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독물 지대…….’
셀린느는 속으로 신음했다.
이렇게나 빨리 다음 스테이지가 등장할 줄은 몰랐다. 당장 엊그제 늪 스테이지가 끝나지 않았던가.
그것도 리브론성이라니.
독물 지대는 플레이어의 시야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아 배경을 거의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황성처럼 화려한 성은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한 저택에 가까웠어.’
머리가 아파 왔다.
정말 퀘스트의 문구처럼 된 것이다.
단지 진엔딩 루트의 마지막 스테이지임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퀘스트의 문구가, 뼈저리게 다가왔다.
-준비해라, 그리고 기다려라.
‘멍청했네.’
셀린느는 속으로 자신을 탓했다.
충분히 준비한 이후 특정 장소로 찾아가서 클리어하는 스테이지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 문구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제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기뻐했다니, 그렇게 한심할 수가.’
이제 스테이지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자신의 눈앞에 불쑥 나타날 것이다.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어쩌면 늪처럼 가장 힘들 때 나타날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더 준비했어야 했어…….’
하지만 셀린느는 이내 자신이 어제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 냈다.
‘어쩔 수 없네.’
셀린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오늘, 새로운 스테이지가 코앞에 닥친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도 자신은 어제 레온하르트의 곁에 있었을 것이다.
그가 무슨 일을 겪을지 알면서도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
“……?”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블랙에게서 내렸지만, 셀린느는 멍하니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많이 놀랐나.’
그는 셀린느를 조심스럽게 이끌어 블랙에게서 내리도록 만들었다.
“미, 미안해요.”
“아니. 놀란 게 당연하다. 나도…… 놀랐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이른 후 걸어서 입구를 넘었다.
수상쩍은 연기로 가득한 공간에 함부로 셀린느를 들일 순 없었다.
다행히 셀린느는 반대하는 대신 입술을 깨물며 이상이 느껴지는 즉시 돌아오라고 할 뿐이었다.
“……!”
레온하르트의 눈이 커지더니, 순식간에 라쉬르를 휘둘러 금속성 방어막으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연기는 임시로 만들어 낸 방어막을 금방 뚫고 레온하르트의 체내로 침투했다.
‘……?’
레온하르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상하긴 하군.’
만약 이 연기가 사람에 해악을 끼친다면 리브론성의 입구는 도움을 요청하며 기어 나오는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리브론성은 비명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마법사들이 복구한답시고 뭔가를 벌였나?’
그는 방어막을 라쉬르로 되돌린 채 셀린느를 향해 돌아섰다.
“별거 아닌 것 같군. 들어와도 될 것 같다.”
“네……?”
셀린느는 눈만 휘둥그렇게 뜬 채 되물을 뿐,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조금 당황했다. 물론 이 연기가 두려울 순 있다. 자신도 바싹 긴장하여 방어막을 만들어 내지 않았던가.
“위험해 보이는 연기지만 별게 아니다. 정 걱정된다면 책임자를 만나서 원인을 알아내도록 하지. 불편하긴 하니까.”
아닌 게 아니라 시야가 완전히 가려져 바로 앞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자신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셀린느의 얼굴이 보인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셀린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뻣뻣하게 굳은 몸을 움직여 안개 속으로 발을 들였다.
“……!”
코와 입에 순식간에 묵직한 연기가 들이닥쳤다.
셀린느는 몸을 뒤트는 동시에 바람으로 방어막을 만들어 그녀와 레온하르트를 보호했다.
“셀린느?”
신선한 바람이 연기를 몰아내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잠시간의 노출만으로도 상당히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셀린느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헐떡였다.
“셀린느!”
레온하르트가 무릎을 꿇으며 셀린느의 양어깨를 조심스럽게 부여잡았다.
“뭐가…… 뭐가 문제지?”
“이, 이건 독이에요.”
“독?”
레온하르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레, 레온하르트에게만 통하지 않는 독이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셀린느는 떠듬떠듬 말했다.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 듯했다.
“셀린느, 나도 독에는 영향을 받아. 이건 평범한 연기일 뿐이다.”
셀린느는 이를 악물었다. 레온하르트는 도저히 갈피를 못 잡는 듯했지만, 자신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독물 지대에서 주인공을 노리며 집요하게 등장하는 적은, 레온하르트였으니까.
한동안 게임상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레온하르트는 독물 지대에서부터 재등장한다.
좀 더 정확히는 독물 지대 스테이지부터 마지막 스테이지에 달하기까지 주인공을 집요하게 쫓아온다.
만약 레온하르트가 이 독가스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럴 수 있었을 리가.
‘……아.’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레온하르트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살피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부턴, 그 어느 스테이지 하나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한동안 레온하르트는 자신과 함께 스테이지의 적들과 맞서 싸우며 치트키 역할을 해 주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 자신이 스테이지의 적일 경우엔?
