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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89화 (89/120)

89화.

생소한 음악이 울린 동시에, 셀린느는 허공으로 거꾸러졌다.

‘안 돼……!’

셀린느가 추락한 그 순간 느낀 건 순수한 공포였다.

마치…… 일전에 그녀를 납치한 흑마법사의 결계에 갇혔을 때처럼.

그때처럼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힘이 그녀를 죽음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셀린느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때처럼 마냥 두려워하면서 버티기만 할 순 없었다.

그녀는 이제, 마법을 쓸 수 있었으니까.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고 전신에 마력을 둘렀다.

귓가에 웅웅거릴 정도로 강력한 마력으로 일으킨 바람이 하강하는 속도를 늦추어 주었다.

셀린느는 눈을 떴다.

‘게임에서 본 거랑…… 똑같아.’

분명 이 세계에선 존재할 수가 없는 거대한 톱니바퀴들이었다.

서로 완벽하게 맞물려 굴러가며 초록색 연기를 피워 내고 있는.

셀린느는 허공에서 천천히 미끄러지며 그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위험하거나 멈춰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으로 보이는 구조물이었으니.

‘정신 차려!’

셀린느는 자신을 꾸짖었다.

분명 이것도 자신을 현혹해 데드 엔딩으로 몰아넣으려는 스테이지의 술수일 것이다.

셀린느는 크게 심호흡했다.

‘난 저걸 멈춰야 해. 그걸 위해 여기까지 온 거잖아.’

저걸 멈추지 않는다면 그 지옥 같은 리듬 게임을 버텨 낸 이유도 사라진다.

셀린느는 톱니바퀴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게임 속의 플레이어는, 저 사이에 몸을 던져 으스러지는 방법을 통해서만 초록색 연기를 멈출 수 있었다.

당연히, 셀린느가 가장 먼저 시도한 방법은 마법이었다.

셀린느는 가장 중심이 되는 듯한 톱니바퀴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죽을 각오로 전신의 마력을 쥐어짜 톱니바퀴를 역방향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허억.”

그 순간, 머리가 핑 돌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셀린느는 숨을 헐떡거렸다.

허공에 띄워 놓은 가느다란 줄 위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셀린느가 지금 허공에 뜰 수 있는 건 순전히 마력 덕분이었다. 그마저도 중력을 거스르지 못해 속도를 늦추는 게 한계였다.

만약 이 톱니바퀴를 밀어내는 데 지나치게 많은 마력을 쓴다면 그 순간 추락하고 말 것이다.

불현듯 무서운 깨달음이 셀린느를 기습했다.

‘마법이 있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마법으로 이 구조물을 멈추는 건 불가능했다.

이 톱니바퀴를 멈출 방법은 단 하나, 목숨을 희생하는 것 뿐이었다.

“아…….”

셀린느는 절망감에 가득한 신음을 토해 냈다.

자신이 게임 속 주인공과 달리 강력한 마법사라는 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녀는 결코 이 스테이지의 섬뜩한 선택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떨어져 죽을걸.’

자신이 리듬 게임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갔을지도 모른다.

셀린느는 한 차례 크게 심호흡했다.

이 스테이지가 그 정도까지 자신에게 이 선택을 하게 만든다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순 없어.’

그녀는 천천히 톱니바퀴의 틈으로 다가갔다.

“셀린느!”

“……?”

셀린느의 몸이 얼어붙었다.

분명,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거기, 셀린느 맞죠?”

“……로즈?”

셀린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로 한 마디를 뱉어냈다.

“잠깐만 버텨 봐요, 사람들을 불러올게요!”

로즈의 목소리는 그녀의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셀린느는 순간 스테이지의 현혹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바로 마음을 고쳐 잡았다.

‘차라리 레온하르트로 현혹했으면 했지, 로즈로 할까.’

분명 도와줄 사람들을 데리고 온다는 로즈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셀린느는 로즈가 도와줄 마법사들을 데리고 온다고 하더라도 과연 상황이 달라질지는 의심스러웠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톱니바퀴에 바로 몸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톱니바퀴를 다시금 역으로 밀어내며 무의미하게 마력을 쏟아붓지도 않았다.

그저 최대한 추락을 늦추려 노력할 뿐이었다.

‘일단은, 로즈를 믿어 보는 수밖에 없어.’

셀린느는 인정했다.

자신은 정말로 죽고 싶지 않았다.

톱니바퀴 속에 몸을 던져 전신이 으스러지며 죽는 건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로즈가 자신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와중에도 그녀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셀린느는 이제 자신의 얼굴에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땀인지도 분간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로즈가 마법사들을 데리고 오면 그녀 자신도 있는 힘껏 가세해야 한다는 생각에, 최소한의 마력만 소비하려 안간힘을 쓴 결과였다.

‘……역시, 현혹이었을까.’

셀린느는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자신이 알량한 희망 때문에 스테이지에 속은 것이라면…….

“셀린느!”

로즈의 목소리였다.

“로즈.”

“아, 우리한테 말하려 들지는 말아요. 셀린느의 말은 우리에게 안 들리니까. 일단 거기로 올라갈게요.”

안도감에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잠시 후.

쇠로 된 거대한 구조물에 올라탄 수십 명의 사람이 초록색 연기를 뚫고 나타났다.

셀린느는 그 구조물에 올라타자마자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괜찮아요?”

로즈가 걱정스레 셀린느를 지탱했다.

“……아뇨.”

“그래 보여요.”

“여긴, 어떻게…….”

“셀린느의 마력이 느껴졌거든요. 이것 때문이었군요.”

로즈는 톱니바퀴를 가리켰다.

“저것들에서, 초록색 연기가 나오고 있어서…… 멈추려고…….”

“말하지 않아도 알겠어요.”

