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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94화 (94/120)

94화.

다행히 로즈는 레온하르트의 일격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대공자, 이게 무슨 짓인가요!”

그녀는 레온하르트를 공격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이라도 레온하르트 앞에선 헛수고가 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황실 소속 마법사가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를 공격하는 것만큼이나 모순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대체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로즈의 말은 레온하르트의 거듭된 공격으로 인해 뚝 끊겼다.

그녀는 경악에 질린 눈으로 라쉬르의 궤적을 바라보며 간신히 레온하르트의 공격들을 피해 낼 수 있었다.

“다들 피해요!”

로즈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빠르게 돌아간 그녀의 머리가 내놓은 결론은 단 하나였다.

‘이건, 대공자가 아니야.’

이것은 이 미로에 잠들어 있었던 유령이나, 여태껏 제국이 한 번도 보고받은 적 없는 마물이 분명했다.

‘어쩌면 흑마법사의 술수일지도.’

흑마법사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다.

로즈는 마력을 한껏 끌어모았다.

셀린느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건 한참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나를 여기 데리고 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요, 셀린느.’

로즈의 눈에 열기가 서렸다.

지금, 그들을 이 삿된 것으로부터 구해 낼 수 있는 건 오직 그녀 자신뿐이었다.

***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찡그렸다.

“대공자, 이게 무슨 짓인가요!”

흑마법사는 마치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공격한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흑마법사를 벤다는 건, 아침에는 해가 뜨며 밤에는 달이 뜨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는 묵묵히 흑마법사를 향해 라쉬르를 휘둘렀다.

‘……이상하군.’

몇 합을 겨루기도 전에 레온하르트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 흑마법사는 여느 흑마법사와 달리, 그를 공격하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

물론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보자마자 달아나는 흑마법사들을 여럿 본 적 있었다.

하지만 이 흑마법사는 달아나지 않았다.

단지 그의 공격을 피할 뿐이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흑마법사 한 명이 더 나타났다.

“레온하르트!”

“……?”

레온하르트는 얼어붙었다.

흑마법사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친근하게 불렀기 때문이 아니었다.

‘흑마법사가 둘?’

그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함께 움직이는 흑마법사를 본 적이 없었다.

멀리 떨어진 흑마법사들은 그들만의 방식을 통해 활발히 교류하며 상부상조했다.

같은 지역에서 발현한 흑마법사들의 경우엔 정반대였다.

오래 묵은 흑마법사가 있는 지역에서 새로운 흑마법사가 발현할 경우, 오래된 흑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먼 지역으로 떠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흑마법사가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걸 거부하거나, 같은 시기에 두 흑마법사가 같은 지역에서 발현한 경우에는…….

그들은 짐승처럼 둘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웠다.

레온하르트는 단 한 번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다.

패자의 피를 들이마시고 마약처럼 고양된 승자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런데, 이자들은…….’

머리가 아파 왔다.

지금 이 미로에 그가 있다는 것 자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거기다 새로운 유형의 흑마법사들까지.

레온하르트는 더욱 기이한 점을 깨달았다.

‘둘이나 되는데, 흑마법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니.’

흑마법사가 둘.

제아무리 기척을 숨기는 데 능한 흑마법사라 할지언정 이 정도로 그들 특유의 사악한 기운을 숨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잡생각을 털어 냈다.

어쩌면 이 미로가 흑마법사들을 더 잘 숨게 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그에게 중요한 건, 눈앞에 보이는 저 흑마법사들을 처단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다시금 라쉬르를 들어 올렸다.

두 번째 흑마법사의 공포에 질린 눈과 마주쳤지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태까지 수백 번이 넘게 해 온 일이 아니던가.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는 아주 잠시 멈칫했다.

이 흑마법사가 그를 부르는 소리엔 어딘가 낯익은 구석이 있었다.

‘……옛날에 알던 마법사였나.’

떫은 생각에 이마가 절로 찌푸려졌다.

이곳은 황성의 지하 미로.

그와 예전에 스쳐 가듯 인연이 있었던 황실 소속 마법사가 흑마법사가 되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황태자궁에 잠입한 흑마법사가 아가티르수스의 그자 본인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

이자, 혹은 이자들이 아가티르수스의 흑마법사와 합세한 결과가 황태자궁의 소동이었으리라.

레온하르트는 논리적인 결론에 흡족해하며 눈앞의 흑마법사를 기계적으로 공격했다.

‘……?’

이 흑마법사는 첫 번째 흑마법사보다 더욱 기이했다.

최소한도의 움직임으로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이름을 불러 대는 게 아닌가.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

“셀린느, 정신 차려요! 저자는 대공자가 아닙니다. 어서 달아나세요!”

“……뭐?”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멍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의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방금 첫 번째 흑마법사가 두 번째 흑마법사를 셀린느라고 불렀다.

‘셀린느라니.’

레온하르트는 이내 자신의 입에서 얼빠진 한마디가 흘러나오게 만든 걸 후회했다.

두 번째 흑마법사가, 바로 반색하며 파고들었으니까.

“레온하르트, 알아보겠어요? 저예요, 셀린느라고요!”

레온하르트는 흑마법사의 말을 무시하려 애썼다.

