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아주 찰나의 순간.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눈앞에 당당히 서 있는 셀린느가 흑마법사가 아니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 마법 같은 순간은 초봄의 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순간,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졌던 청회색 눈동자는 흑마법사 특유의 어둑한 기운에 잠겨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냉혹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셀린느는, 흑마법사였다.
레온하르트는 식도 전체를 달구며 치밀어 오르는 따가운 덩어리를 간신히 집어삼켰다.
머리가 완전히 얼어붙어 전혀 돌아가지 않았다.
그간 레온하르트를 움직여 왔던 관성은 당장 눈앞의 흑마법사를 베라고 외쳤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셀린느…….’
바로 그때.
셀린느가 등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
레온하르트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
“셀린느……!”
레온하르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순간.
셀린느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분명 그녀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안도감의 미소를 짓는 대신 경악과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흑마법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셀린느는 뒷걸음치며 비틀거렸다.
만약 레온하르트가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 본다면 자신이 흑마법사가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레온하르트와 헤어진 건 불과 몇 시간 전.
한 마법사가 흑마법사로 돌아서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지금 자신을 흑마법사로 착각하게 만들고 있는 건 스테이지.
이 스테이지가 끝날 때까지 그가 정신을 차릴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아……!’
셀린느의 가슴속에 작은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레온하르트가 지금 갑작스레 미쳐서 그녀를 흑마법사로 착각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도 레온하르트도 어찌할 수가 없는 스테이지 때문이었다.
즉, 스테이지가 끝나면…… 레온하르트의 착각도 끝날 것이다.
그녀는 게임 속의 미로 스테이지를 떠올렸다.
쫓아오는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를 피해 미로를 탈출하는 게 전부인, 아주 간단한 스테이지였다.
마지막 스테이지인만큼 그 난이도는 간단치 않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야.’
셀린느는 덜덜 떨려오는 손을 오므렸다.
‘우리가 달아나면…… 레온하르트가 쫓아오겠지. 그 상황에서 어떻게든 나가는 길을 찾아내야 해.’
그녀는 등을 돌렸다.
순간, 로즈와 바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와 닿는 게 느껴졌다.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셋은 거의 동시에 달아나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출발과 거의 동시에 큰 문제점을 깨달았다.
셋은 본능적으로 여태까지 표시해 온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셀린느는 쉴 새 없이 다리를 움직이면서도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대로 가다간 스테이지는 절대 클리어할 수가 없어.’
하지만 멈춰 서서 로즈와 바트에게 차근차근 설명할 시간 역시 없었다.
“둘 다, 먼저 가요.”
“셀린느!”
로즈가 즉각 반발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요. 곧 따라갈 테니까.”
“대공자에게 죽고 싶어요?”
셀린느는 씁쓸하게 웃었다.
로즈는 그녀가 핵심을 짚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런 건 아니에요. 전 신경 쓰지 말고, 둘 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요.”
로즈와 바트는 대답 대신 걸음을 멈추었다.
셀린느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을 빠르게 쫓아오는 레온하르트와 마주치고 말 것이다.
그나마 로즈가 움직이는 동시에 흔적을 고스란히 지웠기 때문에 이만큼이나마 따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누군가.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건 그에게 숨 쉬는 것만큼 쉬울 것이다.
“약, 약속했잖아요.”
입술이 덜덜 떨려 말을 제대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거야…… 대공자가 아닌 다른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로즈의 목소리엔 어딘가 슬픔이 담겨 있었다.
“말해 봐요, 셀린느. 대공자와 싸울 수 있겠어요?”
“…….”
셀린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저희를 먼저 보내고 여기에 남겠다는 건 대공자와 싸우겠다는 얘기나 다름없어요.”
“……싸우려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로즈는 셀린느의 대답을 재촉했으나 셀린느가 입을 열기 전에 레온하르트의 기척이 들려왔다.
그들은 다시 입구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입구에서 먼저 올려 보내고…… 처음부터 시작하면 돼. 그게 더 편할 수도 있어.’
하지만 셀린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알아차렸다.
로즈가 표시한 구간을 모두 지나쳤는데도 그들이 들어왔던 문과, 내려왔던 계단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왜 입구가, 허억, 안, 나오죠?”
로즈가 숨을 헐떡였다.
“놓친 표시는 없었습니다.”
바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테이지야.’
정작 그녀 자신은 입구를 통해 탈출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스테이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멀쩡한 미로를 변화시켜 바트와 로즈마저도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하는 걸 보면.
“걱정하지 말아요. 다른 길이 있을 테니까.”
다행히 이번에는 셀린느의 기이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어투가 먹혀들어 간 듯했다.
“……예언인가요?”
“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는 그녀의 등을 살짝 밀었다.
“그럼, 앞장서요.”
원하던 바였다.
셀린느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당연히 막다른 길도 여러 번 만났지만, ‘헤르메스의 신발’을 신은 다리는 좀체 지치지 않았다.
다행히 로즈와 바트는 그녀의 뒤를 불평 하나 하지 않고 잘 따라와 주었다.
