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셀린느, 나는…….”
레온하르트는 잠시 말을 끊었다. 목이 메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한다.”
셀린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았던 몸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우습게도, 셀린느는 그 말을 들은 순간 깨달았다.
그녀는 레온하르트를 슬프게 만드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으리라는 걸…….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섬뜩한 계획을 결코 실행에 옮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안 죽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는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팽팽히 날이 서 있던 레온하르트가 상당히 누그러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셀린느는 뛰쳐나가려던 몸을 잠시 멈춘 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셀린느에겐 죽음이 삶보다 더 쉬운 선택지처럼 느껴졌다.
죽음은 확실한 성공이 보장되어 있었고, 삶은 발버둥쳐도 이루기가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이제 리듬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허공 속으로 떨어져 죽겠다는 계획은 완전히 사라졌다.
셀린느는 새로운 계획과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죽지 않으려면…… 성공하려면.’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할 수 있어. 이미 한 번 성공해 본 거잖아.’
셀린느는 그 ‘성공’이 대여섯 번 연거푸 데드 엔딩을 본 후에야 가능했었다는 사실을 무시하려 애썼다.
그녀는 게임 속에서 저택의 꼭대기에 들어서자마자 울리던 음악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셀린느의 악몽] 전체에서 단 한 번 들리는 리듬 게임용 OST를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하지만 셀린느는 초반 패턴은 대충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엔…… 천천히 몇 번씩 뛰었어.’
그 뒤는, 점점 빨라지는 음악에 맞추어 좀 더 빨리 뛰어야 했다.
구조물 위에 올라가는 구간도 더러 있었다.
셀린느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해 보자.’
그녀는 앞으로 무작정 뛰쳐나갔다.
다음 순간, 음악이 셀린느의 귀를 관통하여 몸 전체에 울렸다.
전신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전율했다.
‘이건……!’
셀린느가 너무나 잘 아는 음악이었다.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음악.
완전히 외워버려 모든 구간이 뚜렷한 음악이 귓가에 선명히 울리고 있었다.
동시에 셀린느의 발밑을 단단히 지탱해 주던 바닥이 사라지고, 형형색색의 블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셀린느의 얼굴이 밝아졌다.
레온하르트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셀린느는 익숙한 음악에 따라 몸을 움직였고, 시시각각 생겼다가 사라지는 허공의 블록을 밟는 데 성공했다.
마치 음악이 셀린느가 저절로 몸을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이끌어주는 듯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끼이이익!
음악에 소름 끼치는 잡음이 섞여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셀린느는 가만히 멈춰서 잡음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발을 계속해서 바삐 움직여야 했으니까.
발 바로 아래에서 블록들이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상황.
시각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셀린느는 오로지 귀에만 의지해야 했다.
잡음은 점점 더 커졌고, 셀린느의 유려한 움직임은 점점 실수투성이로 변해갔다.
다행히 블록들을 간신히 놓치지 않고 밟을 수 있었지만 초반과 달리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식은땀이 셀린느의 턱을 따라 흐르더니 허공 속으로 떨어졌다.
셀린느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주 잠깐이라도 멈춰 서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셀린느의 몸뚱이는 방금 흐른 땀처럼 허공에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다.
***
“단장님, 대체 저게 뭡니까?”
파라디소 기사단의 단원들이 불안한 눈길로 초록빛 연기에 휩싸인 리브론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베르누이가의 별장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훈련하던 중, 리브론성에서 일어난 사태에 관한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
“모르겠군.”
바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바트는 대답 대신 품에서 은색 나이프를 꺼내더니, 초록빛 연기 속에 날만 집어넣었다.
잠시 후 꺼낸 날은 새카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독이군. 보다시피.”
“……!”
“이건…… 마법사들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겠어.”
“독이면,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걱정하지 마라. 마법사들이 어련히 해 주겠지.”
바트는 안개 속을 들락날락하는 마법사들을 가리켰다.
“거기!”
“거기?”
바트가 얼굴을 찌푸리려는 찰나, 난생처음 보는 황실 소속 마법사는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응급 처치 안 하고 뭘 하는 겁니까? 이 사람들 죽어 가는 거 안 보여요? 게으름 피우려고 여기 온 겁니까?”
카르파티아의 단장인 바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문 채 팔짱을 끼었다.
기분이 언짢다는 표시였지만, 동시에 마법사에게서 방금 들은 말은 불문에 부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단장님……!”
“무시해라. 저들의 말은 틀리지 않아.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그는 쓰러진 자들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독이 든 연기를 마셨다면…… 해독제가 필요할 텐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다른 마법사가 숨을 헐떡이며 설명했다.
“해독제는 필요 없습니다. 폐를 눌러 나쁜 공기를 빼내 주십시오. 거기엔 당신네만 한 전문가도 없을 테니까.”
“들었지? 저 말대로 해라.”
하지만 바트의 말은 단원들을 설득하기엔 부족했다.
