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그는 웃음기를 띤 청회색 눈동자가 흔들리자마자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셀린느는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불안정한 목소리를 감출 순 없었다.
만약 평소의 셀린느라면 당장 레온하르트의 말에 반박했을 것이다.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다고, 자신은 레온하르트를 돕고 싶다고, 그의 짐을 덜어 주고 싶다고…….
하지만 지금, 셀린느는 갑작스레 달라진 레온하르트의 태도에 기인한 불안감에 휩싸인 상태였다.
셀린느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무, 무슨 뜻이죠?”
“…….”
침묵이 흘렀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셀린느는 분명 상처받았다. 조금만 생각했어도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그 저택을 나온 후, 셀린느가 제대로 된 교류를 한 사람은 단 셋이었다.
레온하르트 자신과, 호위 시녀 대니, 그리고 칼 루테 정도.
그중 대니와 칼 루테 모두 베르누이가에서 붙여 준 사람이 아니던가.
셀린느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오직 레온하르트 자신뿐이리라.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셀린느가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자신을 돕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 마음이 레온하르트를 주저하게 했다.
결국, 침묵을 깬 건 셀린느였다.
“……저주를 풀고 나면 저와 레온하르트는 아무런 관계가 아닌 건 맞아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세차게 방망이질했다.
“하지만 대체 왜, 그게 제가 레온하르트를 돕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거죠?”
레온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여전히 흔들리지만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느껴졌다.
“네가, 위험해지니까.”
놀랍게도, 그 간단한 말 한마디에 셀린느는 안심한 듯했다. 특유의 어조로 되돌아간 걸 보면.
“레온하르트, 생각해 봐요. 흑마법사들은 이미 저를 쫓고 있어요. 저주가 풀린다고 그들이 저를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해요?”
레온하르트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알잖아요. 레온하르트 곁만큼 안전한 곳은 없어요.”
“내가…… 정말로 바보가 되었나 보군.”
깔깔한 목을 통해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셀린느는, 저주를 풀고 난 이후에도 그 자신 때문에 계속해서 위험에 처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더욱 큰 위험에.
저주가 풀린 셀린느는, 한 번 죽으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테니까.
레온하르트는 이마를 문질렀다.
여태까지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인 여파가 폭풍 치는 바다의 파도처럼 몰려와 머리가 아팠다.
‘후우…….’
셀린느는 크게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레온하르트의 반응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단지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아갔을 때의 자신이 걱정되어 차갑게 내치려 한 것이었다.
작은 목소리가 마음 깊은 곳 어디선가 속삭였다.
‘역시 레온하르트는 날 버리지 못해.’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며 그 목소리를 떨쳐 버리려고 애썼다.
‘나는 레온하르트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거야. 짐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녀는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오늘 내내 레온하르트의 곁에 있을 거예요. 불만 있으면 지금 얘기해요.”
당연히,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말을 거부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황도에서 가장 값비싼 식당은커녕 벤치 근처에 있던 자그마한 식당에 들어갔다.
“미안하게 되었군.”
레온하르트가 메뉴판을 탐독하는 셀린느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왜요?”
“네가 원하던 것과 많이 다르지 않나.”
“괜찮아요. 그냥 새로운 곳에서 먹고 싶었던 거니까.”
“그런가?”
셀린느는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탁 얹었다.
“식사 종류는 다 시켜도 되겠죠?”
잠시 후.
셀린느는 식당 사장이 싱글벙글하며 직접 가져다준 따끈따끈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갓 구운 베이컨과 달걀프라이, 신선한 토마토와 양상추가 어우러져 한 입 베어먹을 때마다 감탄사가 나왔다.
무엇보다도 평범하게 살던 시절 종종 먹곤 했던 샌드위치가 떠올라 마음에 들었다.
셀린느는 먹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레온하르트는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녀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어떠한 임무도 예정에 두지 않고, 이렇게 한가로이 식사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분명 배 자체는 고픈데도 먹는 것보다 눈앞의 셀린느를 바라보는 것이 더욱 즐거웠다.
“안 먹어요?”
문득 셀린느가 고개를 들고 레온하르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입맛이 없어요? 이상하네. 배가 엄청 고플 건데…….”
“아, 잠깐 생각 중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황급히 손을 눈앞의 음식을 포크로 내리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레온하르트, 그건 후식처럼 보이는데요…….”
“그렇군.”
레온하르트는 입 안에 달콤한 맛이 퍼진 다음에야 자신이 먹은 게 치즈케이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괜찮아요?”
“……괜찮다.”
셀린느는 자신이 거듭 물은 다음에야 음식을 제대로 먹기 시작하는 레온하르트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역시, 악몽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나 보네.’
레온하르트의 기분은 의외로 괜찮아 보였지만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너무 긴장하진 말아요. 어차피 하룻밤이니까…… 저도 있고요.”
