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셀린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침내 서로가 서로의 시야에 들어왔을 때.
새벽 공기에 셀린느의 목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레온하르트!”
“…….”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메 셀린느의 이름조차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셀린느의 모습을 눈으로 좇는 것뿐이었다. 마치 잠시라도 눈을 떼면, 그녀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셀린느의 몸은 온통 진흙과 피로 뒤덮였지만, 머리칼은 햇살을 받아 반짝 빛났으며 뺨은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셀린느…….’
뺨에 뜨뜻미지근한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불현듯 깨달았다.
지금 가슴속에 차오르는 이 애달픈 감정은 그가 감히 품어서는 안 되는 종류의 것이라는 걸.
레온하르트는 옴짝달싹 못 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셀린느가 진흙을 모두 헤치고 그의 앞에 도달할 때까지.
그는 셀린느를 흐려진 시야로 내려다보았다. 말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괜찮냐고, 걱정했다고, 보고 싶었다고, 미치는 줄 알았다고, 찾지 못했다면 정말 미쳐 버렸을 거라고…….
하지만 그는 그중 무엇 하나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진흙을 헤치는 셀린느의 발걸음은 레온하르트를 발견하자마자 빨라졌다.
‘역시, 레온하르트였어.’
레온하르트의 주위엔 진흙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진흙 속에서 발견한 마력의 흔적은, 레온하르트가 그녀 대신 진흙과 사투를 벌인 흔적이었으리라.
‘그럼 그것도 꿈이 아니었겠구나…….’
셀린느는 자신이 죽기 직전 보았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진이 다 빠졌는데도 어디선가 힘이 새록 솟아나 계속 진흙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마침내,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앞에 도착했다.
레온하르트는 온통 진흙과 그녀의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다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셀린느는 그를 불렀다.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
“…….”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붉어진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새파랗게 변한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문득,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꽉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
그렇지 않아도 나무토막처럼 경직되어 있던 레온하르트의 몸이 더욱 뻣뻣하게 굳었다.
셀린느가, 자신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머릿속에서 아우성치는 이성을 무시한 채 셀린느를 마주 안아 주었다.
으스러지게 껴안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고, 귀한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슬며시 손을 얹는 게 이성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미안해요.”
“……?”
“오늘 밤이요…….”
셀린느는 말꼬리를 흐렸다.
레온하르트는 목에서 무언가가 울컥, 차오르는 걸 느끼며 셀린느를 내려다보았다.
최근 이렇게 처절한 모습의 셀린느를 본 적이 없었다.
지금만 해도 서 있는 것도 한계인 듯 자신에게 몸을 기대 오지 않는가.
어제, 그녀가 겪어야 했던 일에 비하면 겨우 하룻밤 악몽 좀 꾸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다 쉬어 버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냥 꿈이니까. 악몽이야 하룻밤 버텨 내면 끝이다.”
“……꿈인 줄 알았어요.”
“……?”
“레온하르트는 당연히 호텔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환각인 줄 알았어요.”
“내 이름은 불렀잖나.”
“꿈에서라도, 레온하르트를 보니까 기뻤어요.”
셀린느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여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녀는 레온하르트가 진흙을 없앤 자리만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는 늪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마법사들은……”
“살아 있어.”
레온하르트는 재빨리 셀린느의 말을 끊었다. 그녀가 별것 아닌 일로 마음고생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제 다들 정신을 차렸는지, 점점 마력이 강하게 느껴지는군. 별일 없는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마라.”
셀린느는 잠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레온하르트의 말이 맞았다.
마법사들 특유의 정제된 마법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이것들도 그자들이 치우도록 내버려 두면 되겠지. 평범한 진흙인 것 같으니.”
“저, 로즈가……”
“그 마법사 말인가?”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셀린느가 만난 지 겨우 하루밖에 안 된 마법사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알았다. 만나면 바로 호텔로 돌아가도록 하지. 이곳은…… 지긋지긋하니까.”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인 채 레온하르트와 함께 그가 출발했을 법한 기슭을 향해 걸었다.
진흙이 완전히 치워져 걷기가 수월했지만, 지칠 대로 지친 셀린느에겐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에게 반쯤 매달리며 걷는 셀린느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문득 셀린느가 푹 쉴 수 있게 안아 올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가까스로 억누를 수 있었다.
‘…….’
레온하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간 별생각이 없이 무시했던 흑마법사들의 저주가 기억 저편에서 튀어나와 망령처럼 그를 공격했다.
- 네 자손들은 대대로 썩어 문드러지리라!
레온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가슴 한편에서 부글거리기 시작해 어느덧 그의 온몸을 차지해 버린 감정을 무시하려고 노력하며.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셀린느가 원하는 대로 따르는 것밖에 없었다.
셀린느는 늪의 기슭에 쓰러지듯 올라섰다.
