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레온하르트에게는 불행하게도, 밤은 금방 찾아왔다.
그는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잠을 좀 자두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눈을 감으면 그의 품 안에서 찢겨 나가던 셀린느의 잔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이미 하룻밤을 꼬박 새웠고, 이틀 밤마저 지새우게 되었다.
‘마치…… 예전 같군.’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찾아가기 전, 악몽으로 한 달이 넘게 잠들지 못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조소했다.
‘한 달이 넘도록 그랬지. 이틀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그때는 대체 왜 꾸는지도 모를 악몽이었지 않나.
이번만큼은 충분히 버텨 낼 수 있었다.
문제는, 셀린느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적어도 이 사안에서만큼은 셀린느가 고집을 부리며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억지로라도 밀고 들어오겠지.’
지금은 자신이 자리를 피하거나 문을 잠가 버리면 셀린느가 돌아갈 수밖에 없는 예전과 다르다.
자신이 호텔을 나선다면 셀린느는 쫓아올 것이고, 방문을 잠근다면…….
‘부숴 버리겠지.’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셀린느는 갑자기 그녀를 거부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여태까지, 그가 너무나 그녀를 잘 이용해 왔으니까.
‘……처음부터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어.’
셀린느가 처음 그와 함께 밤을 보내 주겠다고 얘기했을 때만 해도,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잘 몰랐다.
오직 흑마녀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불행한 저주에 걸렸을 뿐인 여자.
그 간단한 사실이 그가 알았던 셀린느의 전부였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으로 셀린느와 떨어졌을 때, 돌아오고 난 뒤 자신이 보인 추태가 떠올라서였다.
‘남부에서도…… 아.’
레온하르트의 얼굴에 다시금 열감이 올랐다.
그가 셀린느 헌트를 만난 지 장장 삼 개월.
그제야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는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인식한 것이다.
‘여태까지 무슨 짓을 한 거냐, 레온하르트 베르누이…….’
어쩌면 남들은 이미 셀린느가 그의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레온하르트는 거친 오른손으로 이마를 꽉 눌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건 셀린느의 미래와도 큰 관련이 있는 문제였다.
지금이야 저주 때문에 그럴 엄두도 못 내겠지만, 언젠가 그녀도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할 터.
한때 대공자의 여자였다는 소문이 돌면 문제가 발생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레온하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셀린느가 여태껏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건 그럴 만한 일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기이할 정도로 받지 못하고 자라났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눈치챘어야 했다.
‘아…….’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거처에 있는 하인들이 셀린느가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마다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아 이상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남부에서, 남작가의 시녀가 보였던 반응은 또 어떻고.
황태자가 자신과 셀린느의 관계를 두고 조롱한 것도 이제는 단순한 견제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북부로 돌아가면, 제대로 정리해야겠어.’
레온하르트는 마땅한 방법도 생각이 나지 않으면서 중얼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거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간 자신은 그 누구와도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너무나 분명한 징조들도 놓쳐 버리고 만 것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신은 셀린느를 제법 잘 안다. 분명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할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이라도 좀 자 두는 게 좋겠지만, 갈수록 마음은 심란해지기만 했다.
‘지금 얘기를 해 두자.’
레온하르트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밤까지 기다린다면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셀린느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셀린느의 침실로 걸어가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나?’
레온하르트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이제는 알면서도 문을 열었다.
셀린느는 거대한 침대 위에 웅크린 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 없었다.
피와 진흙을 모두 멀끔히 씻어 낸 셀린느는 그녀가 겪었던 힘들고 무서운 사건 중 무엇 하나 겪지 않은 평범한 여자처럼 보였다.
‘저주가 풀리면, 그렇게 되겠지.’
레온하르트는 저주가 풀린 셀린느의 삶을 상상했다.
셀린느는 고귀한 마법사이자 북부의 손님으로서 안락하고 풍족한 삶을 누리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
‘…….’
분명 생각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행복해져야 할 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점점 자신의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 이유를 모를 만큼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이 멍청한 인간아…….’
레온하르트는 쓰게 웃었다.
셀린느의 마음을 사로잡아 평생을 함께할 사람은 결코 자신이 될 수 없다.
자신은 언젠가, 북부의 영주로서 셀린느의 자식과 손자들을 축복해 주는 게 그녀의 가족들과 맺는 연의 전부일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잠에 곤히 빠진 셀린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죽는 것도 내가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레온하르트는 불쑥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찡그렸다.
이러한 생각이 떠오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동안 이 생각들을 이유 모를 충동들로 치부했다.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는 결코 죽을 수가 없었으니까.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단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흑마법사와 마물을 베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셀린느 앞에서는 그 당연한 사실이 의미 없는 환상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부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흑마법사의 손에 목숨을 잃든 셀린느의 목숨 앞에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레온하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모든 생각들은 감히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었고, 그는 조금 전에야 이 생각들의 근원을 찾은 것이다.