“…….”
레온하르트는 잘 익은 버터감자 구이를 먹으며 고민했다. 셀린느는 제법 큰 착각을 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셀린느.”
“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악몽이 두렵지 않다.”
“아.”
셀린느는 잠깐 눈을 깜박거렸다.
“미안해요. 레온하르트가 겁쟁이라고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단지…… 힘들어하니까.”
“그렇게 힘들지도 않을 거야.”
이번엔 셀린느가 혼란스러워할 차례였다.
여태까지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악몽을 꿀 때마다 그와 함께 밤을 지새웠다.
그때마다 힘겨워한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소리 없는 갈등을 예상하고는 작게 미소 지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예전의 나는 분명 네가 죽는 걸 꿈속에서 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지금도 힘들잖아요.”
“그렇지 않아.”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네가 죽는 것 자체가 두렵다. 그에 비하면 꿈은 아무것도 아니지.”
“꿈에서, 제가 계속 죽어도요?”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레온하르트는 쓰게 말했다.
“꿈보다도, 네가 미래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훨씬 두렵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고통스러울 테니까?”
레온하르트는 코웃음 쳤다.
“고통 하나 이겨 내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철인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거짓말인 거 다 알아요. 언제였더라? 제가 있으면 고통을 버티기가 좀 더 낫다고 한 것도 레온하르트였고…….”
“…….”
레온하르트는 가능하기만 하면 한때의 나약하고 생각 없던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뭐, 방금 레온하르트가 한 말이 다 맞는다고 쳐요. 하지만 그럴수록 제가 곁에 있으면…… 좀 안심이 되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
레온하르트는 순순히 인정했다.
“네가 있어 주는 게 정말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럴 테고.”
그는 셀린느의 입가에 설핏 떠오른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네가 살아 있다는 걸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 안심이 되어서…….”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목이 메 말을 뚝 끊고 따뜻한 물을 한 잔 들이켰다.
“그렇군요.”
셀린느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레온하르트의 말은 전부 이해가 갔다.
게다가 더는 오늘 밤을 혼자 버티겠다고 고집부리지 않는 게 어디인가.
하지만 셀린느는 어딘가 자신이 놓친 점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뭐지?’
그러나 그들은 어느덧 테이블 한가득 차려진 음식을 모두 먹었고,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었다.
“이런 곳도 먹을 만하군.”
레온하르트는 조금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셀린느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요.”
“……?”
“사실 악몽 때문에 아침부터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나오자고 한 거였거든요. 그런데 제 기우였던 것 같으니…… 다행이에요.”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조금 기가 막혀 셀린느를 불렀다.
자신은 당연히 셀린느가 그녀 자신의 기분 전환을 위해 밖으로 나오자고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를 위해서였다니.
“나는…… 네가 좋으라고 나왔는데.”
“그런가요?”
셀린느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럼 더더욱 다행이네요. 저도 좋고, 레온하르트도 좋은 일이라니.”
“그, 그래.”
레온하르트는 이번만큼은 셀린느의 사고방식을 따라가지 못했지만 동의했다.
“이제 돌아갈까요? 저도 레온하르트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으니까.”
***
그랜드 호텔로 돌아가자마자 잠에 빠져든 레온하르트는 꿈을 꾸었다.
악몽이 아닌, 평범한 꿈을.
봄꽃이 활짝 피어난 완연한 봄이었기에 일반적인 꿈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셀린느는 어디에 있지?’
레온하르트는 평범한 꿈속에서조차 무의식적으로 셀린느를 찾기 시작하는 자신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있나.
셀린느를 한시라도 생각하지 않는 삶이 이제 상상이 가지 않을 지경이 되었는데.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찾아 꽃이 활짝 핀 벌판을 서성였다. 달큰한 꽃향기가 느껴졌다.
‘셀린느가 좋아하겠군.’
레온하르트는 무심코 허리를 굽혀 새빨간 꽃을 한 송이 꺾었다.
“레온하르트!”
갑자기 들려온 밝은 목소리에 레온하르트의 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꿈인 줄 알면서도 멍하니 셀린느를 불렀다. 어느새 셀린느가 자신의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레온하르트에게서 꽃 한 송이를 받아 들었다.
“이거, 제게 주려고 꺾은 거예요?”
“……그래.”
“어머, 고마워요.”
셀린느의 뺨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럼 저도…… 선물 하나.”
그녀는 까치발을 하더니 레온하르트의 목에 두 팔을 휘감았다.
레온하르트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셀린느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았다.
그는 셀린느의 부드러운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잠에서 깨어났다.
대낮의 따스한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방 한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햇살을 노려보았다.
이 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자신은 셀린느 같은 예언자가 아니니, 마음속 어딘가 묻혀 있는 욕망의 발산이었을 것이다.
‘…….’
레온하르트는 손마디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