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가까이 와 봐요.”
레온하르트는 움찔했다.
분명히 셀린느는 절대 그녀를 돕지 말라고 얘기했었다. 셀린느는 쉽게 결정을 번복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이 이변이 레온하르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괜찮나?”
“…….”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순간 콱 조여들었다.
셀린느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바닥에 반절 주저앉은 셀린느의 뒷모습은 부들부들 떨렸고 그녀의 앞에는…….
“……뭐?”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얼빠진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럴 리 없어.’
레온하르트는 당장 셀린느의 곁에 함께 주저앉아 쓰러진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의식을 잃었군.’
맥박은 아직 뛰고 있었으나 숨소리는 마치 죽어 가는 사람처럼 힘겨웠다.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단 하나였다.
셀린느가 독이 들었다고 주장한, 이 초록빛 연기.
‘…….’
죄책감과 충격이 레온하르트를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솔직히, 그는 셀린느가 초록색 연기가 독이라고 주장할 때 믿지 않았다.
‘큰 착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제국의 단 하나뿐인 마검사이기는 했으나 신체 자체가 평범한 인간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렇게 독이 함유된 연기는 들어 본 적도 없을뿐더러, 실제로 그러하다면 자신의 몸에도 이미 반응이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명백히 독에 중독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황제 일가였다.
‘……대피하셨겠지.’
다행스럽게도 황족들은 항상 황실 소속 마법사를 곁에 두었다. 주로 암살 위협을 막기 위해서였다.
셀린느가 마법으로 친 방어막이 효과가 있다는 건, 다른 마법사들의 방어막들도 그러하다는 뜻이니 그들은 모두 무사할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생각을 정리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네?”
“정말 독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
순간, 셀린느는 난생처음으로 레온하르트를 탓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레온하르트가 자신의 말을 믿어 주었다면 리브론성의 사람들이 위험해졌을 가능성을 바로 떠올렸을 것이다.
‘……아냐.’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경황이 없다 한들 무의식적으로 다른 누군가를 탓한 자신이 한심했다.
그것도 자신의 말을 전적으로 따라 준 레온하르트를.
심지어 그녀의 말을 제대로 믿지 않았는데도, 부탁만큼은 군말 없이 따라 준.
셀린느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어차피 조금 더 일찍 알았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레온하르트. 사람들을 대피시킬 방법이 없을까요?”
그녀도 자신과 레온하르트가 사람을 일일이 구할 순 없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았다.
하지만 셀린느로선 이 많은 사람들을 구할 방법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고, 레온하르트는 알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불행히도 레온하르트 또한 별다른 뾰족한 수를 내지 못했다.
“……마법사들을 불러와야 할 것 같군. 방어막을 만들 수 있는 자들이 그들뿐이니.”
“부를 방법이…….”
“없지. 그…… 연구소도 폐쇄되지 않았나. 시간이 한참 걸릴 거다.”
“아니, 이미 알지 않을까요?”
셀린느는 희망찬 목소리로 물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남자는 독에 중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어. 마치 누군가가 우리가 도착하기만 기다렸다가 독을 퍼뜨리기라도 한 기분이군.”
“……!”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레온하르트의 말은 셀린느에게 빛나는 실마리를 던져 주었다.
이곳은 공식적으로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시간제한이 있는 스테이지였다.
힐링 포션으로 시시각각 깎여 나가는 체력을 보충할 순 있다고는 하나 한계가 있었다.
‘실제 시간으로 15분 정도였던가.’
게임처럼 자신을 쫓아오는 레온하르트를 피해 가며 목적지로 향할 필요가 없으니 시간은 더욱 단축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미 스테이지의 배경이 바뀐 지금, 클리어 방식 또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만약,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
셀린느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 전 이 연기를 멈출 수 있을 것 같아요. 도와주겠어요?”
“……대답을 알면서 묻는군.”
셀린느는 웃었다.
“그럼, 가죠.”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셀린느는 남아 있는 모든 힘들을 끌어가며 뛰었다. 죽을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의 뒤를, 게임 속에서의 레온하르트보다 더욱 무서운 적이 바싹 추격해 오고 있었으니까.
시간이라는 적이.
셀린느의 머릿속엔 세 번이나 보았던 동일한 데드 엔딩이 떠올랐다.
‘몰살 엔딩…….’
주인공이 저택 안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죽는 엔딩이었다.
다행히 실제 게임 플레이에 비해 시간은 제법 단축한 듯했다.
그동안 각종 장애물들이 덤벼들었지만 레온하르트가 일격에 잘라 버린 덕분이기도 했다.
레온하르트는 초록빛 연기가 잔뜩 뭉친 것처럼 꿀렁대는 슬라임들을 기이하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여섯 번째 슬라임을 단칼에 조각내었을 때,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도움을 받지 않을 걸 그랬다는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레온하르트가 아니었다면, 이곳 사람들은 진작 죽었을 거야.’
얼마나 달렸을까.
리브론성 전체에서 가장 높은 첨탑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이 등장했다.
셀린느는 문을 반쯤 뜯어 버린 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심장이 달음박질했다.
