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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90화 (90/120)

90화.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는 자신이 무력하게만 느껴지는 순간들을 증오했다.

바로 지금처럼.

‘셀린느…….’

그는 차마 셀린느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처음에,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허공 위에서 대체 뭘 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셀린느는 자신이 발을 딛자마자 사라지는 물체들을 넘나들며 아슬아슬하게 허공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아는 그 어떤 정보도 몰랐다. 심지어 셀린느가 동아줄처럼 부여잡은 음악조차 그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셀린느의 행동이 허공 위의 무의미한 움직임으로 느껴진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았다.

그는 셀린느를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단순히 그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가 아니었다.

뭔가, 도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에서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움직이는 모든 패턴을 완전히 외울 수 있었다.

셀린느는 15분마다 되풀이되는 루틴에 따라 움직였다.

레온하르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여태까지 그는 셀린느의 행동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대부분 ‘꿈에서 봤는데, 저주를 풀려면 이렇게 해야 해요.’라는 간단한 말로 납득이 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여태까지와는 달랐다.

아무런 의미 없이, 고통스러운 행보만을 계속하지 않는가.

그것도 언제 끝날지 기약이 전혀 없는.

아무리 레온하르트가 셀린느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하더라도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레온하르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셀린느는 처음엔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균형을 잡아 루틴에 맞추어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 셀린느는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왜……?’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한 눈빛로 살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셀린느는 갑자기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크게 당황하며 비틀거렸다.

일시적으로 균형을 잃은 정도가 아니었다.

셀린느는 물에 빠진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 없는 한마디가, 그녀의 집중력을 흐트러지게 만들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때, 셀린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레온하르트는 깨달았다.

셀린느가 당장 움직이지 않는다면 허공에서 추락하리라는 사실을.

“당장, 뛰어!”

다행히 셀린느는 뛰었다.

그 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외운 모든 움직임을 일일이 열거했다.

셀린느는 입 하나 벙긋하지 않았으나 레온하르트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오직 그의 지시에만 의존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히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모든 움직임을 완벽하게 외우고 있었고, 셀린느 역시 레온하르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즉각 반응했다.

‘이 일이 끝나면, 예지에 대해 제대로 물어보아야겠어…….’

레온하르트가 안이한 생각에 빠져들었던 순간.

셀린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리고, 추락했다.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더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필사적으로 움직이던 셀린느의 모습이 선한 지점으로 몸을 날렸다.

만약 그에게 조금이라도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면 그 행동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레온하르트를 움직이는 건 생각이 아닌 감정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정확히 셀린느가 떨어진 그 지점에서 허공으로 추락했다.

***

셀린느는 한참 동안 철제 구조물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방금 스테이지를 이겼다는 사실에 대한 고양감과 앞으로도 스테이지가 자신을 방해하려 안간힘을 쓰리라는 불안한 예감에 취해 있을 뿐이었다.

“셀린느.”

누군가가 셀린느의 몸을 크게 흔들었다.

“셀린느!”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로즈였다.

“로즈……”

“괜찮아요?”

“네, 네.”

“전혀 안 그런 것 같은데.”

셀린느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신을 차려 보니, 철제 구조물은 어느덧 땅바닥에 닿아 있었다.

보호막 하나 치지 않은 상태였지만 숨쉬기는 편했다.

“연기는……”

“다 멈췄어요.”

로즈가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지금 계속해서 확인하는 중인데, 사망자도 안 나왔고요. 모두 무사해요.”

“그렇군요.”

셀린느는 안도감에 중얼거렸다.

‘내가 시간을 허비해서 죽은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만약 그녀의 선택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있다면, 셀린느는 한동안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로즈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괜찮아요? 몸이 많이 약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호텔까지 데려다줄까요?”

“아, 아뇨.”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레온하르트랑…… 같이 와서요.”

“대공자요?”

로즈는 놀란 눈치였다.

“하기야 그 대공자가 셀린느를 이런 곳에 혼자 보낼 리가 없으니…… 지금 어디 있는데요?”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레온하르트를 마지막으로 본 곳은 분명 탑 꼭대기였지만, 아직도 그가 거기에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아마, 날 찾으러 아래로 내려오지 않을까.’

하지만 그 경우 분명 자신을 찾았을 터.

셀린느는 로즈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레온하르트를 못 봤어요?”

“제가 알 리가요.”

