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어느덧 완연한 어둠이 사방에 내리깔렸을 무렵,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방 문 앞에서 서서 잠시 심호흡했다.
아직 자신을 계속해서 밀어내려고 하던 목소리의 울림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신경 쓰지 말자. 나는 레온하르트에게 도움이 되기만 하면 돼.’
그녀는 문을 세 번 크게 두드렸다.
“레온하르트, 들어갈게요.”
문은 조용히 열렸다.
불행히도 레온하르트는 낮잠마저도 제대로 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핏발 선 눈으로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까슬한 얼굴엔 피곤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침대에라도 누워 있지…….’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온하르트는 절대 잠을 자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이라도 하듯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기야 만났던 직후의,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던 레온하르트도 낮잠을 제대로 잤던 기억이 없었으니, 놀랄 만한 사실은 아니었다.
“제대로 못 쉬었군요.”
“……내 잘못이다.”
“……?”
셀린느는 어리둥절해져 눈을 깜박거렸다.
“레온하르트 잘못이라니요?”
“아, 아니.”
그제야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말실수를 알아차리고 황급히 실수했다.
“신경 쓸 것 없다. 말이 헛나왔군.”
“많이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레온하르트가 사소한 일까지 그의 잘못으로 돌리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급박한 상황이니만큼 일일이 따지고 들고 싶지가 않았다.
“좀 쉬었나?”
“저요?”
셀린느는 생긋 웃었다.
“전 뭐, 잘 먹고 푹 잤어요. 밤에 안 자도 될 만큼.”
“…….”
레온하르트의 낯빛이 즉각 어두워졌다. 셀린느는 그 원인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추한 꼴을 보일까 봐 걱정하는 거죠?”
“……아니라곤 할 수 없군.”
“걱정하지 말아요. 레온하르트는 언제 어디서나 잘생겼으니까.”
셀린느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즉각 달아올랐다.
“어머, 부끄러워하는 건가요?”
“……쓸데없는 농담은 그만하도록.”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침대를 가리켰다.
“밤이 늦었다. 저기서 좀 자든가.”
“조금 전에 말했잖아요. 푹 잤다고요.”
그녀는 성큼 걸어가 레온하르트가 앉아 있는 테이블의 다른 의자에 앉았다.
“레온하르트는 여기 앉아서 밤을 새울 생각이죠? 잘되었네요. 심심한데, 제 말동무나 되어 줘요.”
레온하르트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셀린느가 어느덧 그의 얼굴을 바로 코앞에서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 말동무가 되어 줄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제가 레온하르트의 말동무가 되어 줄게요. 여기는 좀 불편해서 싫어요? 바닥에라도 앉을래요?”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히, 침대에서 자는 동안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거늘…….’
하지만 셀린느 헌트는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 여자였다. 바로 지금도 그러하듯.
“무슨 얘길 할 생각이지?”
“뭐, 아무 얘기나?”
셀린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은 그동안 제법 많은 이야기를 해 왔지만, 주로 당장 닥친 문제에 관한 얘기들이었다.
“레온하르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요.”
“…….”
레온하르트는 미친 듯이 달음박질하기 시작하는 가슴을 다스리려 노력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 역시 셀린느에 대해 알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좀 더 정확히는, 그녀의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것을 손에 넣고 싶은 불순한 욕망에 가까웠지만.
레온하르트는 그 모든 충동들을 가까스로 숨기는 데 성공했다.
“……나에 대해, 뭘?”
“아무거나요.”
셀린느의 입이 자그마한 호선을 그렸다.
“뭐…… 좋아하는 색부터 시작할까요?”
“색?”
레온하르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없는 것 같다만.”
“그래요? 전 초록색을 좋아해요.”
“그렇군.”
셀린느는 계속해서 사소한 질문들을 이어 갔다.
레온하르트는 그 질문들이 의미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했다.
달이 더더욱 높이 떠오를 즈음.
레온하르트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
셀린느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레온하르트를 관찰했다.
레온하르트의 긴장을 풀어 주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악몽 자체는 자신이 어떻게든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이번 악몽, 정말 힘들겠지.’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도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 나갈 때의 고통이 선명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을 나눠서 분담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셀린느는 이 세계에서 불가능한 것은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셀린느!”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깊은 바다처럼 푸른 눈이 번쩍 떠졌다.
“여기, 있었군.”
셀린느는 이를 꽉 아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가 느꼈을, 그리고 오늘 밤 내내 느껴야 할 고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괜찮다.”
“뭐가 괜찮아요……!”
결국, 셀린느의 입에서 울음 섞인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레온하르트는 항상, 항상 괜찮다고 하면서…….”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않나.”
“…….”
레온하르트는 힘없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우린 닮았군.”
셀린느는 손을 내밀어 테이블 위를 꽉 잡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손 위에 얹었다.
“……!”
레온하르트의 손은 순간 뻣뻣하게 굳었지만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전 항상, 여기에 있어요. 레온하르트가 꿈에서 뭘 보든 그건 지금의 제가 아니에요. 그걸 항상 기억해 줘요.”