아까는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직감이 게임 속에서 본 것과 정확히 똑같은 것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마침내, 셀린느는 탑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초록색 연기가 완전히 걷힌 전경이 드러났다.
“……!”
옆에서 레온하르트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셀린느는 홀린 듯 탑의 꼭대기 층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그녀의 직감이 옳았다.
이번 스테이지의 클리어 조건은 리듬 게임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주인공 캐릭터가 뛰었고, 이제는 그녀가 뛰게 될.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초조하게 셀린느를 불렀다.
그는 이미 일전에 이곳에 한 번 와 보았다.
전쟁이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감시탑으로 사용하곤 했던 이 거대한 탑엔, 본디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기억과는 사뭇 달랐다.
이곳은 탑이라기보단…… 거대한 광장처럼 느껴졌다.
사방이 탁 트인.
“셀린느!”
그는 애타게 셀린느를 불렀다.
그녀가 서 있는 바닥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허공처럼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그녀 주위로 바싹 다가가거나, 그녀를 자신 쪽으로 당기고 싶었다.
하지만 본능이 그랬다간 그녀도, 그도 위험해지리라고 외쳐 대고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고집이 본능을 꺾은 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결과는 결코 좋지 않았고, 지금은 모험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셀린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
소름이 쭈뼛 돋았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걱정스레 살폈다.
방금 그녀의 목소리에선, 콕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기이함이 느껴졌다.
“여태까지 고마웠어요.”
“……셀린느.”
“이제 이거 하나만 들어줘요. 여기서 뭘 보든, 거기에 가만히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
강력한 불길함이 레온하르트를 엄습했다. 셀린느가 이 비슷한 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셀린느는 마치…….
‘자신이 죽을 걸 아는 병사 같군.’
레온하르트는 딱딱하게 굳은 입을 움직였다.
“네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제외하면.”
“……레온하르트. 시간이 없으니까 이것 하나만 물어볼게요.”
셀린느의 얼굴 역시 레온하르트와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레온하르트는 한 명이 죽고, 천 명이 사는 것과…… 천 명이 죽고, 한 명이 사는 것. 뭐가 나은 것 같아요? 다른 선택지는 없어요.”
“…….”
만약 레온하르트가 셀린느를 조금만 덜 알았다면 망설임 없이 전자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여태까지 살아온 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제 셀린느를 알 대로 알았고,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후자가…… 낫군.”
그는 한 명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천 명이 죽어도요?”
“…….”
셀린느는 일그러지는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바라보며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딜레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죽는 쪽이 되는 것이 달갑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 두지 않는다면 레온하르트는 분명 자신을 막으려 들 것이다.
셀린느는 이번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까지 자신이 보았던 데드 엔딩들을 떠올렸다.
리듬 게임은 무척 어려웠고, 평소 리듬 게임을 좋아하지도 않았던 셀린느는 번번이 실패하곤 말았다.
그럴 때마다 강렬한 고통과 죽음만을 기다리며 끝없이 추락하는 도중 플레이어가 발견하는 선택지가 있었다.
-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초록색 연기를 피어오르게 만들고 있어…… 이게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거구나.’
- ‘내가 조금만, 조금만 힘을 내서 저 사이에 낄 수 있다면…… 톱니바퀴를 멈출 수 있을 텐데.’
- 톱니바퀴를 멈추어 보겠습니까? Y/N
셀린느는 두 가지를 모두 해 보았다.
Y를 클릭할 경우, 주인공의 몸은 톱니바퀴에 그야말로 갈리고 만다.
그 희생을 통해 저택 안의 모든 사람들을 구해 내기는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셀린느의 악몽]의 주인공은 이미 죽었고, 다시 스테이지의 시작 장면부터 돌아가야 하는데.
N을 클릭할 경우, 주인공은 죽는다.
[셀린느의 악몽]의 백 가지가 넘는 다른 데드 엔딩들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게.
이번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명백했다.
‘…….’
셀린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자신이 죽음의 리듬 게임을 잘 버텨 낼 자신이 있다면 레온하르트에게 엄포를 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리듬 게임을 끝까지 클리어한다면 모든 연기는 사그라들고 저택은 정상으로 되돌아갔으니까.
하지만 셀린느는 정말로, 자신이 없었다.
컴퓨터로 하는 리듬 게임조차 어려운데, 실제 몸을 움직이면서 뛰어야 하는 리듬 게임이라니.
더군다나 조금이라도 실패하면 추락사하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자신을 혹시라도 따라오는 일이 없도록 확실히 해 두기 위해 입을 열었다.
“레온하르트,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 계속 서 있어요. 알겠죠? 전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으니까.”
셀린느는 차마 ‘살아나니까’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
침묵이 돌아왔다.
그녀는 속으로 레온하르트가 자신의 말을 제발 따라 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제발, 레온하르트. 전 당신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단 말이에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에게 대답할 시간을 주고 싶었으나 매분 매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려 눈앞의 거대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뛰기 시작하면, 리듬 게임은 시작될 것이다.
바로 그때, 레온하르트의 진중한 목소리가 탑 전체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