셀린느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서려 했지만 로즈가 곧바로 그녀를 바닥에 앉혔다.

“가만히 있어요. 이제 저건 우리가 처리할 테니까.”

“……할 수 있어요?”

“우리를 너무 무능하게 보는 거 아니에요?”

로즈가 피식 웃었다.

“저번엔, 셀린느가 우리 목숨을 구해 줬잖아요. 그러니 이번에는 우리가 좀 활약하도록 양보해 줘요.”

“…….”

셀린느는 조금 당황하며 눈을 깜박였다.

분명, 자신이 마법사들의 목숨을 구한 건 사실이었다.

그 정체불명의 존재와 끝까지 싸워 이겼으니까.

하지만 셀린느는 굳이 마법사들에게 그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바보라고 생각했어요?”

“…….”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분석했어요. 그 과정에서…… 셀린느가 어떤 일을 했는지도 얼추 짐작할 수 있었죠. 정말 고마워요.”

“……그냥, 저도 살려고 그랬을 뿐이었어요.”

“그럼요, 그랬겠죠.”

로즈는 생긋 웃더니 셀린느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푹 쉬어요. 우리 하는 걸 구경이나 하면서.”

셀린느는 멍하니 로즈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른 마법사들의 무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더니, 자리를 잡고 톱니바퀴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셀린느의 가슴속에 조금씩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자신이 쓰는 마법과 이들이 쓰는 마법은 별로 다르지 않다.

이곳이 스테이지라곤 하나 이미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적’으로서 기능하지 않음으로써 룰이 파괴된 지 오래.

‘이 사람들이라면…… 저 톱니바퀴를 멈출 수 있어.’

마법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톱니바퀴를 공략했다. 셀린느는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복잡하게 얽힌 마력의 흐름을 확실하게 느끼기 위해서였다.

‘……대단하네.’

셀린느는 마력의 흐름을 분석하자마자 황실 소속 마법사들의 실력에 감탄하고 말았다.

그들은 각각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강력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서로 협력한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 소속 마법사들은 톱니바퀴의 파괴라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

셀린느는 여전히 눈을 감으며 마력의 흐름을 따라가는 와중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불협화음이 느껴졌다.

마치…….

리듬 게임의 잡음처럼.

셀린느는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력의 흐름에만 집중한 나머지, 살피지 못한 마법사들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안 좋아.’

심장이 쿵쾅거렸다.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셀린느는 직감했다.

이대로 가다간, 이들은 모두 죽는다.

그 이유 또한 알 것 같았다.

‘스테이지가 원하는 건, 나니까.’

셀린느는 로즈의 말에 안주해 버린 자신이 한심해 이 철제 구조물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이미 리듬 게임에서 스테이지 자체의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는가.

셀린느는 이를 악물었다.

‘뭘 해야 하는지 알잖아. 움직여!’

처음에, 미래에 저항이라도 하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던 다리는 어느덧 가속도가 붙어 앞으로 달려나갔다.

“셀린느!”

뒤에서 로즈가 불렀지만 셀린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로즈는, 아니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스테이지에 대해서 모른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죽어 가면서 톱니바퀴를 멈출 수 있는 그녀의…….

순간, 셀린느는 멈춰 섰다.

‘꼭 사람의 몸이어야 할까?’

만약, 사람의 몸이 아닌, 다른 단단하면서도 적당한 크기의 이물질을 톱니바퀴에 끼워 넣을 수 있다면…….

셀린느는 망설임 없이 품속을 더듬었다.

링조르가 잡혔다.

‘미안해요,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속으로 레온하르트에게 사과했다.

링조르는 레온하르트가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물건이었고, 대대로 내려오는 황실의 가보였다.

여기서 자신이 멋대로 부러뜨려 버리면 그에게 화가 갈 것이다.

하지만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그녀 자신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는 링조르를 부러뜨리는 쪽을 더 원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셀린느는 링조르를 조심스럽게 품속에서 꺼내 들었다.

‘……!’

청회색 눈이 커졌다.

링조르는, 마력석으로 이루어진 검집에 얌전히 들어 있었다.

‘어쩌면…….’

셀린느는 홀린 듯 링조르에게서 검집을 빼 들어 조목조목 살폈다.

남부에서 채굴된 제일가는 마력석들로만 이루어진 검집이 찬란하게 빛났다.

셀린느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검집 역시 출중한 실력의 황실 소속 마법사가 만든 물건.

보통 수준의 경도를 지니진 않았을 것이다.

셀린느는 링조르를 품속에 집어넣은 다음, 검집을 손에 꽉 쥐었다.

그리고, 철제 구조물에서 톱니바퀴를 향해 점프했다.

“막아!”

“셀린느 루테!”

뒤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발 늦은 뒤였다.

셀린느는 가장 큰 톱니바퀴와 그다음으로 큰 톱니바퀴 사이에 링조르의 검집을 끼워 넣었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셀린느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링조르의 검집에 한 손으로 매달린 채 검집의 마력석들에 자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폭포수처럼 가해지는 마력을 도저히 견뎌 내지 못한 마력석들이, 폭발할 때까지.

-쾅!

폭발음과 함께 셀린느는 뒤로 밀려 나갔다.

“셀린느 루테!”

이름 모를 마법사가 그녀의 몸을 재빨리 받아 철제 구조물 위에 앉혔다.

“대, 대체 왜 그런 짓을…….”

“봐요.”

셀린느가 중얼거렸다.

“멈췄어요…….”

톱니바퀴들의 틈새에서 쏟아져 나오던 자욱한 초록색 연기가 점점 걷히기 시작했다.

옅어지는 연기 사이로 반절 파괴된 톱니바퀴들이 눈에 들어왔다.

셀린느는 뭉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번에도 승자는, 자신이었다.

스테이지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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