성미를 이기지 못한 단원 하나가 자신도 사람을 구출해 오는 게 낫겠다며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바로 정신을 잃고 끌려 나올 정도로.
바트는 즉각 소리쳤다.
“지금부터, 저 안으로 내 명령 없이 들어가는 놈은 우리 기사단에서 제명하겠다!”
“예!”
동료의 실신을 본 단원들이 사색이 된 채 대답했다.
그들은 즉각 쓰러진 자들에게로 달려가 가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동원된 건 기사단들뿐만이 아니었다.
“이게 다 무슨…….”
병가를 며칠 받아 집에서 휴식하던 황실 소속 마법사 로즈는 초록색 연기가 자욱한 리브론성의 한복판에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리브론성에 머무르던 모든 황족들은 황실 소속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탈출하였다.
황제는 격노했지만 초록색 연기의 정체를 밝혀내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리브론성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출하라는 명을 내리고는 칩거에 들어갔다.
리브론성은 네 개의 궁과 그보다 훨씬 많은 부수적인 건물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성이었다.
그 탓에 병가를 내고 푹 쉬던 로즈까지 끌려오게 된 것이다.
“다들 어디…… 에밀리! 로벨!”
로즈는 짜증을 내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유일하게 꼭대기가 초록빛 연기에 가려지지 않은 첨탑으로 모이기로 한 동료 중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전부 임무를 받아 떠났나?’
어쩌면 자신이 미적거리느라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늦은 걸지도 모른다.
병가로 쉬고 있던 도중, 갑작스러운 호출로 인해 짜증이 나 최대한 늦게 나온 건 사실이었으니까.
‘이런 일인 줄 알았으면 바로 튀어 왔지…… 그냥 급한 일이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
로즈는 한숨을 내쉬며 사람들이 쓰러져 있을 법한 다른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앗……!”
로즈는 나지막한 신음을 냈다.
발에 단단하면서도 물컹한 무언가가 밟힌 탓이었다.
그녀는 즉각 허리를 숙여 아래를 살폈다.
“……!”
정신을 완전히 잃은 사람이 길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로즈는 마법을 이용해 그 사람을 들어 올리는 동시에 코와 입 부근에 초록빛 연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차단해 주었다.
‘오늘 퇴근은 글렀구나…….’
로즈는 연기의 영향이 닿지 않은, 리브론성의 입구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자신의 머리 바로 위에서 셀린느 헌트가 사투를 벌이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
셀린느는 더욱더 커지는 잡음 사이에서 실제 음악을 들으려 노력했다.
‘딩…… 딩딩…….’
하지만 누군가가 귀 바로 옆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커진 잡음을 무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연히 셀린느의 발도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우습게도, 그녀의 발이 느려지면 느려질수록 심장은 더 가삐 뛰었다.
더는 음악에 집중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당장, 뛰어!”
갑자기, 머릿속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대로 꽂혔다.
레온하르트였다.
셀린느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목소리를 따라 행동했다.
다음 순간, 목소리들이 셀린느에게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뛰어라, 멈춰라, 서라, 높이, 더 높이…… 낮게.
아무리 잡음이 커져도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만큼은 분간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빠지던 심장 고동도 차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셀린느는 어느덧 음악이 끝나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야.’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음악과 리듬 게임이 끝나간다기엔 셀린느의 발밑은 아직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소리가, 줄어들고 있는 거야.’
셀린느는 문득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처음엔 잡음을 키우고, 이번엔 소리 전체를 키우기까지.
셀린느는 처음으로 스테이지 자체의 의지를 느꼈다.
‘나를 떨어트리려고 하고 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선택을 하게끔 만들려는 거야.’
속이 울렁거렸다.
더욱 끔찍한 건, 셀린느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는 걸까……. 대체, 왜? 떨어지면, 선택해야 할 텐데. 그러면 레온하르트가…….’
다행히도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죽을 수 없어. 레온하르트와 약속했으니까.’
셀린느는 작게 들려오는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당장의 상황은 헤쳐 나갔다.
하지만, 곧 이 동아줄마저 끊어지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외우자, 아까부터 반복되고 있잖아…….’
셀린느는 기억을 더듬으며, 그리고 귓가에 들리는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으며 패턴을 하나하나 짜 맞추어 나갔다.
그녀가 간신히 모든 패턴을 외운 바로 그 순간.
적막이 찾아왔다.
셀린느는 잡음도, 음악도,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도…… 모두 사라져 버린 공간에서 발만 움직였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릴 정도로 사방은 고요했다.
셀린느는 눈을 감은 채, 머릿속에 이미 외운 패턴을 그리며 그에 맞춰 뛰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헤르메스의 신발’조차도 한계에 도달한 듯, 셀린느의 발엔 과로로 인한 땀이 흥건했다.
전신에 있는 힘이란 힘은 다 빠져나간 듯했지만 그래도 움직여야 했다.
-딩!
청회색 눈이 번쩍 떠졌다.
방금,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음악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크게 튀는 음이 들렸다.
동시에 셀린느는 자신이 허공을 밟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악이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