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바트의 눈이 반쯤 튀어나오다 못해 허공에 걸려 데굴데굴 굴렀다.
“루테, 농담하지 마십시오.”
“셀린느, 거짓말하지 말아요.”
로즈는 반사적으로 대답한 바트보다 반 박자 늦게 대답했으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듯했다.
“그런 협박에 넘어갈 것 같아요?”
“……로즈.”
“로, 로즈 루테. 말이 심한 게…….”
“셀린느, 예지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내세워서 거짓말하지는 말아요.”
바트는 로즈와 셀린느를 번갈아 바라보다, 더듬거리며 경악에 찬 몇 마디를 내뱉었다.
“셀린느 루테가…… 정말…… 예언자라니.”
로즈는 셀린느를 흘겨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떠벌리고 다니진 마요. 보다시피 아는 사람이 몇 없으면 이런 사고를 터뜨리는 분이니까.”
“……둘이 죽을 거라는 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셀린느는 로즈가 즉각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챘다는 사실에 당황해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녀의 예상은, 로즈가 자신의 예지를 믿고 레온하르트를 함께 찾아 준 것처럼 물러나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로즈는 예언 따위는 전혀 믿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그게, 예지는 아니죠?”
“…….”
“여태까지 자신 말고 다른 예언자들은 만나 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기회 되면 한번 만나 봐요.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여긴 저 혼자 내려가겠어요.”
셀린느는 자신의 말을 되풀이했다.
로즈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나도 예언 하나 해도 되겠네요. 셀린느가 여기 혼자 가도 죽을 걸요?”
“…….”
셀린느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로즈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즈나 바트가 죽는 것과 자신이 죽는 게 다르다는 것까지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저희가, 도움이 되지 않아서…….”
“그건 아니에요.”
바트의 조금 상처 입은 듯한 말에 셀린느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아래는 위험하니까요. 그건…… 알 수 있어요.”
“위험하면 더 함께 가야 하는 게 아닙니까? 내친 김에 도와줄 사람을 좀 더 구해 보겠습니다.”
“괜찮은 생각인데요.”
로즈가 반색했다.
“저도, 도와줄 마법사 몇을 더 데리고 올 수 있어요. 어때요, 셀린느?”
“…….”
셀린느는 바트와 로즈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유가 뭐든 간에, 대공자가 출입이 사실상 금지된 미로 속에 갇혀 있다는 건 널리 알릴 만한 일이 아니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는 바트도 수색대가 아닌 셀린느와 로즈 둘만 대공자를 찾고 있는 것을 보아도 상황을 눈치챘을 터.
“농담이에요.”
로즈가 손사래를 치며 침묵을 깼다.
“다들 이곳에 들어서려 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건 기사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단장님?”
“맞습니다.”
“그럼, 왜…….”
“왜 우리들은 가겠다고 이렇게 고집을 부리겠냐고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로즈가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셀린느,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요. 전 당신에게 목숨을 빚졌어요. 그걸 갚을 때가 온 거죠.”
바트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공자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셀린느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 사람들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따라오세요. 대신, 밑에서 본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하죠.”
“그거야 어렵지 않죠.”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로즈와 바트는 즉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약속해 줘요.”
“……뭡니까?”
“내가…… 돌아가라고 하면, 진짜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이에요.”
“예지입니까?”
“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도 여기엔 동의하는 건가요?”
“……그 정도야, 뭐.”
로즈는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어쨌든 나도 목숨은 아깝거든요. 그건 여기 있는 단장님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렇습니다.”
셀린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밑은 스테이지다.
이 정도 대비책은 마련해 두어야 했다.
셀린느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퀴퀴한 습기와 오래 쌓인 먼지가 뒤섞인 악취가 심하게 느껴졌다.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게 용한 오래된 계단이 삐걱거렸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바깥보다 훨씬 차가운 공기가 그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장난 아닌데.”
바트가 얼음장같은 공기에 부르르 떨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셀린느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게임에 따르면, 이 앞은…….
순간, 셋 중 누구도 앞을 볼 수 없었다.
어둠도 빛이 아닌 것이 그들의 시야를 완벽히 차단했다,
모두가 꼼짝도 하지 않고 얼어붙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희끄무레한 유령들이, 거대한 막처럼 그들 모두에게 들러붙은 것이다.
‘그때와 달라.’
다행히, 이들은 셀린느가 일전 경험했던 공격적인 유령과는 달랐다.
이것들은 단지 그들이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들러붙어 있기만 했다.
“여기를 막고 있는 것 같은데요.”
로즈가 침묵을 깼다.
“그냥 돌아 나가라는 것 같아요. 우리에게.”
“공자님이, 이걸 뚫고 지나가셨다니.”
바트가 멍하게 내뱉었다.
셀린느는 마력을 끌어모아 유령들을 흩어지게 만들려고 했지만, 사방이 틀어막힌 나머지 마력이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마법은 전혀 먹히지 않네요. 이것들이 마력도 차단하고 있는 것 같아요.”
로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트가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단장님……!”