셀린느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어쩌면, 레온하르트는 아직도 탑 위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 한편에서 자라기 시작하는 불안감을 무시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탑을 올라가며 계속 레온하르트를 소리쳐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은 몰라. 아직은…….’

셀린느는 아직 자신이 탑 꼭대기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에만 매달렸다.

잠시 후.

그녀는 탑 꼭대기 층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셀린느는 크게 심호흡하고, 문을 열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방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스테이지가 끝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셀린느는 허탈한 감정에 휩싸여 비틀거렸다.

‘레온하르트, 어디 있는 거예요…….’

다른 곳을 찾아볼 생각은 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자신을 무방비하게 내버려 둔 채, 다른 곳으로 가 버렸을 리가 없다.

그녀는 창문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만약, 만약에…….’

방금, 머릿속에서 허무맹랑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만약,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따라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면?

‘그럴 리 없어!’

레온하르트에게 무모한 성향이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의미하고 위험한 행동을 취할 정도로는…….

‘…….’

셀린느는 인정했다.

레온하르트가 그렇게 행동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레온하르트가 탑에서 자신과 함께 떨어졌다고 가정한다면, 지금 그가 아무 데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 버린 게 아닐까.’

허무맹랑한 듯한 생각이었지만 심증은 더욱 짙어졌다.

레온하르트는 이 게임의 치트키였다. 치트키가 스테이지에 개입한다면?

당연히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 버리지 않겠는가.

셀린느는 머리를 짚었다.

자신은 다음 스테이지의 위치조차 몰랐다.

어쩌면 여태까지처럼 기다리다 보면 이 성 전체가 미로로 바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기다렸다간…….’

셀린느의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갔다.

리듬 게임을 통해 스테이지와 싸우며 한 가지 얻은 깨달음이 있었다.

이제 스테이지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방해하려 했다.

심지어 레온하르트로부터 받는 도움을 완전히 차단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다음 스테이지는, 아예 레온하르트를 죽이려 들지도 몰라.’

셀린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레온하르트가 위험했다.

***

레온하르트는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분명 몸을 허공 속으로 몸을 던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추락이나 추락의 과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셀린느!”

그는 허겁지겁 셀린느의 이름을 불렀지만,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셀린느도 분명 이곳 어딘가에 있겠지.’

그들은 같은 지점에서 떨어졌다.

그에겐 예지력이 없었기에 이 기이한 장소가 어디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 어딘가에 셀린느가 있으리라는 확신은 레온하르트의 다리를 움직였다.

레온하르트는 허리춤을 더듬거렸다. 다행히 라쉬르가 손에 잡혔다. 그는 바로 라쉬르를 빼 들었다.

어둠 속이 순식간에 파르스름한 빛으로 가득 찼다.

‘……?’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오랜 세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 먼지가 가득한 통로에 서 있었다.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셀린느와 함께 다니며, 기이한 일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여태까지의 패턴상 이곳은 함정으로 가득할 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

레온하르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최소한 서너 시간이 넘게 이곳을 헤매고 다닌 건 확실했다.

처음엔 단순한 통로로 보였던 이곳은 서너 가지의 갈림길로 분화되었다.

또한 그 갈림길들 역시 서너 가지의 또 다른 갈림길들로 분화되어 있었다.

혹시 몰라 각각에 표시를 하며 걸어가다 보면, 어느덧 처음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미로라니.’

레온하르트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공에서 추락했는데,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미로에 갇혀 있다라…….

‘셀린느도, 이곳을 헤매고 있을까.’

적어도 충격을 그대로 감내하려 한 자신이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으니, 셀린느 역시 상처 하나 없이 이곳에 들어왔을 것이다.

‘다행이군.’

답이 전혀 보이지 않은 상황과는 별개로, 셀린느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 추측과는 달리 이곳엔 함정 하나 없다는 점도 레온하르트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이 미로를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셀린느를 만날 수 있으리라.

자신이 셀린느를 만나기 전에 셀린느가 다치거나 죽을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레온하르트는 설핏 웃으며 눈을 살짝 감았다.

피곤에 절은 몸을 잠시 쉴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에게 잠시간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쿵!

레온하르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지?’

분명,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그는 곧바로 진동이 느껴진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가장 큰 가능성은 셀린느였다.

심장이 희망으로 퍼덕거렸다.

잠시 후.

레온하르트는 어렵지 않게 진동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모퉁이를 돌았다.

“……!”

레온하르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통로 전체를 무너지게 할 기세로 진동을 퍼뜨리고 있는 자는, 흑마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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