굳이 실험해 보지 않아도 셀린느는 그 답을 알았다.
‘스테이지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거야…….’
머리가 어지러웠다.
처음부터 레온하르트가 계속해서 방관자 역할을 해 왔다면 모를까, 이미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지 오래이지 않은가.
신경 쓰지 않으려 했던 텅 빈 상자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만약, 자신이 레온하르트에게 강력하게 얘기하여 혼자서 스테이지를 클리어했다면…….
셀린느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지나간 일은 신경 쓰지 말자. 레온하르트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그중 하나에 붙잡혀 있었을지도 몰라.’
레온하르트도, 자신도 당시에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자신 앞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으니, 과거를 후회하며 흘려보낼 시간은 없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고개를 들어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불안 탓에 날카롭던 푸른 눈동자가 셀린느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안도감에 누그러졌다.
“부탁이 있어요.”
“……뭐지.”
“절…… 돕지 말아 주세요.”
“……?”
레온하르트는 침묵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 덕에 셀린느는 그의 얼굴 가득 떠오른 표정을 능히 읽어낼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쓸데없는 고민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셀린느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 저택, 기억나요? 그때처럼 절 쫓아와 주세요. 잡지는 말고……. 그리고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돕지 말고요.”
“이번에도, 그 꿈인가?”
“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고요.”
“뭘 말이지?”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다시, 이 지점에 서서…….”
셀린느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자동으로 저장되는 세이브 포인트인 스테이지의 첫머리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침묵이 흘렀지만, 레온하르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느의 예상대로였다.
“뭐가 되었든, 이것 또한 네 꿈에 나왔다면…… 네 말에 따르는 게 맞겠지.”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죽을 위기에 처하면 얘기는 다르다. 내 모든 힘을 쏟아서 널 구할 테니…… 그렇게 알도록.”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황급히 소리쳤다.
만에 하나 레온하르트가 말한 대로의 상황이 발생한다면 모든 일이 어그러질 것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만류 섞인 외침에 전혀 마음이 움직인 것 같지 않았다.
되레, 어딘가 슬픔이 느껴지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죽지 마라.”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셀린느는 그가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선을 그어 놓았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어쩔 수 없네.’
셀린느는 자신이 바람을 이용해 만들어 낸 방어막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셀린느의 악몽]의 주인공은 시시각각 깎여 나가는 목숨을 힐링 포션으로 채우며 스테이지를 진행한다.
마법으로 두른 방어막이 충분히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다행이야.’
셀린느는 힐링 포션을 함부로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스테이지 클리어 보상을 받지 못한지 제법 오래되었다. 분명 가면 갈수록 스테이지 클리어가 어려워질 터.
자신이 아닌, 레온하르트를 위해서라도 힐링 포션은 끝까지 아껴 두어야 했다.
“레온하르트, 정말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 거 맞죠?”
“뭘 걱정하는진 알겠다만…… 앞이 보이지 않는 것만 불편할 뿐이다. 그것 말곤 없어. 정말로 평범한 연기 같은데.”
“그런가요.”
셀린느는 크게 심호흡하며 방어막 절반을 거두어 자신에게만 둘렀다.
“정말 괜찮아요?”
“그래.”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독가스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초록색 연기 속을 한참 걸을 생각을 하니 온몸이 떨려 왔다.
그녀는 마력석을 가득 담은 주머니를 매만지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해 왔잖아. 마력은 충분해. 마력석도 많이 챙겨 왔고…… 여차하면 링조르의 검집을 써도 되니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셀린느는 앞을 향해 무작정 뛰어가기 시작했다.
“헉, 허억……!”
얼마 지나지 않아 셀린느는 지치고 말았다. 분명 레온하르트와 함께 밤을 반절 지새운 탓이리라.
하지만 셀린느는 지금 부족한 잠을 보충할 시간 따윈 없었기 때문에, 무거운 몸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헤르메스의 신발’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
셀린느는 우뚝 멈춰 섰다.
무언가 물컹한 것이 발에 밟혔다.
셀린느는 몸을 숙여 확인하기도 전부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쓰러진 사람의 몸뚱이였다.
“아, 안 돼…….”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문득 머리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지는 동시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곳을, 레온하르트의 나라를 단순한 게임 속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스테이지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용암 지대, 유령 마을에서, 늪에서…… 스테이지 또한 실제 사람들의 세계라는 걸 충분히 깨달았다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이 순간, 셀린느는 깨달았다.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스테이지는 최대한 빨리 클리어해야 하는 게임 속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아직까지도 그 인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여기가 독가스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이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생각했어야 했어.’
셀린느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성안의 모든 사람들을 옮기기 위해선 스테이지 클리어가 적어도 하루는 지체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레온하르트의 도움을 받으면 이 스테이지의 클리어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셀린느는 결국, 자신이 할 수밖에 없는 결단을 내렸다.
“거기 있죠? 레온하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