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셀린느는 벨을 울려 시종을 부르려는 레온하르트를 제지했다.
“기왕 먹는 거, 바깥에서 먹고 싶어요.”
“먹고 싶은 게 있나?”
셀린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황도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식당에 가고 싶어요.”
“……?”
레온하르트는 눈을 깜박였다.
그는 황도에서 식당에 가 본 기억이 없었다.
대공 일가가 황도에서 철수하기 전까진 당연히 집안 요리사의 음식만 먹었고, 그 후엔 황실의 음식만 먹었다.
가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설 때가 있었지만 맛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당연히 제일 비싸고 좋은 식당이 어디인지 몰랐다.
“레온하르트가 좋아하는 식당도 괜찮아요. 당연히 맛이 훌륭할 테니까.”
“……미안하게 되었군. 황도의 식당은 잘 몰라서.”
“정말요?”
셀린느는 조금 놀랍다는 투였지만, 이내 밝게 웃으며 제안했다.
“그럼,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는 건 어때요?”
“……피곤하지 않나?”
“몸이 쑤시는걸요.”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셀린느의 몸이 사전적 의미 그대로 쑤시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밖에 나돌아 다니고 싶다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호텔 안에서 편안하게 쉬는 게 셀린느의 몸에는 더 나아 보였다.
“정말로 나가고 싶은가?”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레온하르트도 저도, 쉬지도 못하고 저주만 풀러 다녔잖아요. 아니면 임무를 수행하거나……. 그런 데서 좀 벗어나 보고 싶어요.”
레온하르트는 아직도 잠에 반쯤 취해 있는 듯한 셀린느를 살폈다.
셀린느의 말대로, 그들은 최근 한 달간 제대로 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존의 임무만이 반복되는 삶에 익숙해져 있던 레온하르트에게는 평상시와 비슷했으나 셀린느는 당연히 최근의 가혹한 생활에 지쳐 있었으리라.
“그러도록 하지.”
레온하르트는 밖에 나갈 채비를 하며 자신이 아는 셀린느의 기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떠올리려 애썼다.
‘달콤한 음식과 부드러운 옷, 깔개 같은 걸 좋아하고…… 또 뭐를 좋아하지?’
수 분을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자신이 셀린느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당연한 일이었다.
여태까지 그는 셀린느의 저주를 해결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어 다른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그야말로 바보였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셀린느에게 휴식이 필요한 날, 그녀가 좋아할 만한 것들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오늘, 셀린느에게 좋아하는 것들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방을 나섰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레온하르트는 진흙으로 온통 더러워진 카펫을 피해 소파에 앉은 채 셀린느를 기다렸다.
셀린느는 보통 활동하기 좋은 드레스에 케이프를 하나 걸친 채 다녔기 때문에 나들이 준비에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마간 후.
“많이 기다렸어요?”
레온하르트의 눈이 커졌다.
셀린느는 겨울 외투에 폭 파묻혀 있었다.
그녀의 최근 옷차림은 상당히 간소해졌기 때문에 오랜만에 보는 겨울 옷차림이었다.
셀린느는 마법을 쓸 수 없는 반동에서 풀려난 이후 마력을 다루는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두꺼운 대신 불편한 겨울 외투를 더는 입지 않아도 되게 섬세한 열기로 몸을 감쌀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오늘만큼은 너무 기진맥진해 옷의 힘을 빌리고 싶었다.
셀린느는 멋쩍게 웃었다.
“오늘만큼은 마법을 좀 쉬고 싶네요.”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긴장했다.
셀린느가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태라면, 바깥나들이는 온갖 위험 요소들로 가득한 함정에 발을 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괜찮겠나?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은 거라면 지배인에게 얘기해서…….”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을 쓸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어요. 그냥 지금은 좀 쉬고 싶을 뿐이에요.”
“다행이군.”
그들은 함께 호텔을 나섰다.
평범한 나들이였지만 레온하르트에게는 제법 특별하게 느껴졌다.
셀린느와 함께 아무 목적 없이 황도를 거니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지, 셀린느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니까.’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마구간으로 걸어가려다 우뚝 멈춰 섰다.
“말을 타는 게 좋겠나?”
“마차를 타요. 블랙도 쉬어야죠.”
셀린느는 설핏 웃으며 레온하르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들은 호텔 지배인이 직접 불러 준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황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도착했다.
평일 오전의 번화가는 한적했고, 레온하르트와 셀린느는 한가로이 거리를 걸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황도를 제대로 구경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구나.’
셀린느는 18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이곳에 왔다면 자신의 눈은 사방을 구경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셀린느는 이미 숱한 궁전과 대저택들을 보았기에, 이곳의 건물들은 평범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곳 사람 다 되었네…….’
셀린느는 조금 울적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금 무리하게 외출한 탓인지 다리도 살짝 후들거렸다.
셀린느는 평상시 습관처럼 레온하르트에게 몸을 슬쩍 기대었다.
“……!”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셀린느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몸을 지탱해 주지 않았다.