“노력하지.”
그 말을 끝으로, 레온하르트의 머리는 힘없이 기울어졌다.
셀린느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악몽을 꾸는 그를 제대로 관찰하는 건 처음이었다.
레온하르트의 조각 같은 얼굴은 꿈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보고, 겪을 때마다 일그러졌고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손 위에 얹은 자신의 손에 힘을 주며 그를 깨웠다.
“…….”
레온하르트가 조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전 괜찮아요, 레온하르트.”
셀린느가 또렷한 목소리로 그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셀린느.”
“네?”
“부탁이 있다.”
“……나가라는 거면, 듣지 않겠어요.”
“그게 아니라…….”
레온하르트는 잠시 망설였다.
“나를 깨우지 말아다오.”
“네?”
“네가 겪었던 일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
“…….”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그냥, 실험이 뭔가 잘못되어서…… 무언가가 폭발한 게 아니었어요?”
“우두머리 마물들의 핵이 담고 있는 에너지에 대해선 잘 안다.”
레온하르트는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 냈다.
“하지만 네가 겪었던 건…… 싸웠던 건. 그것들로는 설명하기가 힘들…….”
레온하르트의 말이 뚝 끊어지더니,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셀린느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그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은 많았다.
그러한 종류의 어둠은 게임에서 적으로 등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마법을 차단하는 힘.
마물들의 힘보다는…… 흑마법사의 힘에 가깝지 않은가.
‘아.’
셀린느는 불현듯 깨달았다.
레온하르트는, 폭발이 흑마법사들에 의해 촉발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 깨우지 말라고 한 거고…….’
원인을 알기 위해서 실제 그 상황을 수십 번씩 겪어 보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을 테니까.
셀린느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작 그 일을 겪은 당사자는 바로 그녀 자신이었는데도, 아무런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심하구나, 나…….’
셀린느는 한숨을 집어삼켰다.
***
레온하르트는 따갑게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통해 드디어 기나긴 밤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간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던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반쯤 눈을 내리깐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셀린느?”
“레온하르트.”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물기 가득한 청회색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
그는 울었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었으니까.
“흑마법사가 확실하더군.”
“그런가요.”
셀린느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흑마법사가 몰래 잠입해서, 에너지를 오염시킨 듯하다.”
“마법사들이 그 사실을 알까요?”
레온하르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잘 모르겠군. 만약 이 일을 극비리에 숨기기 위해 모든 자료를 폐기 처분했다면 아직도 모르고 있겠지.”
“설마……!”
“그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아 보이더군.”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셀린느는 물론, 그들 자신의 동료들까지 파묻어 버리려 하던 마법사들의 행태가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레온하르트, 마법사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알겠지만…….”
“그들은, 지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산 채로 봉인하려 했다.”
“……!”
청회색 눈이 순간 경악에 질려 흔들리더니, 이내 분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리 싸워도…… 누구도 문을 열지 않았군요.”
“그래.”
“그럼, 마법사들은 이미 원인을 밝혀냈을 거라고 생각해요.”
“……?”
레온하르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왜지?”
“지하에 있던 사람들 또한, 마법사니까요.”
셀린느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찼다.
“그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그렇군.”
레온하르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분명 우두머리 마물들의 핵을 가지고 연구할 정도면 실력이 상당한 마법사들일 터.
분노한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만나 봐야겠군.”
레온하르트는 일어섰다.
흑마법사가 황궁에 잠입하여 더러운 수를 쓴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황실 소속 마법사만이 출입할 수 있는 연구소에서 이런 일을 벌였다는 건…….
그들 중, 흑마법사가 있다는 뜻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일전에, 황태자의 측근들을 검사했던 것처럼 간단히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황실 소속 마법사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의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
임무나 연구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제국 밖으로 나가 버린다면 어떻게 잡겠는가?
이 흑마법사는, 마법사들의 협조 없이는 결코 잡을 수가 없었다.
셀린느는 조금 불안한 눈치였다.
“어떻게 만나죠? 연락할 방법도 없고 해서…….”
레온하르트는 코웃음 쳤다.
“그 웃기지도 않은 온실을 복구하려고 힘쓰고 있겠지. 어디에 있는지는 안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는 좀 여기서 쉬고 있어도…….”
“어머, 제가 할 소리를 하네요.”
셀린느는 싱긋 웃었다.
“레온하르트가 지금 움직이려고 하는 이유와 정확히 똑같은 이유예요. 저도 가만히 앉아 있진 못하겠거든요.”
레온하르트는 블랙을 있는 힘껏 몰았다.
딱히 몇 분 늦게 도착할수록 무언가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
마침내 리브론성의 입구에 도착한 순간.
“……!”
셀린느의 몸은 블랙을 탄 채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레온하르트, 저, 저건…….”
셀린느는 뒷말을 간신히 삼켰다.
리브론성은 인공적으로 느껴지는 초록색 연기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셀린느는 그것의 정체를 알았다.
독물 지대.
그녀가 게임 속에서 클리어했던, 스테이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