만약 평범하게 클리어했다면 자그마한 보상이 그녀를 반겼을 것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라는 치트키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셀린느는 별 감흥 없이 눈앞에 굴러다니는 나무 상자를 열었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셀린느는 나무 상자를 발치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후 사방을 살폈다.
대부분 썩어 문드러진 꽃밭인 와중에 아직 생생한 꽃잎을 빛내는 꽃 몇 송이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셀린느는 홀린 듯 그것들을 향해 다가갔다.
-우르르 쾅!
갑자기, 땅이 세차게 흔들렸다.
셀린느는 순간적으로 놀라 무릎을 꿇었고, 레온하르트가 재빨리 그녀를 감싸 안았다.
“……!”
땅이 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마법사들이 한 명씩 기어 나왔다.
셀린느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말하지 않았나. 다 살아 있다고.”
***
아버지와 함께 있던 로즈와의 격한 해후를 마친 후 셀린느와 레온하르트는 이동 마법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셀린느는 값비싼 바다여우 털가죽으로 만든 카펫에 진흙을 잔뜩 묻히며 주저앉았다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그대로 앉아 있어. 뭣하면 누워도 되겠군.”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셀린느의 곁에 앉았다. 그는 셀린느를 바라보지 않은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 널 보내지 않았다.”
“…….”
“셀린느. 부탁 한 가지 해도 되겠나.”
“……뭔가요?”
“제발, 앞으로 내 곁을 떠나지 말아다오.”
“…….”
셀린느는 침묵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 명령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에게 절절히 부탁할 뿐이었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셀린느가 차마 입 밖으로 할 수 없는 답이.
“……미안하군.”
“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했으니까.”
레온하르트는 대답하며 무심코 셀린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가, 흠칫하며 몸을 뒤로 뺐다.
셀린느는 시선을 피하려는 레온하르트를 반절 붙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 이것 하나는 약속할게요. 살기 위해 노력하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
레온하르트는 끔찍한 죽음을 바로 어젯밤 겪었음에도 흔들림 없는 청회색 눈을 반쯤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고맙다.”
셀린느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미안할 것도, 고마울 것도 없어요. 오히려 제가 미안하고 고마운걸요. 항상.”
레온하르트는 그 말을 그대로 셀린느에게 되돌려 주고 싶었지만 가만히 있을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셀린느는 온통 더러워진 카펫을 한숨을 쉬며 내려다보았다.
“이러다가 이대로 자 버리겠네요……. 어서 씻어야겠어요.”
순간,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러도록.”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갑자기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지?’
언젠가 레온하르트에게 비슷한 소리를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의 레온하르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알몸으로 목욕하고 있을 때에도 들어온 적이 있지 않았는가.
‘그땐 내가 죽어서 그 충격으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었나…….’
하지만 굳이 추궁할 사안은 아니었기에 셀린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레온하르트도 좀 씻고 푹 쉬어요.”
“…….”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셀린느는 욕조에 몸을 잔뜩 담가 따뜻한 물을 만끽했다. 물론, 깜박 잠이 들어 죽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셀린느는 잠을 쫓아내기 위해 좋아했던 가요들을 흥얼거렸다.
‘슬슬 일어나야겠어.’
눈꺼풀이 자꾸만 감기는 걸 보니, 조심하지 않으면 레온하르트를 더욱 힘들게 할 것 같았다.
셀린느는 재빨리 욕조에서 빠져나온 후 잠옷을 대충 입고 침대로 올라갔다.
아직 아침이니 푹 자 두었다가 밤에 레온하르트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몸에 잔뜩 들러붙은 진흙과 피를 찬물로 씻어 내며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셀린느가 아무 생각 없이 평범하게 던진 말에 당황한 자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정신 차리자.’
레온하르트는 버리는 것 말고는 답이 없을 듯한 값비싼 옷더미를 화풀이하듯 내던졌다.
대체 이 감정은 뭐란 말인가.
여자에 설렌 적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 지나가는 사람들에 불과했고, 레온하르트는 임무 한 번으로 그들을 쉽게 잊어버렸다.
셀린느는 달랐다.
만에 하나 저주를 풀지 못한다면 레온하르트가 평생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었고, 풀더라도 영원히 북부의 손님으로서 북부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설령 셀린느가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으로 영영 떠나간다 하더라도 도저히 잊지 못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가 품은…… 감정 또한 달랐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여태껏 이렇게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힌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 옆방에 있을 셀린느가 너무나 보고 싶었고,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져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
레온하르트는 크게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이러한 충동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그녀를 의식적으로 피해야 할 터.
“……!”
느닷없이 찾아온 깨달음에 레온하르트의 전신이 바짝 긴장했다.
당연히 셀린느는 오늘 밤도 그의 곁에 같이 있겠다고 할 것이다.
식은땀이 한 줄기 레온하르트의 이마에 맺혔다.