그동안 그는 죽기 직전 흑마법사가 발악하며 외치는 다양한 헛소리를 들어왔지만, 이번만큼 말이 안 되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머리부터 시작된 분노가 스멀스멀 전신에 퍼져 열기가 느껴졌다.

“닥쳐라. 감히 흑마법사가 입에 올릴 이름이 아니니.”

“레온하르트……!”

놀랍게도, 셀린느의 행세를 하는 흑마법사는 진심으로 충격받은 목소리였다.

심지어 셀린느의 목소리와 아주 흡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레온하르트는 눈앞의 흑마법사와 셀린느의 공통점을 몇 가지 더 발견했다.

눈앞의 흑마법사는 셀린느처럼 밝은 금발이었으며, 커다란 청회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옷마저 셀린느가 즐겨 입고 다니는 활동하기 편한 겨울 드레스와 흡사했다.

하지만 이자는 흑마법사였다.

결코 셀린느는 아닌.

‘그래, 겉모습 또한 얼마든지 나를 현혹할 수 있지.’

일반적으로 흑마법사들은 모습을 바꾸거나, 혹은 속이려 들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 경우엔…….

사람의 눈은 쉽게 빛에 현혹된다는 점을 이용해 얼마든지 그를 속일 수 있을 것이다.

‘……하.’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굳이 눈앞의 흑마법사의 실체가 어떤 모습인지 밝힐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차피 죽이면, 본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레온하르트, 정말 저를 못 알아보겠어요? 정말로요?”

하지만 이제는 울먹거리기까지 하는 흑마법사의 가증스러운 모습이, 죽이기 전에 실체를 완전히 드러내게 하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이미 일그러진 모양새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자가 자초한 일이다.’

그는 더는 라쉬르를 흑마법사를 죽이기 위해 휘두르지 않았다.

라쉬르는 좀 더 섬세하게, 흑마법사가 두르고 있을 현혹 마법을 깨부술 정도로만 움직였다.

그건 눈앞의 흑마법사가 결코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

레온하르트는 잠시 멈칫했다.

분명, 있어야 할 현혹 마법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눈앞의 흑마법사는, 셀린느와 정확히 똑같이 생겼다. 셀린느와 같은 목소리에, 셀린느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그 어떤 현혹 마법도 걸려 있지 않는, 흑마법사 본연의 생김새였다.

레온하르트는 마지막 남은 자제력을 발휘해 라쉬르를 떨어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셀린느……!”

그는 입에서 셀린느의 이름을 토해 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난생처음으로, 흑마법사를 눈앞에 두고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죽을까.’

레온하르트의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중 유일하게 명료한 것이었다.

셀린느는 절망감에 휩싸인 와중에도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좀 더 정확히는, 레온하르트는 자신과 로즈를 흑마법사로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셀린느는 정확한 원인을 알았다.

‘스테이지야.’

여태까지 레온하르트가 치트키로서 지나치게 움직인 게 화근이었다.

더 이상의 치트키는 원치 않았던 스테이지가 급기야 레온하르트에게 영향을 끼쳐 그녀를 적대하게 만들었다.

죄책감이 셀린느의 심장을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로즈까지 레온하르트에게 죽을 위기에 처했다.

“당장 달아나요! 이건,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셀린느는 목이 터져라 외쳐 대는 로즈의 앞으로 몸을 던져 레온하르트를 가로막았다.

‘로즈는 레온하르트가 아닌, 다른 무언가라고 생각하는구나.’

씁쓸함이 셀린느를 집어삼켰다.

로즈의 생각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어떻게, 멀쩡한 마법사들을 베려 드는 이 미치광이가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셀린느의 악몽]을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그녀는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셀린느가 잘 아는 레온하르트였다. 게임 속에서, 여주인공을 살육하던 레온하르트가 아니라.

“레온하르트!”

그녀는 최소한도로 움직여 레온하르트의 공격을 피했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레온하르트와 함께 대련하는 게, 셀린느의 일상이었으니까.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흑마법사를 공격할 때 쓰는 거의 모든 패턴들을 꿰뚫고 있었다.

그때, 로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셀린느, 정신 차려요! 저자는 대공자가 아닙니다. 어서 달아나세요!”

레온하르트의 움직임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

“……뭐?”

셀린느는 진심을 다해 로즈에게 감사했다.

순간, 이 어두컴컴하기만 한 지하 미로에 희망이 번득였다.

그녀는 거듭 레온하르트에게 자신이 셀린느라고 외쳐 댔다.

그런 단순한 방법으로 이 상황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차마 레온하르트와 맞서 싸울 수가 없어서였다.

‘레온하르트가 날 죽인대도 괜찮아. 나는 다시 살아나니까. 그러면 나를 알아볼지도 몰라.’

다행히, 효과는 있는 듯했다.

레온하르트가 마치 현혹 마법이 있는지 확인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라쉬르로 부드럽게 그녀의 주위를 건드렸으니까.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동공이 크게 열리고 전신이 뻣뻣하게 굳었다.

‘날 알아본 거야!’

셀린느는 가슴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안도감과 환희를 느끼며 레온하르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평소의 그처럼 그녀를 안아 주지도, 미소 짓지도 않았다.

되레 뻣뻣하게 굳은 채 그녀의 이름을 토해 냈다.

“셀린느……!”

셀린느는 직감했다.

상황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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