되려 뻣뻣하게 셀린느를 밀어내는 것이 아닌가. 셀린느는 깜짝 놀라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레온하르트, 어디 안 좋아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행동은, 지양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셀린느는 기가 막혀 아까 상관없는 것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냐고 하려다가, 당시 레온하르트의 반응은 떨떠름했음을 기억해 내고 입을 다물었다.
“알겠어요.”
셀린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 했지만 조금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오늘 밤 혼자 있으려는 포석인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셀린느는 지금 와서 불필요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으니 거리를 두자는 레온하르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레온하르트는 상식과는 턱없이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는 타입은 더더욱 아니었다.
‘분명 내가 같이 있는 걸, 바라지 않는 거야.’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레온하르트는 단지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서 밀어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점을 생각하면서 레온하르트를 이해하려고 하여도, 자꾸만 속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거리를 나온 이유가 있지 않은가.
셀린느는 금세 화제를 돌렸다.
“레온하르트는 좋아하는 음식이 뭔가요?”
“…….”
레온하르트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어느 음식이나 맛이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다 잘 먹긴 했지만, 그중 유독 좋아하는 건 없었다.
“딱히 없는 것 같은데.”
“그런가요?”
셀린느는 조금 의외라는 투였다.
“음식을 제법 가리길래…… 입맛이 까다로운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고기만 나오면 먹는 속도가 다르던데요.”
“……그런가.”
“게다가 좀 특이한 맛은 싫어하고요. 꼭 먹어야 할 때가 아니면 절대 안 먹잖아요.”
셀린느의 말 하나하나는 레온하르트가 한 번도 의식해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지만, 듣고 보니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것 같군.”
“그럼, 고기를 먹으러 갈까요?”
“아니.”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좋아하는 걸 먹으러 가지.”
“점심으로 고기를 먹고, 후식으로 달콤한 걸 먹으면 되잖아요.”
레온하르트는 고급 식당가가 그들이 서 있는 거리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불행히도 셀린느는 그 거리에 들어서기 일보 직전에 완전히 지쳐 버리고 말았다.
“좀 쉬면 안 될까요?”
이번에도 기대 오며 그를 빤히 바라보는 셀린느에 레온하르트는 크게 움찔했다.
“그, 그러는 게 좋겠군.”
다행히 거리 곳곳엔 두 사람은 충분히 쉴 수 있는 벤치가 있어 길바닥에 앉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만 앉힌 채, 그녀를 멀뚱히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셀린느는 자신 곁을 손으로 쓱쓱 쳤지만 레온하르트는 앉지 않았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에게 왜 안 앉느냐고 묻는 대신, 시선을 떨구면서 중얼거렸다.
“전 레온하르트가 앉았으면 좋겠는데…….”
“누가 안 앉는다고 했나. 잠깐 주위를 살폈을 뿐이다.”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그녀의 곁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셀린느는 미소 지었다.
이 세계에서 그녀가 정말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레온하르트 한 명이었다.
다른 이들은 북부의 손님이라는 그녀의 지위나, 마법사라는 능력 때문에 생긴 지인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더는 마법을 쓸 수 없게 되어도 함께 저주를 추적해 주었다.
갑작스러운 불안감이 셀린느를 엄습했다.
‘만약 진엔딩을 봤는데도,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때도 레온하르트가 내 곁에 있어 줄까.’
셀린느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불안감을 떨쳐 냈다.
그녀는 마법사니, 레온하르트의 임무에 도움만 된다면 언제까지나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슬쩍 돌려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있잖아요, 제 저주가 풀린다면 뭘 할 건가요? 요새 저 때문에 레온하르트가 아무것도 못 하고 있잖아요.”
레온하르트는 눈을 깜박거렸다.
“임무에 주력하면서…… 아니.”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차피 셀린느를 만나기 전 자신은 임무 외엔 쉬거나 수련하는 게 전부였다.
“임무에만 주력하겠군. 그것 말고는 생각나지 않아.”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레온하르트는 좀 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해요.”
셀린느가 살포시 웃었다.
“레온하르트가 괜찮다면, 저주가 풀리고 난 후에도 같이 임무를 수행해도 될까요? 흑마법사든, 마물들이든.”
“……?”
레온하르트는 귀를 의심했다.
그동안 그는 셀린느가 항상 자신의 곁에 붙어 다니고, 끈질길 정도로 임무를 함께 수행하려 드는 게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셀린느가 그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저주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숨이 살짝 가빠지면서 심장이 가슴팍을 세차게 두드렸다.
“……정말인가.”
“빈말로 보여요?”
레온하르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인지를 알 수 없어서.”
저주가 풀리고 나면 셀린느가 그에게 느끼는 부채감은 사라진다.
전혀 그의 곁에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붙어 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레온하르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저주가 풀린다는 건, 셀린느의 목숨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의미했기에.
‘…….’
가슴 아픈 결론을 내린 그는 셀린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에 대한 호감만이 느껴지는 청회색 눈이 사르르 웃고 있었다.
“저주가 풀리고 나면 너와 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관계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