 생겨나는데…….”

머리가 멈추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타닥.

셀린느는 고개를 들었다.

레온하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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