셀린느는 계속해서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걸 목표로 삼았다.
게임 속의 미로는 언뜻 보기엔 복잡해 보였지만, 클리어하기 위해 모든 구간을 외울 필요는 없었다.
모든 길은 결국 한 가지 출구로 이어져 있었으니까.
따라서 미로에서 길을 찾는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다.
셀린느는 뛰고 또 뛰었다.
다행히 기사단장답게 뛰어난 체력을 갖춘 바트는 물론, 로즈조차 그녀에게서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좀 버거워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셀린느가 ‘헤르메스의 신발’을 신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둘의 지구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셀린느가 반쯤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였다.
“……?”
갑자기,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셀린느는 놀라 튀어 오를 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낭떠러지 끝에서 기우뚱거렸다.
“이건…….”
바트가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렸다.
아래에 끝없는 심연이 펼쳐져 있는 낭떠러지라는 걸 확인한 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낭떠러지의 반대쪽 끝마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떡하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건 게임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다리를 만들어서, 건너가면…….’
로즈가 셀린느보다 한 발 더 빨랐다.
순식간에 철로 이루어진 다리가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부터 허공을 향해 끝없이 뻗어 갔다.
“……!”
로즈의 눈이 커졌다.
셀린느는 불안한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지 않은 예감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을 듯했다.
“반대쪽이, 없어요.”
셀린느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 낭떠러지를 건너갈 수가 없다면, 남은 선택지는 되돌아가는 것뿐.
하지만 그랬다간 레온하르트와 마주치고 말 것이다.
셀린느는 낭떠러지 밑으로 그녀를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심연을 바라보았다.
‘…….’
만약 자신 혼자라면 저 밑으로 몸을 던지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로즈와 바트를 데리고 그런 모험을 나설 수는 없었다.
고민하는 사이 레온하르트의 기척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가 귓가까지 쿵쿵 울렸다.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마력을 모았다. 레온하르트와 대놓고 맞설 생각은 없었다.
단지, 로즈와 바트가 도망칠 시간만 번다면 충분했다.
“……셀린느.”
로즈가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가 어떻게든 맞설 테니까, 도망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셀린느는 조금 기가 막혀 대답했다.
“대공자와, 싸울 수 있겠어요?”
“……그건, 로즈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로즈는 고개를 저었다.
“대공자를 공격할 수 있겠어요?”
“…….”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즈는 핵심을 찔렀다. 레온하르트가 어디 보통 사람이던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레온하르트에게 큰 타격을 주어야 할 터.
그런 방법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 있다 한들 셀린느가 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터벅.
둔탁한 발소리가 울렸다.
가슴이 팍 조여들었다.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베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쫓아가는 내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할 수 없었다.
‘난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정작 셀린느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로지 셀린느를 쫓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의 다리를 움직였다.
‘……이렇게 빨랐다니.’
레온하르트는 전속력으로 셀린느의 뒤를 쫓았지만, 그와 셀린느 사이의 간격은 좀체 좁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분명 셀린느의 모습을 보고 쫓아 들어간 통로가 결국 막다른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미로 전체가 셀린느의 도주를 돕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고립된 공간에서 흑마법사를 놓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마침내.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와 다른 흑마법사를 막다른 길에서 맞닥뜨렸다.
‘……?’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길래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했으나, 셀린느의 뒤로는 끝없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연유로 멈춰 섰든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들에게로 서서히 다가갔다.
“공자님!”
“……?”
레온하르트의 입이 벌어졌다.
아무리 그의 정신이 없다곤 하나 이 목소리를 잊을 순 없었다.
카르파티아의 단장의 목소리였으니.
“바트……?”
“공자님, 전 알아보시겠습니까?”
바트의 목소리엔 들뜬 희망이 엿보였다.
“왜, 흑마법사들과 함께 있나!”
레온하르트는 크게 당황하며 외쳤다.
“뭐라고 현혹했든 그들은 흑마법사다. 빨리 이쪽으로 오게!”
이번엔 바트가 어리둥절할 차례였다.
“공자님, 셀린느 루테가 정말로…… 흑마법사라고 생각하십니까?”
“……보고도 모르겠나.”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단순한 착각이길 그 누구보다도 바라는 사람은 바로 레온하르트 자신이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오감이 셀린느 헌트는 흑마법사가 되었노라고 외쳐 댔다.
“공자님, 착각입…….”
“비켜라.”
레온하르트는 명령했다.
‘내가…… 어리석었군.’
그는 흑마법사에 현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바트를 보며 마음 한구석의 나약함을 자각했다.
‘셀린느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니…….’
자신을 공격하는 대신 달아나는 셀린느를 쫓으며 아주 잠시, 셀린느에게 인간성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셀린느 역시 여타 흑마법사처럼 사람을 속이고 생명을 능멸하는 흑마법사가 된 게 분명했다.
레온하르트는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라쉬르를 빼 들었다.
파르스름한 불빛이 통로를 한가득 메웠고, 셀린느의 파리한 얼굴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