셀린느는 곧바로 그를 만류했지만 바트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
“다들 가만히 계십시오.”
심지어 어딘가 의기양양하게까지 느껴지는 말까지.
셀린느는 조금 당황하여 눈을 깜박였다.
희뿌연 시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때, 그녀의 코앞까지 칼날이 훅 들어왔다.
셀린느는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시야가 완전히 밝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트가 그녀의 앞에서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냥 칼로 베어지더군요. 보십시오.”
바트는 바닥을 가리켰다.
고개를 떨어트리니, 밑바닥에 한가득 쌓인 희멀건 젤리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셀린느는 허리를 숙여 손으로 만져 보았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드라이아이스 연기에 손을 집어넣은 것처럼 싸한 느낌이 들어, 황급히 손을 빼냈다.
“칼로 베어지는 유령이라니. 진귀한 경험을 다 해 보는군요.”
바트는 무척 신기한 눈치였다.
“유령이라고 하기 힘든 것 같네요.”
로즈가 셀린느처럼 바닥에 쌓인 희멀건 덩어리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빼내며 말했다.
“유령을 흉내 낸 존재라면 모를까…… 그저 출입을 차단하는 게 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엔 유령을 처치하러 이곳에 올 만한 사람은 마법사들뿐이었을 테니, 마력을 차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겠죠.”
셀린느는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셀린느의 악몽] 속에서 미로는 주인공을 쫓아오는 레온하르트를 제외하면 아무런 적이나 함정이 없었다.
지금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공격할 리가 없으니 최대한 빨리 찾기만 하면 된다.
물론 진엔딩 루트만의 변형이 있을 수도 있으니 긴장을 늦추지는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셋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할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다행히 가는 길 내내 로즈가 표시를 해 두었기 때문에 같은 길을 두 번 도는 경우는 없었다.
따라서 분명 상당한 거리를 살폈는데도 레온하르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저거, 뭡니까?”
갑자기 바트가 우뚝 멈춰 서더니,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의 벽면을 살폈다.
셀린느의 등덜미에 소름이 쭈뼛 섰다.
오래된 벽면에, 탄 자국과 검에 베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탄 정도를 보니 오래된 것 같지가 않았다.
“레온하르트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로즈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대공자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죠? 이 근처에 있다면 우리의 소리를 들었을 것 같은데…….”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황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바트가 속사포처럼 추측을 쏟아 냈다.
“입구의 유령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종류였지만, 전에 대공자께서 꺼리시던 유령들은 까다로웠을 겁니다. 그것들을 쫓아 들어가시다가…….”
“…….”
셀린느는 바트의 완전히 틀린 추측을 들으며 로즈와 눈길을 나누었다.
‘뭐, 바트의 추측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닐지도 몰라.’
레온하르트가 어딘가에 구속되어 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지금처럼 안이하게 미로를 탐색하는 것보단 좀 더 나은 방법이 필요했다.
“아니면, 대공자와 계속 엇갈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로즈가 문득 생각났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도 그 생각은 해 보았는데…… 그럼 표식이 엇갈리지 않았을까요?”
“지금 엇갈렸잖아요. 그리고 대공자는 우리도 들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니, 표식 자체를 거의 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
“우리와 가깝지만, 우리의 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에서 레온하르트가 계속 맴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그래요.”
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셀린느는 그런 단순한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로즈가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제안했다.
“제가 한번 진동을 만들어 볼까요? 그럼 대공자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이쪽으로 올 수도 있느니.”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 버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로즈가 코웃음을 쳤다.
“단장, 대공자가 그런 사람 같나요?”
바트는 고개를 저었고, 셀린느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레온하르트는 절대 그런 타입이 아니지.’
평소엔 레온하르트의 그런 성격이 원망스러울 때도 더러 있었다.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만큼은 로즈의 말대로, 도움이 되리라.
셀린느는 벽면으로 다가가 두 손을 올렸다.
곧바로 로즈의 말처럼 벽 전체가 진동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셀린느, 잠깐만요.”
“……?”
“내가 할게요. 이미 많이 피곤하잖아요.”
“아…….”
그제야 셀린느는 애써 무시하려 했던 피로감이 수면 밑에서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좀 쉬어요. 이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네.”
로즈는 벽면에 손을 올렸다.
“좀 떨어져요.”
셀린느는 바트와 함께 대여섯 걸음 뒤로 물러섰다.
로즈의 부근에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더니, 그들이 있는 통로 전체가 강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버티고 서 있는 게 힘들 정도라 셀린느는 바트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도 마력이 무한정 남은 건 아니라서…… 장소를 옮겨가 보면서 시도해 볼게요.”
하지만 장소를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십여 분이 지나자,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하지만 셋 중 누구도 그를 반길 수 없었다.
“레온하르……!”
셀린느의 입에서 레온하르트의 이름과 뒤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전신에 형형한 살기를 띤 레온하르트가, 치켜든 라쉬르를 로즈를 향해 그대로 내리쳤다.
셀린느의 악몽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