“우음…….”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잠꼬대에 놀라 뒷걸음치다, 그대로 의자에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레온하르트?”
잠에서 바로 깨어난 셀린느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불렀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
“무슨 일이 없는데 제 방에 들어왔다고요?”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셀린느는 지나치게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오늘 밤은 혼자 보내겠다.”
“…….”
셀린느는 대답 대신 팔짱을 끼며 레온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물론 걱정이 되겠지만, 나도 이제는 혼자서도 버틸 수 있다. 무엇보다도 네가 안전하다는 걸 아니까…… 좀 더 쉬울 테고.”
“레온하르트, 제가 지금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레온하르트를 내보낸 다음 꿀 같은 잠을 자는 건 쉽거든요?”
“하지만 밤엔 얘기가 달라진다는 거군.”
“그렇죠.”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잠그려고요? 부숴 줄게요. 수리 비용은 레온하르트가 내요.”
“……내가 나간다면.”
“이 세상 끝까지 쫓아가겠어요.”
우습게도, 셀린느의 반박을 들을수록 레온하르트의 가슴은 기묘한 기쁨에 달뜨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성에 의해 가라앉았지만.
레온하르트는 그가 오늘에서야 깨달은 이유를 셀린느에게 제시하기로 했다.
천천히 설명한다면 아무리 세간의 상식을 배우지 않고 자란 셀린느라도 알아들을 것이다.
“셀린느, 지금 와서야 얘기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셀린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우린……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오늘 밤을 혼자 버티겠다는 것도 그런 이유고.”
셀린느의 대답은 레온하르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튀어나왔다.
“제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뭐라고?”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놀라움에 찬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셀린느는 답답한 나머지 말을 따발총처럼 쏟아 냈다.
“레온하르트, 우리가 처음으로 임무에 나갔던 날 기억해요? 황태자 전하께서 하사하신 마차를 타고.”
“그날을 어찌 잊겠나.”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비통했다.
그날은 자신의 오만함과 나약함 때문에 셀린느가 죽은 첫 번째 날이었다.
“그때, 마차 안에서 제가 뭐랬는지 기억해요? 돌아올 때 말고, 갈 때요.”
“…….”
레온하르트는 오직 후회만이 남아 있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으나 셀린느가 말한 순간은 떠오르지 않았다. 셀린느는 풉 하고 웃었다.
“레온하르트가 한 말이니 들어 보면 기억하겠죠. 이 마차는 여자를 데려간다고 하니, 황태자 전하께서 내려 주신 거라고.”
“…….”
레온하르트는 말문이 턱 막혔다.
셀린느의 말이 맞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러게요.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셀린느는 진심으로 레온하르트의 말에 동의했다.
하도 기가 막혀 당시 레온하르트의 표정까지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였다.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 잠깐만.’
셀린느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동안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아는 그 어떤 남자보다도 둔감하게 행동했다.
한때는 자신을 평범한 여자가 아닌, ‘저주에 걸린 무언가’로 취급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레온하르트, 지금 와서 그런 시시콜콜한 걸 따질 거라면 제가 자고 있을 때 들어오지 말아야 하는 거라고요.”
“……!”
레온하르트는 혀를 깨물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 그렇군. 지금 나가겠다.”
“잠깐만 있어 봐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붙잡았다.
“어쨌든, 앞으로 저와 레온하르트가…… 애인이라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는 거죠?”
레온하르트는 조금 지나칠 정도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
“그, 그야…….”
레온하르트는 더듬거리며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셀린느는 무척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봐요. 레온하르트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잖아요. 앞으로 평생.”
“그, 그렇지. 하지만 네가……”
“저도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셀린느는 툭, 하고 내뱉었다.
이 몸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간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녀는 정말로 이 세계에서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어느 현대인이 중세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어 하겠는가.
“……!”
하지만 셀린느의 생각을 짐작조차 못 하는 레온하르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그런 오해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몸서리치게 싫은 거라면 좀 생각해 보겠지만…… 그건 아니죠?”
“…….”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느는 손뼉을 약하게 쳤다.
“그럼 해결이네요! 어차피 우리 모두에게 상관없는 오해를 종식시키기 위해 고생할 필요가 없잖아요.”
“…….”
레온하르트는 무어라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닫았다. 지금의 혼란스러운 머리로는 도저히 셀린느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청회색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그런 시답잖은 소리를 하러 온 걸 보니, 잠이 안 오나 보네요. 마침 배가 고픈데…… 점심이라도 먹을까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셀린느가 지금 당장 창문에서 뛰어내리자고 제의했어도 그 말에 따랐을 것이다.
그는 직감했다.
이제 자신은 셀린느의 부탁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